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75화 (175/195)

[175화] 염파를 등용하다.

화씨벽옥.

과거 진시황의 아버지인 진나라의 소양왕이 조나라 왕에게 성 열다섯 개와 바꾸자고 제안했었던 ‘완벽(完璧)’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중원 제일의 보물.

화씨벽옥은 원 역사에선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의 손에 들어가 전국옥새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지만, 이제는 고조선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

한부는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기록으로만 접했던 전설적인 보물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조선이 중원의 패자가 됐어도 조나라가 아무 대가도 없이 화씨벽옥을 줄 리 없지. 대체 뭘 요구하려는 걸까?’

한열 왕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신평군 염파에게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나라의 호의에는 감사하나 그냥 받기에는 너무 값진 물건이구려. 신평군. 조나라 왕께서는 화씨벽옥의 대가로 조선에 뭘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소?”

“대왕께서는 그저 중원의 패자인 조선과 그 동맹국인 흉노가 장래에도 우리 조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길 희망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진나라가 멸망한 후 고조선과 초원 통일을 눈앞에 둔 흉노는 각각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다.

그런데 천연두에 걸려 위독한 흉노의 오연 선우가 사망하고 한부가 그 뒤를 이어 선우의 자리에 오르면 중원의 다른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도 대적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 탄생한다.

그러다 보니 중원의 다른 나라들, 그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조선과 전쟁을 벌이고도 망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인 조나라로서는 고조선이 언젠가 과거의 진나라처럼 패도를 걸을까 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한부는 그제야 조나라 왕과 신평군 염파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왕검이자 선우가 된 다음 언젠가 조선과 흉노의 연합군을 이끌고 조나라 영토를 침략할까 봐 미리 조선 왕실에 잘 보이려는 거구나. 그럼 화씨벽옥을 안 받을 이유가 없지.’

그는 아직 조나라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폐하. 소자의 생각으로는 신평군의 말에 꾸밈이 없는 듯하니 조나라 왕의 호의를 받아들이시는 게 어떨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진나라를 정벌하고 마마를 박멸한 기념으로 새 옥새를 만들 재료를 찾는 중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흠······. 그래도 천하제일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물건을 그냥 받을 수는 없지. 신평군. 조나라 왕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소. 화씨벽옥의 답례로 조선의 특산품인 잔무늬 은거울 여러 개가 들어있는 상자와 목화솜으로 짠 외투 1백 벌을 준비할 테니 왕검성의 궁궐에서 며칠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폐하. 한단의 궁궐에 계신 대왕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저녁에 조나라 사절단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를 열겠소. 먼 길을 오시느라 피로하시겠지만, 부디 신평군도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

“따듯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 후 신평군 염파는 왕검과 몇 마디 덕담을 더 주고받은 후 내관의 안내를 받으며 사절단의 숙소로 향했다.

한열 왕검은 알현실의 문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강대했던 진나라의 침략을 수십 년 동안 막아낸 장수답구나.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에 어찌 저렇게 풍채가 당당할 수 있단 말이냐.”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신평군은 아직도 한 끼에 한 말 밥과 열 근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남다른 식성이 노년에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조나라는 당분간 국경을 접한 나라와 전쟁을 벌일 일이 없을 테니 신평군도 더는 활약할 일이 없겠지. 저런 장수를 등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부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폐하. 소자가 오늘 밤 연회 자리에서 한번 신평군을 설득해 조선 왕실을 섬기도록 해보겠습니다.”

“가능하겠느냐? 신평군은 조나라에 대한 충절이 깊기로 유명한 장수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다.”

“조나라를 저버리지 않고도 무인의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면 신평군을 왕검성에 붙들어 둘 수도 있을 듯합니다.”

* * *

조나라 왕에게 화씨벽옥을 선물 받은 날 저녁, 한열 왕검은 왕검성의 궁궐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 조나라 사절단을 초대했다.

신평군 염파는 한부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감탄했다.

“잔칫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산해진미가 그득하군요! 평소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천하에 먹어보지 못한 진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 식견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조선에선 조선 반도나 중원의 특산품 말고도 대만 왕국의 무역상을 통해 수입한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특산품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또 워낙 다양한 나라와 부족

출신의 상인과 선비가 왕검성을 찾다 보니 음식문화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지요.”

“과연······. 조선은 이미 중원조차도 좁게 느껴질 정도로 큰 나라가 됐군요. 식도락가인 저로서는 참으로 꿈만 같은 광경입니다. 전하.”

“부디 그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시작될 조선 왕실 근위병의 시범훈련도 신평군께서 흥미를 느끼실 것 같군요.”

“시험훈련이라······. 저야 뼛속까지 무인이다 보니 관심이 갑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칼을 든 병사의 고함보다는 부채를 든 무희의 춤사위를 더 줗아할 것 같군요.”

“왕실 근위병의 시범 훈련은 오직 신평군만을 위해 준비한 행사입니다.”

“저를 위해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신평군. 마침 저기 시범을 보일 근위병들이 들어오는군요.”

한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연회장의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고 그곳에는 강철 경번갑을 몸에 걸치고 각각 여섯 가지 병장기를 손에 든 병사 열두 명이 서 있었다.

