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흉노의 선우가 되다.
신평군 염파를 영입한 고조선군은 조나라 최고의 명장이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아온 전략과 전술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강해져 갔다.
그러는 동안 고조선 조정은 태자의 지휘 아래 전쟁을 치르느라 미뤄왔던 국토 개발을 진행했다.
늪과 우림이 즐비했던 한반도의 여러 강 하류 지역에 점차 농지와 저수지로 개간되어 나갔으며 홍수를 막기 위한 보 공사가 시작됐다.
또 고조선 각 고을의 현감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조정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하북의 큰 강 곳곳에 나루터를 지으면서 고조선의 물류 운송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나라 경제가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그러나 황금기를 맞아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는 고조선에도 언제나 좋은 소식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242년의 봄이 되자 한부의 둘째 부인인 태자비 진서가 친정인 흉노의 선우가 다스리는 부락에 돌아갔다가 예고 없이 왕검성의 궁궐로 돌아왔다.
국상부에서 일하고 있던 한부는 내관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궁궐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젊은 아내를 만나자마자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부인!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오! 먼 길을 다녀오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소!”
“소첩도 전하를 다시 뵙게 되어 너무나 기쁘옵니다.”
태자비 진서는 진심을 담아 남편에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우러나왔다.
한부는 둘째 아내의 우수에 젖은 목소리를 듣고 흉노의 왕실에 기어코 초상이 났음을 눈치챘다.
“부인. 설마 장인어른께서 결국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신 거요?”
“그렇습니다. 전하······. 흉노 제일의 전사 탱리고도선우께서는 마마를 앓으시다가 결국 소첩과 다른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태자비 진서는 간신히 울음을 참으면서 대답한 후 한부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의 가슴을 눈물로 적셨다.
한부는 그런 아내를 꼭 안아주면서 달래주었다.
“장인어른께선 분명 하늘에서도 다른 조상님과 함께 좋은 말을 타신 채로 바람처럼 사냥터를 달리시겠지요.”
“장례를 치르면서 선우께서 영면에 드신 왕릉에 하인으로 부릴 흙 인형과 그분께서 생전에 즐겨 타시던 말과 순장했으니 분명 그러실 겁니다.”
“하인이 아닌 흙 인형을 순장했다는 말이오? 장인어른께서 큰 결단을 내리셨구려. 분명 후세의 역사가는 오윤 선우를 흉노 역사상 가장 용감한 전사이자 가장 자비로운 성군으로 기록할 거요.”
본래 흉노는 과거의 다른 동아시아 고대 국가처럼 순장을 비롯한 인신공양이 빈번히 일어났다.
하지만 왕검성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불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선우의 장남 두만 왕자가 열정적으로 불교를 포교하고 고조선의 문화를 전파한 덕에 흉노에서도 점차 인신공양 풍습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서 공주는 남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버지이신 오윤 선우의 유지를 이어나가려면 계속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요. 소첩은 전하께서 서들러 흉노를 방문하시어 탱리고도선우의 자리에 오르시라고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먼저 한 국상을 보내 조의를 표한 다음 여름이 되기 전에 사절단과 함께 흉노에 가서 즉위식을 치르겠소.”
“그래서는 때가 늦을지도 모릅니다. 전하. 몇 년 전 전하께서는 조선의 왕족이 선우의 후계자가 되는 데 반대하는 귀족
무리를 과감하게 솎아내셨지요. 그 덕분에 아직은 흉노와 조선이 한 나라가 되는데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자가 없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일이 복잡해질지도 모릅니다.”
“흉노에 심어둔 수하들이 말하길 두만 왕자는 왕위에 욕심이 없다고 들었소만.”
“두만이는 조선 문물에 푹 빠져서 걱정할 것 없지만, 전하께서 하루빨리 숨죽이고 있는 흉노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귀족들이 다루기 쉬운 방계 왕족을 찾아서 선우의 자리에 앉히려 들지도 모르지요.”
한부는 둘째 아내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맞네. 처남을 포섭했다고 안심하고 있을 게 아니구나. 흉노인 중에는 아직 강한 자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남아있을 테니까 다시 한번 조선의 세력을 과시하면서 선우 자리가 내 거라는 걸 확실히 하고 와야겠네.’
그는 그렇게 마음먹고 태자비 진서에게 대답했다.
“부인의 말이 옳소. 그동안 조선 반도와 서쪽 영토의 내정에만 정신이 팔려서 흉노의 내부사정을 면밀하게 살피지 못했구려. 왕검께 말씀드리고 며칠 안에 왕검성에서 출발하겠소.”
“소첩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한부는 태자비 진서와 대화를 마치고 즉시 침실에서 쉬고 있는 왕검을 알현해 둘째 아내에게 들은 내용을 모두 설명한 후 흉노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 소자. 하루라도 빨리 흉노에 가서 선우 즉위식을 치르고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래······. 세력이 강해진 흉노의 군주 자리를 오래 비워두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지. 부디 별 탈 없이 즉위식을 치르고 돌아오너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흉노에 갈 때 이목 장군과 함께 개마무사 1만기를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을는지요?”
“이목 장군을? 가는 길에 아직 조선에 복속하지 않은 북방을 정벌할 셈이냐?”
“아닙니다. 아버지. 그저 흉노의 귀족들에게 자기들을 괴롭혔던 이목 장군을 제가 부리는 모습을 보여줘서 기를 죽일 생각입니다. 그리고 흉노의 가장 큰 적이었던 동호를 무찌른 개마무사의 위용을 보여줘서 조선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동시에 몇 년 전 조선이 흉노에게 베푼 은혜를 상기시킬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구나. 네 뜻대로 하거라. 그건 그렇고, 짐도 네게 부탁할 게 하나 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아버지.”
