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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73화 (173/195)

[173화] 예상 밖의 부고와 내정의 시작

한부는 자기도 모르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왕검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열 왕검은 어린 시절의 한부가 종종 그런 실수를 할 때마다 엄하게 꾸짖었지만, 그날만큼은 아들을 마주 안아주면서 따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돌아왔다.우리 장남.”

그 모습을 본 다른 한부의 가족들과 많은 백성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와의 인사를 마친 후 한부는 이번엔 한열 왕검 뒤에 서 있던 태자비 민과 태자손 한준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민 부인! 이게 얼마 만이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봤던 모습 그대로구려!”

“전하! 건강하신 모습을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옵니다! 모두 부처님과 천신께서 전하를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올해가 가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조선을 수호하시는 천신께 보답해야겠소. 그런데 설마 부인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청년이 우리 아들 준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겨우 몇 년 만에 정말 많이 자랐지요?”

올해 열다섯 살이 된 태자손 한준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변성기를 거치느라 굵어진 목소리로 인사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소자, 전하의 강녕하신 모습을 봬어 무척 감격스럽습니다.”

“허허! 네가 정말 우리 준이란 말이냐? 덩치도 커졌지만, 정말 몰라보게 의젓한 선비가 되었구나!”

“과찬이십니다. 전하.”

“과찬은! 내후년이면 불혹이 되는 이 아비도 왕검 폐하를 뵙자마자 감격에 겨워 말실수를 했거늘! 그러고 보면 네가 어린 시절에도 모후께서 내게 열 살도 안 된 아들보다 점잖지 못하다고 핀잔을 주실 때가 종종 있었지!”

한부가 그 말을 하는 순간, 한열 왕검과 태자비 민, 그리고 태자손 한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한부는 갑자기 가족들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부인. 그러고 보니 모후와 진서 부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구려. 설마 내가 서쪽 대륙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전하······. 모후께서는 마마(媽媽)를 앓으시다가 그만 석 달 전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뭐라고······? 어찌 아무도 그런 중대사를 아무도 내게 알리지 않았단 말이오?!”

한부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치자 한열 왕검이 며느리 대신 대답했다.

“태자야. 태자비는 잘못이 없으니 다그치지 마라. 부인은 네가 왕검성에 돌아올 때까지 부고를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대체 왜 그토록 매정한 유언을 남기셨다는 말씀입니까?!”

“부인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치르고 있는 네 마음을 어지럽힐까 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계성에 부고를 알리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었단다.”

“아······. 어찌 이런 일이······. 잠깐, 그럼 지금 보이지 않는 진서 부인도 내가 없는 동안 병사한 건가?!”

“둘째 며느리는 넉 달쯤 전에 흉노의 사절이 선우가 중병에 걸려서 위독하다는 비보를 전한 후로 짐의 허락을 받고 잠시 친정에 돌아갔다.”

“장인어른이 위독하시다니요? 아직 오십 세도 안 된 분이시지 않습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사절이 말해준 증상으로 미뤄볼 때 선우도 마마를 앓는 것 같구나.”

“그럴 수가······. 진작에 돌림병 대책을 세워뒀어야 하는 건데······.”

마마라고도 부르는 천연두는 현대에는 완벽하게 박멸된 전염병이다.

하지만 소의 고름을 이용한 예방접종법인 우두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천연두는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전염병 중 하나였다.

다른 전염병은 단기간에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나면 사그라졌지만, 천연두는 꾸준히 유행하는 특성 탓에 인류 역사를 통틀어 무려 약 10억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낸 질병이기 때문이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십여 년 전부터 고조선에 우두법을 전파하고 싶었지만, 처음 십여 년 정도는 현실의 부딪쳐서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나라에 소가 별로 없는데 어떻게 우두에 걸린 소를 찾아내는데 행정력을 낭비할 수 있었겠냐고.’

한부가 우경법을 도입하기 전의 고조선에서 소는 귀한 가축으로 여겨졌다.

소는 임신 기간이 사람과 거의 비슷한 데다 새끼를 한 번에 한 마리만 낳을 수 있어서 그저 고기를 얻으려고 키우기에도 경제적이지 못했기에 평범한 농민이 기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부유한 귀족이 수레를 끌게 하거나 제사장이 우제점을 치기 위해 길렀기 때문이다.

물론 우경법 도입 이후에는 소를 키우는 고조선의 농가가 늘었지만, 소는 번식속도가 느리고 송아지가 다 자라기 전에 병에 걸려 죽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개체 수 증가 속도가 다른 가축보다 훨씬 느렸다.

그래서 한부는 우선 코앞에 닥친 중원 정벌사업을 완수하고 그러는 동안 고조선의 소 개체 수가 충분히 늘어나면 우두법을 개발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 천연두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그는 다시는 천연두로 인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폐하. 소자가 생전에 우리 조선땅에서 마마를 몰아내 모후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태자야. 많이 상심했겠지만, 신을 노하게 할 수도 있는 말은 삼가야 한다. 마마신은 특히 성정이 불같아서 한번 사람에게 들러붙으면 극진히 제사를 지내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구나.”

“서쪽 대륙에 오래 머물면서 많은 제사장과 무당을 만났는데 그자들 중에 악독한 마마신을 쫓아내는 방법을 아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마마신은 소의 두창(痘瘡)을 끔찍히 싫어한다는군요. 깨끗하고 날카로운 칼로 그걸 째서 나온 고름을 마마신을 막는 데 쓸 수 있을겁니다.”

한열 왕검은 장남의 말을 듣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대답했다.

