소설리스트

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80화 (180/195)

[180화] 만세일계 고조선을 위하여 (完)

일본 열도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은으로 만든 고조선의 화폐 홍익전은 맑은 물에 떨어져 번져나가는 잉크처럼 빠른 속도로 주변국에 퍼져 나가면서 동아시아의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했다.

거기에 기원전 239년 여름에 마침내 좌현왕 두만이 이끄는 흉노의 막강한 기병대가 서역과의 무역로를 가로막고 있던 월지인을 초원에서 몰아낸 후 서역에서 가장 큰 제국인 셀레우코스 제국과 통하는 육상 무역로를 개척하면서 고조선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갔다.

그러자 동아시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인과 학자, 그리고 장수가 부와 명예를 거머쥘 기회를 잡기 위해 고조선으로 몰려오면서 고조선의 황금기가 무르익어갔다.

그러나 한반도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너무 거리가 멀고 고대의 건축기술로는 아직 드넓은 압록강에 큰 다리를 놓기 어려웠기에 중원 서역의 인재들이 왕검성에 가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실크로드가 개척된 지 약 1년이 지난 기원전 238년의 한여름날, 국상 한비는 한부 왕검을 알현해 진언을 올렸다.

“폐하. 이제 우리 조선은 서역의 마우리아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천하의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넓은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반도에서 서쪽 초원에 이르는 대국의 수도가 영토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다 보니 폐하의 어명이 흉노의 좌현왕에게 전해지기까지 많은 시일이 걸리며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모으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실 짐도 요즘 국상이 말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소?”

“본래 조선은 요서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선대 왕검께서 연나라의 침략을 피해 도성을 반도로 옮기신 건 불과 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하오나 이제 천하에 감히 조선을 위협할 나라나 부족이 모두 사라졌으니 대국 조선의 왕실이 더는 좁은 반도에 웅크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서쪽의 다른 나라와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역으로 천도하자 이 말이구려.”

“그렇사옵니다. 폐하.”

“과거 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은 연나라군의 공격에 폐허가 됐으니 다시 그곳에 도성으로 삼을만한 도시를 세우려면 적잖은 시일 이 걸릴 테니 서쪽 땅으로 도성을 옮기려면 계로 가는 수밖에 없겠소.”

“소신의 생각도 폐하와 같습니다.”

과거 연나라의 수도였던 계는 한부가 연나라를 정복한 후 왕검이 되기 전까지 그 지역을 통치하는 동안 많은 인재와 백성이 모인 덕에 인구수만 보면 왕검성보다 더 큰 대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계에는 합종군의 진나라 정벌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대나무 상하수도 등의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한 곳이고 연나라 왕실이 사용하던 궁궐이 남아있기에 다른 지역보다 적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도 고조선의 수도를 옮길 수 있는 곳이었다.

그 후 한부는 여러 제후와 대신을 궁궐로 불러서 어전회의를 열어 천도의 실익을 따져본 다음 계로 도성을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군 이래 조선을 다스려오신 수많은 선조의 숨결이 남아있는 옛 도성의 터에 왕검성이나 여나라의 수도 함양에 비견될 만한 웅장한 도시를 세우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자가 많은 요서의 백성에게 과도한 노역의 의무를 지우고 싶지 않소. 하북의 교통요충지이자 든든한 성벽과 여러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계로 도성을 옮기겠소. 경들은 지혜와 힘을 모아 이 사업을 추진해주시오.”

“삼가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날 이후로 왕검성과 계의 시내에는 나라의 중심지를 다시 만주와 하북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되면서 시끌벅적해졌다.

계 시내 곳곳에선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연나라 왕실이 사용하던 궁궐은 대제국 고조선 왕실의 위상에 걸맞은 위엄을 갖추어나갔고 그 주변에는 왕립 도서관과 여러 관청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검성의 대소신료들은 여러 문서와 보물을 새 도성으로 옮길 준비를 진행했다.

그렇게 약 5년이 지나 기원전 234년 봄이 되자 드디어 한부는 가족과 여러 제후, 그리고 신하와 백성 수만 명을 이끌고 왕검성의 궁궐을 나서는 날이 찾아왔다.

한부는 열 살 때부터 40대 중년이 된 지금까지 집으로 여겨왔던 궁궐을 나서는 날이 되자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구나. 호랑이 부족의 농간으로 궁궐 담장 안에 갇혔을 때는 감옥처럼 여겼었는데, 더 크고 좋은 새집으로 이사 가는 데도 아련한 기분이 들다니.’