“흉노의 선우가 돼서 왕검성에 돌아오면 왕검의 자리에 올라 다오.”
“네?! 아직 아버지께선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어찌 벌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정하긴. 물론 특별히 앓고 있는 병은 없지만, 나날이 기력이 쇠해서 얼마 전부터는 식사할 때 드는 쇠젓가락조차도 무겁게 느껴지는구나. 조선에는 흉노처럼 강한 전사를 우두머리를 군주로 삼는 풍습은 없지만, 노쇠하고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 자가 옥좌를 지키고 있어서 나라와 백성에게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
“태자야. 꼭 그리 해주거라. 이제 날씨가 좋은 날 궁궐의 정원에서 먼저 간 부인과 함께 거닐던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면서 조용히 네가 만들어나가는 조선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럼 소자. 서둘러 흉노에 다녀와서 왕검의 즉위식을 치르겠습니다.”
“고맙다. 그럼 네가 다녀오는 동안 짐은 단군이래 가장 화려한 왕검 즉위식을 준비하고 있겠다.”
* * *
기원전 242년 3월 20일 한낮, 한부는 장군 이목과 함께 화려한 예식용 경번갑을 입은 개마무사 1만기를 이끌고 선우의 부락에 들어섰다.
한열 왕검이 한부 일행보다 앞서 보낸 전령이 흉노에 곧 한부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두만 왕자는 부하들과 함께 부락의 입구까지 마중 나와서 한부를 환영했다.
“선우의 부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환대에 감사하오. 흉노의 장수여.”
“전하! 어찌 짧은 시간이나마 친형제처럼 지내던 처남을 남처럼 부르십니까? 참으로 섭섭하옵니다!”
“두만 처남?! 이거 미안하게 됐네! 겨우 다섯 해 만에 건장한 청년이 되었구먼! 이제 키도 나하고 비슷하겠어!”
“십대에게 5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세. 즉위식을 마치면 함께 마유주를 들면서 밀린 얘기를 해보세.”
한부는 두만 왕자와 말을 나란히 몰면서 부락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이목 장군과 기병 1만기가 따랐다.
그러자 이목의 얼굴을 알아본 흉노의 고참 전사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수군거렸다.
“조선의 태자께서 귀신 이목을 아직도 부리고 계셨구나.”
“그러게 말이야. 저 교활하고 무서운 놈을 아직도 데리고 계시다니. 새 선우 밑에선 부족장들이 꼼짝도 못하겠구먼.”
한부는 고인이 된 오윤 선우의 흉노 전사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역시 이목을 데리고 온 게 답이었구나. 이런 분위기면 큰 반발 없이 즉위식을 마칠 수 있겠어.’
그 후 한부는 먼저 장모를 비롯한 처가 가족을 한 명 한 명 만나 위로의 말을 건네고 두만과 함께 장인의 묘에 성묘를 갔다.
두 사람은 평생 오윤 선우를 섬긴 중년의 호위 기병 다섯 기만 데리고 부락을 나섰다.
한부는 너무 적은 호위병만 데리고 가는 걸 이상하게 여기면서 두만 왕자에게 물었다.
“처남. 흉노의 들판에는 늑대가 많이 돌아다닐 테니 호위병을 더 많이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오랜 전통에 따라 탱리고도선우의 묘는 넓은 들판에 만드는데, 도굴을 막기 위해서 그 위치를 철저히 비밀에 부칩니다. 그래서 호위병도 적어도 서른 해 이상 아버님께 충성을 바친 자만 골라서 데려가다 보니 수가 적은 겁니다.”
“그랬구나. 배신이 일상이었던 초원에서 한 주군에게 30년 동안 충성을 바치다니 대단한 충신들이군. 아, 특별히 흉노를 욕보이려던 건 아니네. 남방인들은 흉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네.”
“악의없이 하신 말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형과 대화하는 동안 벌써 아버님의 묘에 도착했네요.”
두만 왕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거목 한그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부는 두만 왕자와 함께 나무 밑에 만든 거대한 석실에 잠든 오윤 선우에게 애도를 표한 후 부락에 돌아와 즉시 즉위식을 시작했다.
그가 흉노의 전통복을 입고 부락 한복판에 있는 공터에 서자 천신을 섬기는 흉노의 제사장이 머리에 긴 뿔 두 개가 돋아난 우람한 흰 수소 한 마리를 데려와서 소리쳤다.
“한열의 아들 한부여! 선대 탱리고도선우 오윤은 남방인과 동호의 위협에서 흉노를 구한 그대를 차기 탱리고도선우로 지명했다! 그대는 천신의 뜻과 선대 탱리고도선우의 유언에 따라 흉노의 지도자이자 초원 제일의 전사가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대는 탱리고도선우가 된 후 천신을 존중하고 섬기겠느냐?!”
“그렇습니다!
“흉노의 백성과 말과 소와 양을 굶주림과 외적과 맹수로부터 지키겠느냐?!”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흉노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맹약의 잔을 들라!”
제사장은 그렇게 외친 후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소의 목을 찔렀다.
- 음머!
급소가 찔린 소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자 제사장은 소의 목에서 흐른 피를 마유주가 담긴 대접에 담아 한부에게 건넸다.
한부는 맹약의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옆에 있던 두만 왕자에게 넘겼고 왕자는 그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른 흉노의 귀족에게 넘겼다.
그렇게 흉노의 수뇌부 수십 명이 한 대접에 담긴 피의 술을 마신 후 대제사장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다시 외쳤다.
“위대한 천신이시여! 오늘 조선의 태자 한부가 흉노의 탱리고도선우가 되었나이다! 흉노와 조선, 천신을 섬기는 두 나라가 하나가 되고자 하니 저희 하늘의 자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