“네가 하는 말이니 허언이 아니겠지. 한번 해보자꾸나. 꼭 네 말대로 돼서 부인을 해친 마마신을 조선에서 몰아낼 수 있으면 좋겠구나.”

* * *

한부는 왕검성의 궁궐에 도착한 후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묘에 찾아가서 성묘를 드렸다.

그는 영면에 든 어머니가 안치되어있는 돌널무덤 앞에 절을 하면서 흐느끼며 말했다.

“어머니······. 어찌 몇 년 만에 아들이 돌아왔는데 인사를 받아주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한부는 한동안 일을 쉬면서 어머니를 추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유교 국가가 아닌 고조선의 태자에게 그래야 할 의무가 없었고 그가 처리해야 할 나랏일도 잔뜩 쌓여있었다.

그는 성묘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와 태자비 민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 아침 일찍 한열 왕검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면서 국정을 논했다.

“아버지. 서쪽 대륙에서의 전쟁이 끝났으니 허락하신다면 예전처럼 소자도 나라일을 돕겠습니다. 먼저 진나라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하와 병사들의 논공행상을 마친 다음 어제 말씀드린 마마신을 쫓아낼 방법을 시행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

“태자야. 넌 수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위업을 달성하고 막 귀향하지 않았느냐? 나랏일은 잠시 며칠 휴가를 보내면서 부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

“소자도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 말씀에 따르고 싶습니다만, 주요관직 중 공석이 될 자리가 많습니다.”

“웅 국상이 작년에 노환으로 세상을 뜬 다음 아직 후임을 찾지 못하긴 했지. 나라의 영토가 반도를 넘어선 지가 언제인데 원로 제후와 대신 중에는 서쪽 대륙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가 아직도 별로 없어서 말이다.”

“국상 자리 말씀입니다만, 하북 지역 계성의 관청에서 일하고 있는 한비 박사를 왕검성으로 불러와서 국상 자리에 앉히면 어떻겠습니까?”

“혼자서 그 많은 율령을 만들었다는 대륙인 말이냐? 재상직을 맡기기엔 좀 젊지 않으냐?”

“말씀하신 대로 아직 젊고 말을 더듬기는 하지만, 학식이 깊고 성품이 올곧아서 국상 자리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흠······. 한 박사를 왕검성으로 불러서 대화를 나눠보고 큰 흠이 보이지 않으면 국상 자리에 앉히도록 하마.”

“소자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널 제외한 무장 중에선 상장군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했지? 상장군에게도 좋은 말 열 필과 황금 1백 근을 내려 공을 치하하거라.”

“그렇지 않아도 상장군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상장군은 이제 병부를 반납하고 대신 조선 왕실을 섬기는 제후가 되어 대륙의 서쪽 접경지역에서 서융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힘쓰고 싶다고 합니다.”

“왕검성에서의 쾌적한 생활을 마다하고 대륙의 벽지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단 말인가······. 무안군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 참으로 뼛속까지 무인이야. 그럼 무명, 아니 백기 상장군의 후임으로는 누굴 앉히는 게 좋을꼬?”

“조나라 출신 장군 이목이라면 조선의 병사들을 능숙하게 부릴 수 있을 겁니다.”

“흠······. 이목 장군의 능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흉노인 중에는 이목 장군을 증오하는 자들이 많은데 괜찮겠느냐?”

“소자가 흉노인들을 잘 달래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다. 네가 왕검성에 돌아오기 며칠 전에 도착한 흉노의 사절이 말하길 선우의 병이 좀처럼 낫질 않고 있다는구나. 중병을 앓고 있는 사돈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네가 예정대로 두만 왕자 대신 선우 자리를 이어받으면 우리 조선의 영토는 순식간에 거의 두 배는 늘어나게 될 거다.”

“두만 왕자는 학문과 불교 경전 연구에 몰두하느라 아직 왕검성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참, 그리고 네가 어제 말한 마마신을 쫓을 소의 고름 말이다. 궁궐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에게 물어보니 몸에 두창이 나 있는 소를 봤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구나. 소 고름도 약에 쓰려니 없다니 참······.”

“그건 소의 두창은 사람하고는 달리 젖 주변에만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럴 겁니다.”

“아! 그랬구나! 어쩐지······. 제후나 대신 중에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소젖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자는 거의 없긴 하겠지.”

“그렇지요. 매일 소와 함께 살다시피 하는 농부가 아니고서야 자기 속에 두창이 있는지 없는지를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먼저 전국의 현감에게 자기 고을에 두창을 앓는 소의 수를 조사해서 국상부에 알리라는 명을 내리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소의 두창에서 짜낸 고름의 사용법도 알고 있느냐? 집 대문에 발라서 마마신을 쫓아내는 건가?”

“아닙니다. 아버지. 작고 깨끗한 우두 접종용 칼에 고름을 묻혀서 사람의 팔을 살짝 찌르면 마마신이 그 사람의 몸에는 들러붙지 않습니다.”

“뭐라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돼서 사람이 소처럼 변하면 어쩌려고!”

한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치는 아버지를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원 역사에선 서기 19세기에도 소처럼 변할까 봐 우두 접종을 안 받은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하니까. 그보다 2천 년 전 사람은 얼마나 무섭겠어.’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도저히 아버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하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험한 제사장이 소 두창에서 짜낸 고름에 천신의 축복을 내리면 그 안에 있는 잡귀가 사라져서 사람 몸에 들어가도 마마신만 쫓아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음······. 난 네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만, 겁많은 백성들을 설득할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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