그는 고조선의 태자가 된 이후 처음 조나라의 사신을 만났던 연회장과 석과 계와 함께 무술과 학문을 연마했던 이룡도의 훈려장,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자주 국정을 논했던 왕실 서재와 알현실을 둘러본 후 궁궐 안뜰로 걸어나왔다.

그러자 그곳에서 내관 한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선대 왕검 한열이 입가에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왕검. 옛날 집의 풍경은 모두 눈에 담아두었소?”

“네. 아버지. 천도를 마친 후에도 몇 년 동안은 고향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왕검은 그럴지 모르나 이 아비는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라오. 아마 나이가 지긋한 다른 제후들도 비슷한 심정이겠지요. 대체 몇십 년 만에 요서와 하북의 흙을 밟는지 모르겠구려!”

“분명 먼저 가신 어머님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시겠지요. 곧 요서의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의 묘를 이장할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왕검. 이 아비도 장차 천수를 다하면 좁은 반도보다는 옛 아사달의 터 근처에 묻히고 싶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두 분의 묫자리는 같은 곳에 보아두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새 도성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소.”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 후 왕검성을 떠난 고조선 왕실의 행렬은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내린 다음 계로 향했다.

기원전 234년 5월 2일,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한부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왕궁으로 탈바꿈한 새 수도의 궁궐 옥좌에 앉아서 첫 어전회의를 열고 그동안 고생한 대소신료들의 공을 치하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성공적으로 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경들의 노고 덕분이오. 특히 밤낮으로 여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한 국상의 공이 크니 황금 다섯 근과 좋은 비단 쉰 필을 내려 치하하겠소, 다른 대신들에게도 각자의 공에 걸맞은 상을 내리리다.”

국상 한비는 왕검의 말을 듣고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모두 폐하께서 어질고 현명한 정치를 펼치신 덕에 나라의 큰 사업을 신속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한 명씩 입을 열면서 천도의 성과를 늘어놓았다.

“이제 도성에 새로 지은 왕립 도서관에는 주변국은 물론이고 서역에서 들여온 다양한 서적이 가득합니다. 그곳의 지식을 배우러 온 여러 나라와 부족이 선비들이 짐의 어진 신하가 되어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킬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불가의 승려들은 전보다 쉽게 조선의 도성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게 됐으니 불가의 사상이 천하 구석구석까지 전해질 것이옵니다!”

한부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만족스러운 듯 끄덕인 다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경들의 노력 덕에 이 나라는 눈부시게 발전해 왔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소. 지금은 불가의 승려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고이면 썩는 법.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되 조정이 불가의 승려들을 관리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하오.”

그 말을 들은 국상 한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불가의 창시자이신 폐하께서 이미 승려들을 잘 지도하고 계시니 부패한 불제자가 백성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는 일은 없지 않을는지요?”

“그러나 짐이 영면에 들고나서도 왕검이 불가의 지도자 노릇을 하게 두는 건 옳지 않을 듯하오. 지나치게 종교에 심취한 후세에 왕검이 내세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현세의 백성을 다스리지 않으려 들지도 모르니 말이오.”

“음······. 후세에는 분명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듯하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백성과 다른 승려들의 존경을 받는 승려 중에서 왕실의 인가를 받은 자를 불가의 지도자인 종정으로 삼아 승려들을 지도하도록 하겠소, 또한 나라 전체의 승려와 사찰의 수를 정해두고 불제자는 상업이나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하여 종교가 정치를 망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겠소. 그 일에 필요한 세부적인 정책은 국상이 마련해 주시오.”

“삼가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원 역사의 고려와 요나라, 그리고 원나라는 말기에 불교 승려가 부패하면서 백성을 수탈하거나 종교행사에 국가 예산을 탕진해 망국의 시기를 앞당겼다.

한부는 불교를 통치이념 중 하나로 삼되 원 역사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조정이 종교를 견제할 방법을 마련한 것이다.

그 후 왕검과 대신들은 한참 동안 어전회의를 이어가며 대제국을 다스려 나갈 방법을 논의했다.

마지막 토론을 마치고 한부가 회의를 끝내려고 하는데, 다시 국상 한비가 입을 열었다.

“아, 폐하. 허락하신다면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싶습니다.”

“한 국상.이미 하늘에 석양이 깔렸으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내일 다시 논의하는 게 좋겠소.”

“중요한 안건이긴 하지만 논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럼 말씀해보시구려.”

