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이와미 은광
염파가 지휘하는 선단은 나흘 동안 항해한 끝에 일본 열도 중 혼슈의 서부 연안에 도착했다.
기함의 망루 위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던 선원은 수평선 위로 육지 모습을 드러내자 큰 소리로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전방에 육지가 보인다! 전방에 육지가 보인다!”
그러자 기함의 선장은 선원들에게 배의 속도를 줄이고 다른 배에도 깃발로 신호를 보내 상륙할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고조선 함선 50척의 갑판 위는 돛의 밧줄을 당기고 여러 가지 물건을 나르는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염파는 홀로 뱃일에 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기에 기함의 선수에 서서 점점 가까워지는 육지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저곳이 바로 왜인이 산다는 섬인가? 과연 저 궁벽한 곳에 정말로 왕검께서 말씀하신 야만인들이 살고 있을지 궁금하구나.”
한부는 고조선의 선단이 동래항을 떠나기 전에 현재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주류 토착민인 조몬인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지만, 염파는 젊은 왕검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벽지 중의 벽지에 사는 야만인이라도 설마 금속의 존재조차 모르는 자들이 있을 리가 있나? 왕검께서 이번만큼은 저 섬의 토착민들을 너무 얕보신 것 같구나.”
그러나 고조선 선단이 혼슈 섬의 해안가에서 천연항구를 쓸만한 작은 만을 찾아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염파는 한부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평군! 저기 좀 보십시오! 활과 창으로 무장한 왜인 수백 명이 만의 백사장에 늘어서 있습니다!”
선장이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외치자 염파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허허! 석기를 사용하는 털북숭이 야만인이라! 왕검께서 말씀하신 대로구나!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에 아직도 저런 족속이 남아있을 줄이야!”
현재 일본 열도의 주류 토착민인 조몬인은 다른 동아시아인에 비해 키와 체격이 눈에 띄게 작았다.
또 이들은 한부가 미리 설명한 대로 온몸에 체모가 많이 자라 있어서 염파는 처음 보는 토착민이 왜인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몸에 걸친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과 손에 들고 있는 조잡한 흑요석 창은 혼슈 동부해안에 사는 토착민이 아직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명했다.
염파는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활시위에 화살을 먹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토착민들을 보면서 부관을 불러서 명령했다.
“왜인들은 우리를 환영할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구나. 어쩔 수 없이 무력으로 길을 뚫어야 할 것 같으니 내 활과 화살을 가져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관은 곧 염파가 젊은 시절부터 즐겨 쓰온 한나라산 목궁과 화살통을 가져왔다.
염파는 왼손에 활을 들고 화살 다섯 개를 다른 손으로 잡은 다음 그중 하나를 시위에 걸고 자기가 탄 배가 해안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해안선에서 무력시위 중인 일본 열도의 토착민들은 외지인들에게 겁을 줄 생각으로 고함을 지르며 아직 150보쯤 떨어져 있는 고조선 선단의 기함을 향해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기술력으로 만든 조잡한 나무 활에서 발사된 돌화살은 모두 바다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고조선의 선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기함과 해안선의 거리가 1백보로 좁혀졌고 그제야 염파는 몸에 조개껍데기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 대장으로 보이는 토착민을 조준하면서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놓았다.
- 피융!
아치 모양 큰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화살이 정확하게 토착민 전사의 심장에 명중하자 조용했던 해안가에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악!”
먼 거리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갑자기 대장이 죽어버리자 겁을 먹은 토착민들은 부랴부랴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해안선 근처의 숲속으로 도망쳤다.
염파는 그 모습을 보고 기함의 선장에게 지시했다.
“지금은 왜인들이 도망쳤지만, 언제 또 더 많은 동료를 모아서 덤빌지 모른다. 그러니 서둘러 배를 정박하고 숙영지를 지어서 적습에 대비하라.”
“알겠습니다. 신평군.”
선장은 다시 선원에게 깃발을 흔들게 하여 객경 염파의 명을 전했고 각 함선의 선원들은 신속하게 작은 만 안에 배를 대고 돛을 내렸다.
잠시 후 일본 열도에 발을 디딘 고조선의 개척자들은 일개미 떼처럼 일사불란하게 선실에서 자재를 꺼내 망루와 방벽을 세워서 만에 하나 토착민들이 배를 불태우려 드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몇 시간 후 숙영지 건설이 끝나자 염파는 병사 1,500명 중 8백 명은 숙영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원앙진을 배운 병사 7백 명과 광산 기술자들을 이끌고 이와미 은광 탐색에 나섰다.
그는 숙영지의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서 곁에 있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왕검께선 우리가 배를 댄 곳 주변의 산지를 탐색하면 언젠가 은맥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병사들에게 산길을 지날 때는 근처의 숲이나 바위 뒤에 숨어있는 복병을 주의하면서 천천히 행군하라고 전해라.”
“신평군. 왜인들이 쓰는 흑요석 창으로 우리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경번갑을 찔러 봐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진나라 정벌 때 한나라군이 이목 장군이 이끄는 진나라군의 복병에 당한 일을 벌써 잊은 게냐? 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어도 산비탈을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나 바위에 깔리면 무사할 수 없다. 군말 말고 척후병을 부지런히 풀도록 해라.”
“아······.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신평군.”
