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우두법 전파
한부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한열 왕검에게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족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면 백성들도 소의 고름이 몸속에 들어오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너 설마······.”
“소자가 먼저 저잣거리에 나가 여러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두 접종용 칼이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허락할 수 없다! 아직 조선 땅에서 한 번도 행한 적이 없는 주술을 어찌 태자에게 가장 먼저 시험할 수 있단 말이냐!”
“염려치 마십시오. 아버지.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았던 소자를 소한테서 짜낸 고름 따위가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거랑 이거랑 같을 리가 없잖으냐!”
지난 20여 년 동안 태자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던 한열 왕검도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한부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천연두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이라 더더욱 나까지 잘못될까 봐 걱정되시겠지. 그래도 생전에 조선 땅에서 천연두를 확실히 박멸하려면 우두법 만큼은 내가 직접 챙겨야 한다.’
그 후 한부는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집요하게 한열 왕검을 설득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한열 왕검은 한숨을 푹 쉬면서 기뻐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대신 소 고름이 묻은 칼을 네 팔에 찔러 넣을 때 반드시 용한 의원과 영험한 제사장을 한 명씩 곁에 둬야 한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정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느냐?”
“우두 접종을 받은 다음 며칠 정도는 가벼운 두창을 앓게 되겠지만, 건강에 치명적일 정도는 아닐 겁니다.”
“제발 그러길 바란다. 그럼 슬슬 나랏일을 보러 가자꾸나.”
“그러고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떴군요. 알겠습니다. 아버지.”
* * *
한부는 한열 왕검을 설득한 후 그해 초겨울에 우두 접종을 비롯한 백성의 보건을 담당할 민의원(民醫院)이라는 기관을 신설했다.
드디어 그가 십수 년 전 마우리아 제국에서 배워온 고대 국가의 의료복지 시스템을 고조선에도 적용하게 된 것이다.
기원전 244년 11월 초, 한부는 새로 뽑은 민의원 소속 의원 수십 명에게 우두 접종의 원리와 방법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한 다음 첫 번째 업무를 지시했다.
“우선 젖에 우두를 앓고 있는 소를 찾아서 그 소의 젖에 나 있는 두창의 고름을 깨끗한 단지에 담아서 모아오너라. 최대한 많은 고름을 모아와야 한다.”
그 설명을 들은 의원 중 한 명이 한부에게 물었다.
“전하. 소신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에는 소를 키우는 집이 제법 많은 편이라 어린 시절부터 여러 마리의 소를 보아왔습니다만, 젖에 두창이 난 소는 열 마리 중 한두 마리 정도인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소를 다 찾아서 두창의 고름을 모아도 온 백성이 우두접종을 받을 만큼의 양을 모으긴 어려울 거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건강한 소에게 채집한 소의 고름을 접종해서 우두에 걸리게 하면 되지 않겠나?”
“아······! 왜 그 간단한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들은 소 두창의 고름을 모으는 작업에만 집중해주게. 우두를 옮길 건강한 송아지는 다른 관리들이 조달할 걸세.”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태자의 명을 받은 의원들은 호위병들과 함께 고저선 전역의 마을과 농가를 찾아다니면서 소의 젖에 난 두창에서 고름을 모았다.
그동안 민의원 소속의 의원이 아닌 관리들은 두창을 배양할 송아지 서른 마리를 구해 왕검성으로 데려와서 한부의 지시에 따라 송아지의 옆구리 털을 깎았다.
우두에 걸린 소는 대부분 털이 없는 젖과 주변에만 두창이 생기는데, 털을 밀면 다른 부위에도 두창을 배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 준비물을 갖춘 후 민의원의 의원들이 송아지에게 우두를 접종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송아지의 젖 주변과 털을 민 옆구리에 두창이 가득 자라나자 한부는 다시 민의원의 의원들을 불러모아서 지시했다.
“자, 이 정도면 왕검성의 백성들에게 충분히 우두 접종 시범을 보일 수 있을 만큼은 고름을 짜낼 수 있을 거다. 내일 낮 저잣거리에서 본태자가 먼저 우두 접종을 받을 테니 필요한 준비를 하거라.”
“알겠습니다. 전하.”
다음날 한낮, 한부는 민의원의 관리들, 그리고 천신을 섬기는 제사장 한 명과 함께 왕검성 시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백성과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 상인 무리가 모여있는 시장에 들어서니 한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열 살인가 열한 살에도 여기서 백성들에게 납중독의 위험성을 알렸었지. 그때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화한 국제시장이 됐구나.’
그는 짧은 회상을 마치고 시장 한복판의 공터에 마련해 놓은 단상에 올라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조선의 충직한 신민들이여! 위대하신 왕검을 대신해 태자 한부가 너희에게 고한다! 너희 중 대부분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마마신의 심술에 희생되는 슬픈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본태자가 너희에게 마마신을 쫓아낼 수 있는 비책을 알려줄 터이니 잘 보고 배워서 너 자신과 아끼는 사람을 지키도록 해라!”