“이제 조선은 중원의 패자이자 천하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야만인이 세운 약소국이나 사용하는 두 글자 국호를 쓰고 있으니 패자의 나라답지 못합니다. 그러니 외자 국호와 함께 도성의 이름을 새로 지어 패자의 나라다운 위엄을 세우시옵소서.”

한부는 국상의 말을 듣고 불쾌한 듯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다.

‘한비자도 아직은 중원 중심의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구나.’

전근대의 중국인들은 외자 국호는 중원의 나라나 천자의 나라에만 허용된 것이고 여러 자 국호는 야만인의 나라가 쓰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한부는 그런 고대 중국의 관습에 따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죽기 전에 중원 중심의 편협한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아 놔야지. 안 그러면 간신히 일군 제국이 또 다른 중국이 돼버릴 테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비와 눈을 마주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국상. 경의 말대로 패자의 나라다운 국호와 도성의 이름을 새로 짓겠소. 하지만, 주나라 봉신국의 관습에 따라 외자 국호를 짓지는 않을 거요.”

“패자의 나라가 여러 자 국호를 쓰다니······. 그러시다면 어떤 이름을 새 국호로 삼으시려는지 여쭤도 될는지요?”

“나라 이름을 조선의 위상에 걸맞게 기존의 국호 앞에 높을 고(高)자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짓겠소. 또한, 새 도성의 이름은 옛 조선의 도성과 같은 ‘아사달’로 바꿀 것이오.”

한비를 비롯한 몇몇 중원 출신 대신들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미 왕검이 뜻을 굳혔음을 알아차리고는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잠시후 옥좌 앞에 늘어선 대신들은 새 국호를 외치면서 만세를 외쳤다.

“왕검 폐하 만세! 고조선 만세!”

[첫번째 후일담 – 전기의 발견과 반가운 손님]

기원전 233년 7월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한부 왕검은 아사달의 교외에서 크테시비우스 박사를 비롯한 여러 학자와 함께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 실험은 벼락이 치는 날 허허벌판에 길이 5m짜리 쇠막대를 세워놓고 거기에 벼락이 떨어지도록 유도해 전기를 물이 담긴 유리병에 저장하는 것.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번개가 전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피뢰침과 축전기를 발명하는 실험이었다.

한부는 혹시라도 우산에 벼락이 떨어지는 상황을 우려해 가죽으로 만든 우비를 입고 날이 맑을 때 인부들이 설치해놓은 피뢰침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근대에는 의외로 번개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가 컸지. 이 실험이 성공해서 피뢰침으로 재난을 막는 겸 전기와 전류의 개념까지 확립해두면 고조선의 과학 발전을 엄청나게 앞당길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너무 이른 시기에 화석연료를 개발하면서 너무 이른 환경재앙을 막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고조선은 수십 년 전에 고대 그리스의 공학기술을 적용한 석탄을 사용하여 눈부신 공업발전을 이루었지만, 이 사실은 한부를 오히려 불안하게 했다.

다른 과학 분야의 발전이 미비한 상황에서 기계공학만 급속도로 발전해 편리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원 역사의 21세기에 문제 됐던 기후위기를 앞당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 역사에선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한 2백 년 정도 후에 기후위기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지. 지금은 서기 18세기보다는 인구가 훨씬 적어서 환경파괴 속도가 그때보다는 느리겠지만, 지금부터 화석연료를 마구 쓰다 보면 서기 5세기쯤에는 현대 수준의 기후위기가 찾아와도 놀라울 게 없다.’

그 대안으로 그가 생각해낸 것은 석유가 연료로 사용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어명으로 석탄 사용을 제한하면서 대신 전기의 유용성을 일찌감치 발견하여 기원전의 인류가 자연스럽게 풍력발전이나 수력발전 등 화력발전보다는 친환경적인 기술 개발에 몰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기의 행동이 일으킨 나비효과가 만들어나갈 몇백 년 뒤의 미래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고막을 찢을듯한 천둥소리가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

- 우르르릉! 콰앙!

그러고 나서 먹구름을 뚫고 나온 하얀 번개가 피뢰침 꼭대기로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본 크테시비우스 박사는 들뜬 목소리로 한부 왕검에게 소리쳤다.

“폐하! 대성공입니다! 몇 번 더 같은 실험을 반복해봐야 확실하겠지만, 번개가 높고 뾰족하며 금속으로 된 물체에 더 잘 떨어진다는 폐하의 가설이 맞을 듯합니다!”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오. 크테시비우스 박사. 정말로 저 물이 담긴 유리병에 전기가 저장됐는지를 확인해봐야 하니 말이오.”

