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왕이 된 여불위, 고향에 돌아간 한부
어린 왕은 다급한 목소리로 내관에게 명령했지만, 옹나라의 추격대는 바로 조 태후 일행을 쫓지 못했다.
조 태후가 왕이 보낸 자객 무리에게 습격당해 도성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만을 품은 몇몇 제후들이 사병을 이끌고 시내에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옹나라 왕실 근위대와 옹성 수비대 병사들이 옹성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소요 사태를 진압했을 때는 이미 동이 튼 후였고 그제야 옹나라군 기병 3천 기가 조 태후를 추격하기 위해 성문을 나섰다.
추격대를 이끄는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면서 자기를 따라오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조 태후를 호위하던 자들은 대부분 걸어서 도망쳤으니 아직 위수를 건너지는 못했을 거다! 왕께서 태후를 잡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린다고 말씀하셨으니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라!”
옹나라군 기병대는 대장의 명에 우렁찬 함성으로 답하며 남쪽의 위수를 향해 말을 달렸다.
“대왕 폐하를 위하여!”
그러나 몇 시간 후 옹성에서 가장 가까운 위수의 나루터에 도착한 옹나라군 기병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 태후와 그녀의 추종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조금 전의 기세가 무색하게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여 상방과 조선의 기병대가 조 태후를 호위하고 있단 말인가?”
여불위는 옹왕 영성기가 조 태후 숙청을 시작할 날짜를 대강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부와 밀약을 맺은 후 위수 강변에 꾸준히 정찰병을 보내 동태를 살펴왔다.
그 덕분에 여불위는 조 태후 일행 위수 건너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 왕전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왕전은 개마무사 2천 기를 그곳으로 급파해 조 태후의 신변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여불위는 자기 눈앞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옹나라군 기병대장의 표정을 보고 잠시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띠다가 왕전과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더러운 역적놈들! 차림새를 보아하니 옹나라 왕실의 녹을 먹던 자들 같은데 어찌 마적 떼가 되어 태후를 시해 하려 드느냐! 왕전 장군. 부디 저 발칙한 놈들을 쫓아내 주십시오.”
“맡겨주십시오. 여 상방님. 저 잔악한 것들을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겠습니다.”
왕전이 그렇게 대답하면서 허리춤에서 강철검을 뽑자 개마무사 2천 기도 일제히 편곤을 들고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 모습을 본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을 데리고 중원 최강의 기병대와 싸워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은가! 게다가 전투의 승패를 떠나 조선을 적대하는 순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천하의 모든 나라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다른 옹나라군 기병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장에게 물었다.
“대······ 대장님.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목숨을 부지하려면 여 상방님과 왕전 장군에게 우리가 역적 무리가 아님을 설명해야 할 듯합니다······.”
“그럴 생각이니까 입 다물고 잠시 기다려봐라.”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말에서 내리고 무기를 곁에 있는 부하에게 맡긴 다음 여불위의 앞으로 걸어가서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 상방님! 억울하옵니다! 저희는 역적의 무리가 아니라 어명을 받들어 임무를 수행하던 옹나라 왕실의 신하일 뿐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느냐?!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엄연히 태후께서는 대왕의 양어머니이신데 천하의 어느 자식이 죄 없는 부모에게 자객을 보낸단 말이냐?! 네놈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왕족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모시던 왕의 명예까지 더럽히려 드는구나!”
“정말이옵니다! 여 상방님! 여기 왕께서 하사하신 병부가 있습니다! 제발 소장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급히 품속에서 병부를 꺼내 여불위와 왕전에게 보여주었다.
여불위는 그걸 보고 일부러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척하더니 비통한 목소리로 연기를 계속했다.
“최근 대왕과 태후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왕께서 이토록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 하실 줄이야······.”
그러자 왕전은 그 말을 듣고 화난 척하면서 언성을 조금 높였다.
“여 상방님. 아무리 이 문제가 옹나라 왕실의 집안싸움이라도 소장은 불가의 나라 조선의 장군으로서 자식이 부모를 해치려 하는 패륜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그리하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병대장은 들어라. 이 여불위, 절대로 조 태후께서 너희의 칼에 시해되시도록 두지 않을 터이니 그리 알고 옹성으로 돌아가거라.”
“사······ 상방님. 왕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겁니다.”
“이럴 수밖에 없어 참으로 마음 아프지만, 부모를 죽이려 드는 패륜아를 주군으로 섬길 수 없다. 지금부터 옹나라의 상방 자리를 내려놓고 내 갈 길을 갈 터이니 넌 옹왕 영성기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해라.”
여불위의 말을 듣자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영성기의 성격상 그가 조 태후를 코앞에서 놓친 데다가 대놓고 옹나라 왕실을 저버린 여불위까지 그냥 보내줬다고 보고하면 그와 그의 부하들은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옹나라군 기병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여불위에게 대답했다.
“여 상방님. 아니, 여 공. 그러하시다면 소장과 소장의 부하들도 거둬주십시오. 이대로 옹성에 돌아가면 저희는 십중팔구 죽음을 면치 못하고 운이 좋아도 고문을 당할 겁니다. 그럴 바엔 현명하고 인자하신 공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 * *
조 태후의 신병을 확보한 후 여불위는 그녀를 함양으로 데려가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다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최근 계속 이어진 비극에 마음을 다쳤던 조 태후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여불위의 위로에 금방 다시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두 사람은 그해 가을에 혼례식을 올렸다.