고조선의 백성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태자의 외침을 듣고 공터 주변에 모여들면서 수군거렸다.
“마마신은 질병을 관장하는 신 중에서 가장 악독하기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분을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몰아낼 수 있지?”
“태자께선 부처님과 천신의 가호를 받으신 분이잖아. 분명 뭔가 영험한 술법을 찾아내셨겠지.”
백성들이 흥미를 보이자 한부는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 여길 봐라! 이 우두에 걸린 송아지가 바로 마마신을 쫓아낼 비책이다!”
그가 말을 마치면서 단상 아래를 손으로 가리키자 민의원 소속 관리가 군중을 헤치고 나오면서 젖과 털을 민 옆구리에 두창이 가득한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러자 고조선의 백성들은 투덜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히익! 뭐야! 징그럽게!”
“정아! 저 송아지한테서 떨어져라! 두창 옮을라!”
우두에 걸린 송아지가 공터 한가운데에 서자 한부는 단상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다가가면서 오른팔의 소매를 걷은 다음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의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의원은 작은 칼로 송아지의 두창 중 하나를 째서 고름을 짜내 접시에 담은 다음 제사장에게 가져갔고, 제사장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제사장이 의식을 마쳤고 의원은 불에 달궈서 살균을 마친 우두 접종용 칼에 고름을 묻혀서 한부의 오른팔에 조심스럽게 칼끝을 찔러넣었다.
그 순간 공터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백성들의 비명과 고함.
“꺄아아아악! 저 의원 정신이 나갔나?! 태자께 뭐하는 짓이야!”
“저러다가 고름에 숨어있는 잡귀가 태자께 해코지하면 어쩌려고!”
한부는 오른팔의 상처를 붕대로 감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의 신민들이여! 본태자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 영험한 제사장이 고름에서 잡귀를 쫓아냈으니 말이다! 이제 이 소 두창에서 짜낸 고름은 천신의 축복 덕에 마마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적이 됐다! 이걸 깨끗한 칼에 묻혀서 몸속에 넣으면 평생 마마신이 들러붙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쉽게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왕검성에 사는 백성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지금껏 한부가 이뤄온 수많은 업적을 보면서 자라고 늙어왔기에 희망찬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태자께서 직접 쇠 고름을 몸에 넣으시면서까지 하시는 말씀이니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저절로 열리는 문에 스스로 움직이는 절구까지 만드신 분이잖아.”
“그럼 앞으로는 마마신을 달래려고 굿판을 벌일 필요 없다는 거구먼! 매년 봄마다 그때 쓸 음식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고!”
태자의 팔에 우두를 접종한 의원은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인 백성 중에서 전하의 말씀에 의문을 품는 자는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이제 며칠 뒤에도 내가 계속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면 우두 접종을 꺼리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 * *
한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두 접종하고 나서 약 닷새 동안 가벼운 발진을 앓았지만, 금방 건강을 회복했다.
그 소식은 왕실이 발행하는 신문인 조보를 통해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에서 하남까지 전해지면서 고조선 전역에 우두법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기원전 243년의 초여름이 되자 고조선의 백성들은 작년보다 천연두에 걸린 환자가 많이 줄어든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왕실과 한부를 칭송했다.
“매년 우리 애들이 마마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그럴 걱정 없이 살 수 있겠구나!”
“그러게 말이야! 이게 모두 태자께서 마마신을 쫓아낼 방법을 알아내신 덕분이야!”
우두법의 효용성은 한열 왕검이 파견한 사절에 의해 중원의 다른 나라들에도 전해졌고 고조선 왕실은 중원의 여러 나라에게 은인의 나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계절이 기원전 243년 가을에 접어들던 어느 날, 조나라의 사절 신분으로 왕검성을 찾은 신평군 염파가 왕검성의 궁궐에 찾아와서 한열 왕검과 한부를 알현했다.
염파는 알현실에 들어서서 옥좌에 앉은 왕검과 그 옆에 서있는 태자에게 정중하게 읍했다.
“조나라의 상방이자 상장군인 염파가 조선의 왕검을 뵙사옵니다.”
“어서 오십시오. 신평군. 태자에게 경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과연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풍채가 당당하시군요.”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런데 어쩐 일로 신평군께서 직접 짐의 궁궐에 찾아오셨습니까?”
“이번에 폐하께서 우리 조나라에 우두법을 전해주신 덕분에 마마를 앓는 백성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이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폐하께 조나라의 보배를 선물하라 명하셨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신평군 염파의 말을 듣자 한부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 나라의 보배라면 혹시 그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밖에 없는데?!’
염파는 그런 한부의 표정을 바라보고 빙긋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박식하신 조선의 태자께서는 이미 대왕께서 보내신 선물의 정체를 눈치채신 모양이군요. 뭣들 하느냐! 어서 왕검 폐하께 선물을 보여드려라!”
노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그 뒤에 서 있던 두 병사가 청동으로 만든 상자를 들고 앞으로 나서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영롱한 빛을 머금은 크고 둥근 옥구슬.
한부는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화씨벽옥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