그 후 염파가 이끄는 고조선 개척단은 배가 정박한 해안가에서 가장 가까운 산기슭에 숙영지를 세우고 하루를 보낸 다음 다음날의 해가 뜨자마자 본격적으로 산악지대 곳곳을 뒤지면서 은맥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속을 지나는 동안 산발적으로 적대적인 토착민이나 맹수의 습격을 받았지만, 염파의 철저한 방비 덕에 큰 인명피해 없이 혼슈 서부를 탐험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던 날 한낮,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은맥을 찾던 광산 기술자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흰 무늬가 새겨져 있는 어두운색 돌멩이를 한 개 집어서 자세히 살펴보더니 그걸 염파에게 보여주면서 소리쳤다.
“신평군! 찾았습니다! 은광석입니다!”
“정말로 그 시커먼 돌이 정말 은광석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신평군! 은보다 납이 더 많이 섞여 있어서 색은 어두워 보이지만, 분명히 은광석입니다!””
“드디어 해냈구나! 참으로 잘했네! 왕검께서 자네게 큰 상을 내리실 게야!”
* * *
은맥을 찾은 후 염파는 동래항에 연락선 세 척을 보내서 고조선 왕실에 이와미 은광의 광맥을 찾은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고조선 개척단의 건설자와 인부를 동원해 은광 근처의 해안가에 항만 시설과 숙영지의 방어시설을 보강하고 순무 등의 작물을 심어 둔전을 실시하면서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
한부는 왕검성의 궁궐에서 동래의 현감이 보낸 서신을 읽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둔전과 수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지역에는 염파가 딱이네.”
원 역사의 염파는 적군을 공격할 때도 큰 활약을 했지만, 그의 능력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한 지역에서 우직하게 버티면서 명장 백기가 활약하던 시대의 진나라군을 몇 년이나 막아내던 때였다.
만약 간신 곽개의 모함때문에 장평을 지키던 신평군 염파가 장군직에서 해임되지 않아 장평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나라는 중원의 이인자 자리를 유지하면서 진나라의 중원 통일을 계속 저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둔전과 수비에 능한 염파에게 식민지 개척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럼 은맥도 찾았고 개척단이 토착민의 방해도 잘 막아내고 있는 것 같으니까 본격적으로 은광 개발에 투자해도 문제없겠네.”
그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서 제후와 대신들에게 은광 개발과 화폐 주조 사업에 착수할 것을 명했다.
국상 한비는 화폐 주조 사업을 총괄하면서 제1 공조의 기술자들과 함께 규격화된 은화를 만들 수 있는 주조틀 개발과 제작을 시작했다.
또 중원에서의 오랜 전쟁이 끝나면서 수요가 줄어든 철과 석탄의 생산지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한반도에서 일할 때보다 높은 임금을 약속하고 희망자를 뽑아 염파가 발견한 은맥으로 보내 은광 개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나 기원전 239년 봄이 되자 염파는 식민지 개척 임무를 마치고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은광에서 캐낸 은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추수철이 지나자 국상 한비는 일본 열도에서 보내온 은괴의 양을 조사한 다음 한부 왕검에게 보고했다.
“폐하. 올해 봄부터 가을까지 왜 땅에서 보내온 은은 약 4만 근이라 합니다.”
“4만 근이라! 광산을 연 첫해부터 그렇게 많은 은을 캤다는 말이오?!”
“객경 염파가 개발한 왜 땅의 은광은 노천광산이라 적은 수고만 들이고도 쉽게 은광석을 캘 수 있다 합니다. 덕분에 당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생산량이 많습니다.”
한부는 국상의 말을 듣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기뻐하면서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금 시대의 한 근을 현대의 무게 단위로 환산하면 약 250 그램이니까 은광 하나에서 1년에 약 10톤이나 되는 은을 캐낸 셈이구나! 전성기의 이와미 은광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기원전에 이 정도 생산량이면 분명 세계제일의 은광이겠지.’
원 역사에서 최전성기를 맞은 이와미 은광의 연간 생산량은 약 30만 톤에서 40만 톤.
한부는 더 많은 인부를 일본 열도에 파견해 새로 개발한 은광의 생산량을 최고로 끌어올릴지를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은 가치가 폭락해서 청동보다도 싼값에 거래될지도 모르지. 아직 전 세계 인구가 2억 명도 안 되는 시대니까. 오히려 지금도 은 생산속도를 늦춰서 시세를 조절하는 편이 낫겠다.’
그는 당분간 왜 은광의 생산량을 연간 3톤에서 5톤쯤으로 제한하기로 마음먹은 후 국상 한비에게 말했다.
“한 국상. 이번에 왜 땅에서 보낸 은 중 절반 정도만 은화를 주조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국고에 잘 보관해 주시오.”
“은 시세 하락을 걱정하고 계시군요.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럼 조선 역사상 첫 화폐는 언제쯤이면 볼 수 있겠소?”
“이미 은이 충분하고 주조틀 개발도 거의 완성됐으니 앞으로 이레만 기다려주시면 폐하의 용안이 새겨진 은화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직도 이레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오? 하루가 1년 같이 느껴지겠구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드디어 역사상 최초로 고조선 왕실이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한부는 옥좌에 앉아서 화폐 발행을 맡은 부서인 호조의 관리들이 가져온 은화가 담긴 커다란 상자를 보더니 알현실 안에 모인 대신들에게 새 화폐의 이름을 반포했다.
“이 은화가 조선뿐 아니라 천하의 모든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아 새 화폐의 이름을 홍익전(弘益錢)이라고 짓겠노라! 경들은 앞으로 우리 조선의 백성이 불편한 물물교환 대신 상거래에 은화를 사용하도록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