“그렇지요! 낙뢰의 피해를 막을 피뢰침의 발명도 대단하지만, 전기를 저장할 수 있고 전기로 기계장비를 움직일 수 있다는 폐하의 가설까지 사실로 확인되면 고조선의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해나갈 겁니다!”

한부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크테시비우스 박사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전기에 관한 연구는 그리스인 학자에게 맡기는 게 딱이지. 기원전에 전기의 존재를 아는 몇 안 되는 민족이니까.’

인류 역사상 전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기원전 6백 년경의 그리스인 철학자 탈레스이다.

그는 나무의 수지가 화석화되어 만들어진 보석 호박을 털가죽으로 문지르면서 닦다가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붙는 현상을 보고 처음 정전기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박에서 마찰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호박 속에 사는 신이 신통력을 부리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른 잘못된 상식을 한부가 깬 것이다.

크테시비우스 박사는 너무 기쁜 나머지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을 달려 전기가 담겨있는 유리병 쪽으로 달려갔다.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박사! 잠깐만 기다리시오! 비가 그치기 전에는 피뢰침에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하오! 그리고 그 유리병을 맨손으로 만지지 마시오!”

그러나 흥분한 그리스인 학자는 바람 소리에 묻힌 왕검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축전기의 쇠붙이 부분을 만지고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앗! 따가워!”

한부는 그런 박사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뭐, 라이덴 병에 저장된 전기 정도로는 사람이 크게 다치진 않겠지만.”

라이덴 병은 원 역사에서 18세기 중반에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의 과학자 반 뮈셴브루크가 개발한 최초의 축전기이다.

이 발명품은 안팎을 주석박(朱錫箔)으로 감싼 유리병의 입구를 절연체로 틀어막고 주석, 철로 만든 얇은 판과 쇠사슬이 부착하여 전기를 저장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저장할 수 있는 전하량이 작아서 사람을 해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은 물건이다.

한부는 고대 그리스의 기술로 만든 유리병이 근대의 유리처럼 축전기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크테시비우스 박사의 비명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전생의 고등학교 과학수업 시간에 배운 기억을 더듬어서 만든 것치고는 잘 만들어진 모양이네.’

그 후 크테시비우스 박사는 왕검의 명대로 일단 피뢰침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 날씨가 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꺼운 쇠가죽 장갑을 손에 끼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축전기를 들고 한부의 곁으로 돌아왔다.

“폐하! 대 성공입니다! 전기를 맨손으로 만지면 찌릿한 느낌이 들 거라던 말씀이 정말이었군요!”

“그 병에 담긴 전기의 양이 워낙 적어서 찌릿한 정도로 끝난 거요. 전기는 양이 많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힘이니 늘 조심히 다루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이 물건의 이름은 뭐라고 지으시겠습니까?”

“아사달 근처에서 처음 실험에 성공했으니 아사달 병이라고 합시다.”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한부는 한 번의 실험으로 두 가지 발명품의 효용성을 확인한 후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로 돌아왔다.

그런데 왕검 일행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관이 빠른 걸음으로 한부에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부는 그런 내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었다.

“이 내관. 왜 궁궐에서 짐을 기다리지 않고 성문까지 마중을 나왔는가?”

“폐하. 지금 궁궐에 서역의 국빈이 찾아와서 급히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성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역의 국빈?”

“그렇습니다. 마우리아의 대왕 아소카께서 친히 폐하를 뵙고자 5천 명의 사절단과 함께 아사달에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아소카 대왕께서 찾아오셨다고!”

아소카 대왕.

과거 한부가 조국의 발전에 필요한 선진문물과 물자 인재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던 고조선의 은인.

항해기술이 조선술이 발전하고 어우락을 지나 인도 아대륙으로 통하는 육상무역로가 뚫린 덕에 고조선과 마우리아는 전보다 자주 서로에게 사절을 보내왔지만, 워낙 나랏일이 바빠 왕이 상대국을 찾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부는 이제야 은인의 방문을 알린 내관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내관! 아소카 대왕께서 찾아오셨으면 즉각 짐이 있는 곳에 전령을 보냈어야 할 것 아닌가!”

“소······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소신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아소카 대왕께서 폐하의 실험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셔서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음······. 그래도 그렇지. 그럼 어서 대왕을 모신 곳으로 짐을 안내하게.”

“삼가 어명을 받을겠사옵니다. 폐하.”

