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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77화 (177/195)

[177화] 초원길 개척의 시작

천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마지막으로 즉위식이 끝나자 한부는 단상에 올라 군중을 향해 외쳤다.

“흉노의 충직한 백성이여! 나 탱리고도선우 한부가 너희에게 첫 어명을 내리노라! 지금부터 열흘 동안 성대한 축제를 열 터이니 모두 마음껏 향기로운 술과 좋은 음식을 즐기도록 하라!”

새로운 선우가 명하자 즉위식을 구경하던 흉노의 백성 수십 명이 우렁찬 환호성으로 답했다.

“새 선우께서는 정말 화끈한 분이시구나!”

“그러게 말이야! 축제가 열흘이나 이어진다니!”

하지만 마냥 기뻐한 흉노의 평민들과는 달리 부족장과 장로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선과의 교역으로 예전보다 풍족해졌다고는 하나 유목민족인 흉노는 여전히 농사를 짓는 정주민족에 비하면 식량과 물자가 넉넉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만 왕자도 다른 흉노 지배계층과 같은 마음이었기에 한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조언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시여. 즉위식 직후에 내리신 첫 어명에 반대하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만, 흉노는 조선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라서 이렇게 많은 백성이 참여하는 축제를 열흘이나 이어갈 술과 음식을 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처남. 짐이 흉노의 사정을 모르고 축제를 열라고 명했겠는가? 왕검성을 떠나면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흉노의 여러 부족에 하사할 넉넉한 식량과 물자를 보내라고 명해놨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비축해놓은 술과 고기를 풀게.”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제가 다른 부족장과 장로들에게 선우의 뜻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게. 처남. 짐도 그 자리에 함께하면서 자네 말에 힘을 실어주겠네.”

두만 왕자는 새 선우와의 대화를 마친 후 선우의 천막에 여러 부족장을 불러모아 자기 부족이 겨울을 나기 위해 비축한 양식까지 내놓아야 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흉노의 귀족들을 안심시켰다.

한부는 옆자리에 앉아서 조리 있게 자기 뜻을 설명하는 두만 왕자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그에게 흉노의 통치를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조선과 흉노가 한 나라가 됐어도 바로 유목민족을 정주민족과 같은 정책으로 다스리는 건 무리겠지. 처음엔 처남을 흉노를 다스리는 총독에 임명해서 1 국가 2 체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한부가 조선과 흉노가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 천막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러자 한창 말을 이어나가던 두만 왕자가 조금 언짢은 목소리로 병사에게 핀잔을 주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걸 잊었느냐?”

“죄송합니다. 두만 왕자님. 왕자님의 명을 잊지 않았습니다만, 우현왕이 지금 선우와 왕자님께 보고드려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여 부득이 귀하신 분들의 회의에 끼어들었습니다.”

“우현왕이? 또 부족의 젊은 전사들끼리 싸움이라도 붙은 거냐?”

“아닙니다. 왕자님. 우현왕은 후진의 사절단이 선우께 바칠 귀한 물건이 많이 실려있는 우마차 여러 대를 끌고 우리 부락에 도착했음을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한부는 병사의 말을 듣고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후진왕 여불위는 눈치가 빠르구나! 어떻게 벌써 후진의 궁궐에 짐이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부족장과 장로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중얼거렸다.

“후진이 선물을? 혹시 새로운 선우께 선물을 보낸 건가?”

“웅골 부족장님.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후진은 조선의 봉신국이자 조선을 남방의 패자로 인정한 나라이니 말입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만, 그저 자랑스럽고 신기해서 그럽니다. 흉노 선우의 즉위식에 남방인이 축하 선물을 보내다니······. 선조께서 처음 하늘에서 초원으로 내려오신 후로 처음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나저나 남방인들이 대체 무슨 선물을 ”

한부는 부족장과 장로들이 외국 사절단의 도착을 반기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두만 왕자에게 말했다.

“처남. 외국의 사절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회의는 이만 마치고 환영식을 열어야겠네. 자네가 흉노의 예법에 따라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주겠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선우시여.”

“다른 부족장과 장로는 남방인들이 무슨 선물을 보내왔는지 구경도 할 겸 짐과 함께 사절단과 인사를 나눕시다.”

선우가 제안하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찬성했고 두만 왕자는 사절단을 위한 환영식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

한부가 다가오자 후진의 사절단장 이사가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후진의 승상 이사가 흉노의 탱리고도선우를 뵙습니다.”

“그대가 바로 후진왕의 꾀주머니 이사로구나. 후진에서 온 사절단 중에서 그대가 유능한 재상이라고 말하는 자가 많아 늘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

“따듯한 환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우시여. 소신 또한 매일 중원 최고의 지장이자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이신 선우의 위명을 듣고 늘 꼭 한번 용안을 뵙고 싶어 하던 차에 흉노에 사절로 오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옵니다.”

“듣기 싫지 않은 인사로구나. 그럼 그대의 주군이 짐에게 전하는 말을 말해보아라.”

“후진왕은 소신에게 선우께서 흉노의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는 말과 함께 약소한 성의를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기 바로 뒤에 서 있는 호위병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커다란 청동 상자 수십 개를 들고 들어와서 천막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금과 옥을 깎아 만든 여러 세공품이나 결이 고운 색색 가지 비단 두루마리가 들어있었고 흉노의 부족장과 장로들은 중원의 화려한 사치품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토록 고운 비단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구나!”