신평군 염파는 낯선 무기를 들고 있는 왕실 근위병들을 보고 관심을 보이면서 말했다.

“흠······. 팽배수와 낭선병, 그리고 극병은 진나라 정벌 때 봤었지만, 다른 병사들은 생소한 무기를 들고 있군요.”

“저 창날이 세 개 달린 창은 당파라는 것으로 적군이 휘두르는 검이나 짧은 몽둥이를 막으려고 만든 무기입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날이 긴 검은 쌍수도라고 부르는 것으로 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 세게 휘둘러 일격에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지요.”

“저건 나무 막대기 끝에 짧은 창날을 달았군요. 마치 창보다는 봉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정확하게 보셨군요. 저건 곤방이라는 무리고 창보다는 봉처럼 쓰라고 만든 무기입니다. 본태자는 최근 이 여섯 가지 무기를 가진 병사들이 한 조를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적을 제압하는 진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걸 꼭 신평군께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흥미롭군요. 이 진법의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원앙진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원앙진은 원 역사에서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이 명나라 해안 마을을 수시로 약탈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 만든 진법으로 장창, 낭선, 당파, 쌍수도, 등패, 곤방을 든 병사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부는 고조선과 흉노가 한 나라가 된 후 내정을 다지고 나서 일본 열도를 식민지로 삼을 때 이 원앙진을 사용하는 병사들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염파가 새 장난감을 본 소년처럼 여섯 가지 무기를 든 병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한열 왕검은 맞은편 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근위병들에게 명령했다.

“원앙진 시범훈련을 시작하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열두 명의 병사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왕검에게 대답하면서 재빠르게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등패수를 대신하는 팽배수 두 명이 맨 앞에 서자 그 바로 뒤에는 곤방을 든 대장 한 명이 서고 그 양옆에 다시 낭선을 든 병사 두 명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대장과 낭선병 뒤에는 장창 대신 극을 든 병사 네 명이 일렬로 늘어섰으며 그 뒤에는 당파병 두 명이, 최후방은 곤방을 든 병사 한 명이 지켰다.

원앙진을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가상의 적을 상대하는 시범을 보이자 만은 고조선과 조나라의 제후와 대신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조선은 팽배수와 극병의 조합만으로도 중원의 패자가 되었는데 벌써 저렇게 훌륭한 진법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원앙진이 널리 보급되면 천하의 어떤 나라도 조선과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폐하!”

그러나 신평군 염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원앙진을 펼치는 병사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 아쉽군. 아쉬워.”

한부는 노장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들은 다음 그에게 물었다.

“신평군. 어떤 점이 아쉽다는 말씀입니까?”

“아,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하. 그저 주책스러운 늙은이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주십시오. 신평군. 조나라의 기둥이라 불리시는 명장의 눈에 원앙진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합니다.”

“음······. 정 그러시다면 솔직한 감상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앙진의 발상 자체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팽배수와 낭선, 그리고 당파가 적군의 공격을 차단해 병사들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하면서 쌍수도나 장창 같은 공격적인 무기로 공적을 세울 기대감을 심어주는 매우 효율적인 진법이라 생각됩니다.”

“한번 보신 것만으로도 본태자가 원앙진을 고안한 이유를 파악하셨군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신평군. 그럼 아쉬운 점도 말씀해 주시지요.”

“아직 병사들의 진법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낮고 여러 가지 병종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세부적인 진법 운영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부분만 개선하면 얼마나 훌륭한 진법이 완성될지 참으로 기대되긴 합니다만.”

“신평군. 그럼 본태자와 함께 원앙진의 완성해나가면서 병사들을 훈련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신평군께서 원하신다면 조선의 장수가 되어 조선의 병사들을 부리면서 남동쪽 섬의 야만인을 정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런 한부의 제안에 노장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다.

원 역사의 염파가 조나라 왕에게 버림받고 90대 중반 나이에 초나라에 망명하여 쓸쓸히 죽어가면서 남긴 유언은 ‘조나라 병사를 부리고 싶다.’

이 한마디에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천하에 더 큰 무명을 떨치고 싶었던 노장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한부는 중원이 평화로워진 지금도 염파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무인으로서의 열망을 자극하여 그를 등요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염파는 조나라의 기둥이라는 평을 듣는 무장답게 쉽게 조국을 저버리려 하지 않았다.

“제안은 감사하오나 전하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평생 조나라 왕실의 녹을 받아온 자가 말년의 노욕 때문에 조국을 배반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조나라를 배신하지 않고도 조선의 병사들 부릴 방법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과거 연나라의 명장 악의는 연나라 혜왕에게 버림받은 후 조나라에 망명한 후로 훗날 연나라 왕이 다시 그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두 나라에서 객경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신평군이 조나라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객경이 된다 해도 조나라 왕께서 이를 왕실을 배신한 행위로 여기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객경은 제후와 맞먹는 높은 지위를 받은 외국인을 뜻하는 말로 전국시대의 동아시아에는 한 나라의 제후나 대신이 조국과 우호적인 외국의 작위나 관직을 겸하는 것이 흠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염파는 한부의 제안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두 손을 모아 읍하면서 대답했다.

“왕검 폐하께서 이 늙은이를 객경으로 삼아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조선의 병사들을 부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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