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은광을 찾아서
새로운 선우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제가 끝나고 나서 한부는 여러 부족장과 장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만 왕자를 흉노에서 가장 높은 작위인 좌현왕으로 책봉하여 초원의 통치를 맡겼다.
책봉식이 끝난 후 한부는 개마무사대와 함께 부락을 나서면서 좌현왕 두만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처남. 짐은 이만 왕검성으로 돌아가겠네. 부디 흉노를 잘 다스려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과 천신의 계시에 따라 흉노를 번영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서쪽으로 이끌겠습니다.”
그렇게 흉노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한부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왕검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군주가 되어야 할 그에게 느긋하게 고향에서 휴식을 취할 시간은 없었다.
한부가 돌아오기 전에 이미 한열 왕검이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줄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부가 흉노 선우의 예복을 입은 채로 궁궐 알현실에 들어가자 옥좌로 향하는 길 양옆에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여러 제후와 대신이 보였다.
그는 그들 사이를 지나 옥좌에 앉아있는 한열 왕검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폐하. 소자 한부. 무사히 흉노의 탱리고도선우 즉위식을 마치고 지금 돌아왔나이다.”
한열 왕검은 그런 아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장하다! 참으로 장하다! 오늘 우리 태자가 왕검이자 선우가 되는 게로구나!”
“모두 지난 20여 년 동안 폐하께서 물심양면으로 소자를 지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너무 겸양을 차릴 것 없다. 넌 연나라를 멸해 선조의 원수를 갚고 진나라를 멸해 천하를 전란에서 구했으며 많은 개혁을 단행해 나라를 윤택하고 평안케 했다. 이 모든 업적을 마흔도 안된 젊은 나이에 이루었으니 앞으로 네가 다스릴 나라가 얼마나 큰 번영을 이룰지 벌써 기대되는구나.”
“지켜봐 주십시오. 폐하. 폐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조선과 흉노의 백성을 자비와 사랑으로 다스리겠습니다.”
한부가 고개를 숙이면서 아버지에게 대답하자 한열 왕검은 옥좌에서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더 시일을 끌 것 없이 태자가 예복을 입는 즉시 이양식을 시작하겠다! 모든 제후와 대신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의식에 참여하여라!”
한열 왕검이 마지막 어명을 내리자 그 자리에 있는 제후와 대신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알현을 마친 한부는 고조선의 예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한열 왕검과 함께 궁궐의 안뜰로 나가 이양식을 진행했다.
고조선의 이양식은 흥겨웠던 흉노 선우 즉위식과는 달리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대제사장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여러 왕족과 제후, 그리고 대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관을 쓴 한열 왕검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장남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는 한부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머리에 쓴 금으로 만든 왕관을 벗어서 장남의 머리에 씌워주자 궁중 악사가 크테시비우스 박사가 발명만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으로 경건한 곡을 연주하면서 이양식이 마무리되었다.
왕관을 쓴 한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대 왕검이 된 한열이 키가 큰 장남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부 왕검. 조선을 잘 부탁하오.”
“폐하께서 물려주신 나라와 백성을 번영의 길로 이끌겠습니다.”
* * *
한부는 왕검성의 옥좌에 앉은 다음 날부터 다시 고조선의 내정을 다지는 한편 일본 열도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만 왕국의 베테랑 선원들을 고용해 고조선의 선원들에게 천문항법을 가르치게 하는 한편 공조의 기술자들에게 마오리족
전통의 삼각돛과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마우리아 제국의 화물선을 접목하여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면서도 많은 사람과 물자를 운반할 수 있는 군함을 개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고조선의 대신 중에서는 이미 대제국이 된 고조선이 굳이 바다 너머의 섬을 정복하려는 건 과욕이라고 여기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 한나라 출신 국상 한비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한비는 말을 더듬는 장애 때문에 말하는 것을 꺼리는 편임에도 한부 왕검이 국상부에 신형 군함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왕검을 찾아가서 진언을 올렸다.
“폐······ 폐하! 듣자 하니 남동쪽 서······ 섬을 정복하실 생각으로 새 구······ 군함을 개발하라고 명하셨다는 게 사······사실인지요?”“그렇소. 한 국상. 경 또한 그 일에 반대하려고 짐을 찾아온거요?”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미 조······ 조선에는 아직 개척하지 못한 땅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바다 밖의 따······ 땅을 또 차지하려 하······하십니까! 지금 조선은 영토확장 보······보다는 내······ 내정에 힘쓰셔야 하······ 합니다!”
“한 국상. 그래서 더더욱 남동쪽 열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오.”
“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폐······ 폐하.”
“경은 지금 우리 조선에서 가장 시급하게 시행해야 할 정책이 뭐라고 생각하오?”
“화······ 화폐 발행이옵니다. 주······ 중원의 모든 나라 왕실이 화······ 화폐를 발행하여 백성이 편리하게 상거래를 하고 있는데 오······ 직 조선만이 자국의 화······ 폐가 없어 물물교환이 서······ 성행하고 있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데 기왕 왕실 주도로 화폐를 만들 거 청동이나 구리가 아닌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면 천하의 다른 나라들도 우리 조선의 화폐를 즐겨 쓸 것 같소만.”