“하나같이 남방의 사치품 중에서도 최고급품뿐이군!”

한부는 그런 신하들의 면면을 바라보다가 이사와 눈을 마주치면서 입을 열었다.

“네 주인의 정성이 참으로 지극하구나. 곧 환영식을 열 터이니 좋은 술과 음식을 즐기며 여독을 풀도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선우시여.”

이사가 다시 인사하며 천막 밖으로 나간 후 한부는 선우 즉위식에 참석한 부족장과 장로, 그리고 여러 장수에게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후진이 바친 선물을 모두 나눠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흉노인들은 더욱 크게 웃고 떠들며 후진 사절단과 함께 어울려 축제를 즐겼다.

두만 왕자는 한부의 옆자리에 앉아 동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선우시여. 부족장과 장로들이 뜻밖의 하사품을 받고 꽤 기뻤던 모양입니다.”

“그런가? 후진의 성의가 부족하진 않았지만, 워낙 여러 사람이 나눠 받아서 개개인에게 돌아간 재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아니었나?”

“받은 하사품의 양보다는 질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흉노인은 화려한 색상의 옷감을 좋아하는데 남방인 왕족이 입을 법한 비단을 받고 다들 입이 귀에 걸린 것이지요.”

한부는 두만 왕자의 말을 듣고 원 역사의 기록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묵돌 선우가 흉노인이 한족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하려고 금지한 중국산 사치품 중엔 비단도 있었지. 역시 유목민족을 동화시키는 데는 금융치료가 제일인가?’

흉노가 위치한 오르도스 고원의 초원은 척박하고 궁핍한 곳이었다.

강이 별로 없어 늘 물이 부족한 데다가 겨울에는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기 일쑤이고 한여름 기온도 영상 2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일이 드물 정도로 추워서 고대의 영농기술로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부는 이런 지역에서 사는 유목민들을 내버려두면 자기가 죽고 나면 언제가 흉노가 고조선의 통치를 거부하고 중원의 여러 나라를 침략할 거라고 여겼다.

이런 흉노와 고조선이 평화롭게 한 나라의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유목민들을 개간이 필요한 땅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펼치거나 초원을 장악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무역을 통해 상업민족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한부는 그 두 가지 정책을 모두 사용하여 흉노의 거친 본성을 유순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처남. 혹시 왕검성에서 유학할 때 짐이 젊은 시절에 여행했었던 서역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 들은 적 있나?”

“물론입니다. 선우시여. 마우리아국 출신 승려에게 서쪽 끝에는 색목인들이 사는 크고 부강한 나라가 여럿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의 앞선 기술 중에는 서역에서 들여온 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들이 많다지요?”

“그렇지. 그리고 물자도 마찬가지지. 서역에는 동방에 없는 진귀한 물자가 많고 동방에선 흔한 물건이 서역에선 귀중품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거든. 하지만 아직은 바닷길로 서역에 가려면 너무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서역의 나라와 무역을 트는 건 아직 어려운 일이네.”

“그렇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육로로 서역에 도착할 수 있는 무역로를 개척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무역은 흉노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확실히 말씀하신 무역로를 개척하면 유목민의 자긍심을 지키면서도 부를 누릴 수 있겠군요. 하지만 동방과 서역의 무역은 흉노 서쪽의 나라 월지가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 색목인들의 나라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월지인은 체격이 크고 흉노인 만큼은 아니지만 마상무술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 만만찮은 적수지요.”

“음······. 장인어른이신 선대 선우께서 미처 월지를 전부 정벌하지 못하셨나 보군.”

“그렇습니다. 부디 선우께서 선대 선우의 유지를 이어받아 초원통일 사업을 마무리해 주십시오.”

“그럴수 있으면 좋겠지만, 짐은 곧 왕검성으로 돌아가서 이번엔 왕검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하네. 조선반도와 남방의 나랏일도 많아서 아무래도 짐이 직접 월지 정벌과 무역로 개척 사업을 추진하긴 어려울 듯하네.”

“그럴 수가······. 그럼 이제 초원은 누가 다스린단 말입니까?!”

“처남이 짐의 대리인이자 흉노의 제후가 돼서 초원을 다스리고 서쪽의 무역로를 개척해주게.”

“제가 말입니까?!”

“그렇네. 처남이라면 여러 부족장과 장로의 협력을 이끌어내면서 나라 살림을 돌볼 수 있을 걸세. 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조선 왕실도 유능한 장군이 지휘하는 정예병과 물자를 보내서 월지 정벌을 돕도록 하지.”

“유능한 장군이라 하시면?”

“곧 상장군이 되는 이목 장군을 보내지. 조선에서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천재적인 군략가인 데다가 흉노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장수라네.”

“아버님을 궁지로 몰았었던 이목 말씀입니까······. 확실히 능력만 보면 그 이상의 적임자는 없겠지요.”

“그럼 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가?”

“그리하겠습니다. 선우시여. 서역 무역로 개척 건이 아니어도 월지는 선우께서 물리치신 동호와 마찬가지로 흉노의 오랜 적수입니다. 반드시 월지를 물리쳐서 저 또한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임을 증명하겠습니다.”

“고맙네! 자! 그럼 조선과 흉노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우리도 한잔하세나!”

한부와 제후가 된 두만 왕자는 마유주가 가득 담긴 술잔을 들어 건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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