한부는 일행과 함께 급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아소카 대왕에 관한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왕께서 원 역사에 몇 년도에 돌아가셨더라? 자세한 연도는 기억 안 나지만, 아마 1년에서 3년 사이였던 것 같은데.노쇠하신 분께서 이 먼 곳까지 오신 이유가 뭔지 궁금하구나.’

그러는 동안 그는 어느새 궁궐의 국빈관 안에 들어섰고 드디어 아소카 대왕과 다시 마주했다.

“한부 왕검이시여.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부는 자기에게 동아시아의 예법에 따라 두 손을 모으며 인사하는 아소카 대왕을 바라보자 짠한 기분이 들었다.

‘인도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도 세월에는 장사 없구나······.’

쭈글쭈글한 얼굴에 가득한 검버섯과 굽은 등, 그리고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기원전 3세기 최강대국을 호령하던 대왕은 이미 천수를 다해가고 있었다.

한부는 그런 노왕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경의를 표했다.

“고조선의 왕검 한부가 위대하신 마우리아의 삼라트 아소카를 뵙습니다.”

“왕검이시여. 마우리아와 고조선은 국격이 대등한 나라인데 어찌 군주가 군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신단 말입니까?”

“이 인사는 상전이 아닌 은인에게 드리는 감사의 인사입니다. 그동안 사절을 통해 종종 인사를 드리긴 했으나 직접 대왕을 찾아뵙지 못해 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왕검께서는 한창 일할 연세이시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본인도 태자에게 국정을 넘기지 않았으면 먼 여행길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삼라트시여. 그런데 어찌하여 안락한 노후를 보내시는 대신 제 나라를 찾아주셨는지요?”

“왕검께서 동방에 부처님의 나라가 세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열반에 들기 전에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노구를 이끌고 무모한 도전을 해봤습니다. 편안한 마차를 타고 육로로 아사달에 왔음에도 제법 고생을 했는데 과거 바닷길을 개척하면서 마우리아에 온 왕검의 결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 지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삼라트시여. 그럼 고조선을 보신 소감은 어떠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부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소박한 승려들과 근면하게 일하는 고조선의 신하와 백성들을 보고 본인이 그동안 잘못된 정치를 펼쳐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혀서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삼라트께서는 이곳 동방에서도 ‘아육대왕’이라는 존칭으로 불리실 정도로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성군이십니다. 수십 년 동안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봐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인이 열반에 들고나면 부처님의 나라 마우리아는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빠르게 무너져 내리겠지요. 이 늙은이는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그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한부는 노왕의 말을 듣고 바로 위로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고조선에서 수입된 문물이 마우리아 제국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구나······.’

현재 마우리아는 나라 전체에 불교의 관용정신에 기반을 둔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복지국가였다.

병든 백성과 가축에게는 왕실이 운영하는 병원과 동물병원이 제공하는 무료 약과 가뭄이 들면 나라 곳간의 곡식을 풀어 싼 이자에 빌려주는 구휼 정책.

하루가 멀다하고 나라 곳곳에서 열리는 성대한 불교 행사.

하지만, 이런 지상낙원은 아소카라는 초인적인 군주의 정치력과 카리스마 덕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것에 불과했고 그의 아들은 암군이 아님에도 아버지가 물려준 나라를 담을 그릇이 되지 못했다.

완비된 제도가 아닌 개인의 역량에 기댄 제국은 초인 군주가 사라지면 서서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부는 잠시 고민하다가 원 역사의 기록을 떠올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마우리아의 삼프라티 왕자께서 삼라트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라는 소문이 여기 아사달까지 들려옵니다. 삼라트께서 열반에 드시면 잠시 나라가 어지러울 수는 있으나 곧 질서와 평화를 되찾을 겁니다.”

“삼프라티는 능력은 뛰어나나 불교가 아닌 자이나교를 믿습니다. 왕위를 이을 태자도 아지비카 교도라 부처님 말씀을 멀리하지요. 앞으로 몇 년 후면 마우리아 곳곳에서는 불경 대신 이교의 주술이 울려 퍼질 겁니다. 그리고 일관성 없는 종교와 정책이 시행된 나라는 본인처럼 늙어가다가 쓰러지겠지요.”

“아······. 삼프라티시여.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렇겠지요. 하지만 고조선은 마우리아보다는 훨씬 오랜 세월 동안 번영을 이어나갈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왕검께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시옵소서. 삼라트시여.”

“본인이 열반에 들면 서서히 죽어갈 마우리아 대신 천하 구석구석까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부는 노왕의 부탁을 듣고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대답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삼라트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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