그 말을 듣고 한비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더듬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한 국상. 왜 그리 기겁하시오? 이제 천하 여러 나라의 물자가 왕검성에 모이는 덕에 조선의 백성 중 누구도 청동을 귀금속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오. 왕실의 보증만 믿고 쓰는 동전보다야 귀한 은으로 만든 은화가 더 널리 쓰이게 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거 아니겠소?”
“하오나 은천 은광에서 나는 은만으로는 중원 제일의 대국이 된 조선의 백성들이 풍족하게 쓸 만큼 많은 화폐를 주조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나라가 청동이나 구리로 화폐를 만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나이다!”
국상 한비의 걱정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 역사의 서양에선 기원전부터 은이 기축통화로 여겨졌지만, 동아시아에서 은화가 본격적으로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대는 명나라 때이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연은분리법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의 은 생산량은 많은 인구에 비해 대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역사의 중국은 유럽인들이 남미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화하여 수탈한 막대한 은을 중국과의 무역에 사용하기 전까지는 은을 기축통화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부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연은분리법을 개발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은광석이 매장되어있는 은광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국상 한비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조선 반도 남동쪽의 항구 동래에서 동쪽으로 닷새쯤 항해하면 큰 섬이 나온다오. 그 섬 해안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쪽 땅과 조선 반도의 은 생산량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은이 매장되어있소.”
“고······ 고작 은광 하······ 하나에 그렇게 막대한 양의 은이 무······묻혀있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한 국상. 그 은광만 찾아내서 개발한다면 천하 모든 나라의 백성이 조선 왕실이 주조한 은화를 사용하게 될 거요.”
“폐······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더······ 더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한부가 말한 은광은 원 역사의 일본 최대의 은광인 이와미 은광인데 그곳에는 서기 15세기 초에는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15분의 1을 차지했을 정도로 많은 은광석이 매장되어있다.
한부는 고조선이 이와미 은광이 있는 지역을 식민지화하여 원 역사보다 약 1,700년쯤 일찍 은을 동아시아의 기축통화로 만들 생각을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이와미 은광은 한반도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관리하기도 편하단 말이지. 그 동네에 원주민이 살고 있으면 반발하면 조금 골치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래 봐야 우리 정예군의 상대는 못 될 거야.’
기원전 3세기 현재 일본 열도의 주류 원주민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조몬인이라고 부르는 농경민으로 금속제련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신석기시대 수준의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원 역사에선 기원전 3세기까지도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일본 열도에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들이 청동기와 철기를 동시에 전파하면서 고대 일본의 문명 발전을 앞당기고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됐는데 지금의 고조선도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한부는 전생의 일본 역사학자들이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임을 입증하는 수많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됐음에도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했음을 떠올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역사에는 일본의 역사 왜곡 같은 건 없을 거다. 굉장히 상세한 사료를 남기고 그걸 입증할 고고학적 증거까지 친절하게 남겨줄 테니까.’
* * *
한부가 국상 한비를 달랜 후 고조선 조정은 한마음으로 초원의 실크로드 개척과 일본 열도에 식민지를 개척할 준비를 착착 진행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원전 241년 여름이 되자 드디어 한반도 남동쪽 끝의 항구 동래항에서 객경 염파가 이끄는 식민지 개척단을 태운 함선 50척이 출항할 준비를 마쳤다.
한부는 고조선인이 역사상 최초로 일본 열도에 진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에 담을 겸 동래항에 내려가 염파에게 물었다.
“신평군. 조나라의 손님인 공이 고된 임무를 스스로 맡아주어서 참으로 감사하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공에게 큰 상을 내리리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폐하. 폐하께서는 조나라와 조선에 적수가 사라진 시대에 소장이 무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셨으니 오히려 감사는 제가 드려야 마땅합니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호쾌하시구려. 열도의 원주민들은 외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을지도 모르니 상륙 후에는 항상 조심하셔야 하오”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자면, 조금은 호전적인 적수를 만나서 다시 한번 가슴 뛰는 전장에 서보고 싶습니다.”
“음······. 그 바람은 제발 이루어지지 않길 바라오. 그럼 왕검성에서 공의 무사한 모습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고 있겠소.”
“폐하. 객경 염파.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나이다,”
염파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한부에게 읍한 후 대장선에 올라 우레같은 목소리로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항해를 시작하라! 어마어마한 은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
노장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고조선인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커다란 함선의 닻을 올리고 돛을 펴면서 흥겨운 뱃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잠시 후 병사 1,500명과 3,500명의 선원과 광산기술자, 그리고 인부를 태운 선단이 동래항을 벗어나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부는 떠나가는 선단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지금 조선의 행정력으로 일본 열도 전체를 다스리는 건 어렵겠지? 중원을 찢어놨듯이 일본 열도도 여러 나라로 나눠놓고 통일되지 못하게 하는 편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