그후 여불위는 태후파 제후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함양 일대에 자기의 나라를 건국했는데, 새 나라의 이름은 멸망한 진나라의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후진(後秦).
일반적으론 아무리 여불위가 조 태후와 결혼했더라도 진나라 왕실의 직계혈통인 영성기가 버젓이 살아있으니 진나라를 계승하겠다는 그의 주장을 주변국이 인정할 리 없었다.
그러나 옹왕 영성기의 패륜이 온 천하에 알려지고 조선 왕실이 여불위의 건국을 인정하며 제후국으로 삼자 중원의 다른 나라들도 후진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절을 상단을 보내 외교와 무역을 시작했다.
그 결과 옹나라는 북부의 영토를 조나라와 위나라에 내주고 얻은 위수 이남의 영토를 모조리 여불위에게 빼앗기고 많은 태후파 제후가 식솔과 자기 가문을 따르는 백성을 이끌고 후진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한부는 계성 궁궐의 서재에서 그 소식이 적혀있는 서신을 읽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믿을만한 제후들을 이번에 조선이 얻은 영토에 봉하기만 하면 중원 서부 정리는 끝나겠구나. 이제 슬슬 나도 왕검성에 돌아갈 준비 해야지.”
고조선이 기원전 249년에 연나라 정벌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지났고 청년이었던 한부도 어느덧 30대 후반의 장년이 되었다.
드디어 전장을 떠나 두 아내와 장성해있을 아들 한준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릴 생각을 하니 그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제야 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함께 고생해온 신하들도 나랑 같은 생각이겠지.”
그렇게 한부가 혼잣말을 하면서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기지개를 켤 때, 서재 입구에서 그를 부르는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그처럼 평온한 표정을 지으시는 건 참으로 오랜만에 봅니다.”
한부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철가면을 쓰고 있는 상장군 무명이 서 있었다.
“상장군. 왜 아직도 그 가면을 쓰고 계신 거요? 드디어 경을 토사구팽했던 진나라 왕실에 복수했잖소? 그만 그 가면을 벗고 이제 함께 왕검성으로 돌아가서 편안한 여생을 보냅시다.”
“그렇지 않아도 제 거취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전하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당연히 경이 왕검성에 돌아갈 거로 여기고 있었소만······.”
“지금 조선의 조정에는 여러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많이 모였고 중원의 모든 나라가 조선을 패자로 인정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소장이 왕검성의 궁궐에서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고 공신 노릇을 하려 든다면 큰 논란이 일어나겠지요. 우선 제 후임으로 점찍어둔 이목 장군부터 조나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겠군요.”
“음······. 경이 걱정하는 바는 이해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태자가 애써보겠소. 누구보다 큰 전공을 세운 장수가 아무 말 없이 은거하면 수많은 재야의 선비가 조선 왕실은 공신을 대우할 줄 모른다면서 조선 왕실을 손가락질할 거요.”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소장을 서융과의 접경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도 여불위처럼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 하는 줄은 미처 몰랐구려. 지난 열한 해 동안 경이 세운 공이 크니 왕검께서도 분명 그 청을 들어주실 거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척박한 변경지역의 제후가 되고 싶어 하는 거요?”
“소장은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전장에서 보낸 날이 집에서 보낸 날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60여 년을 보내다가 막상 중원에 전쟁이 사라지니 허망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해하오. 그래서 서융과 맞닿은 땅을 영지로 하사해달라는 거구려. 그곳에서라면 장수로서 여생을 보낼 수 있고 가면을 벗고 본명을 사용해도 별 문제 없을 테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서융의 여러 부족은 이번 전쟁에서 많은 장정을 잃었지만, 그 야만인들의 영토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아마 십 년 정도만 지나면 세력을 회복하고 중원을 넘보며 복수하려 들겠지요.”
“상장군이 서융의 침공을 막아낼 방파제가 되겠단 말이군요. 알겠소. 상장군. 왕검께 경을 제후로 임명해달라고 건의하겠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럼 우선 함께 왕검성으로 돌아갑시다. 조선의 제후가 되려면 왕검께서 진행하시는 책봉식에 참여해야 하니 말이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기원전 244년의 가을이 끝나갈 무렵 한부는 드디어 진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들과 함께 서해를 건너 왕검성으로 돌아갔다.
한부가 덩치 큰 명마를 타고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 수만 명이 우레같은 환호성으로 태자 일행을 환영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왕검 폐하 만세! 태자 전하 만세!”
그리고 한부는 중원에서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더욱 눈부시게 발전한 왕검성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제 거리마다 배수로를 파놨지?! 이젠 평민들도 하수 때문에 걱정 할 일 없겠네! 고층 건물은 또 왜 이리 많이 늘었어? 거기에 대나무랑 로만 콘크리트로 수도교를 만들고 있을 줄이야! 나도 그 생각은 아직 못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왕검성에 들른 지 불과 4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고향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좌우로 돌려대는데 정면에서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야. 여전히 건강한 모습을 보니 너무나 기쁘구나.”
“폐하······!”
한부는 즉시 말에서 내리면서 자기를 마중 나온 왕검을 바라보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제 검은 머리나 수염이 한 올도 남지 않고 체격마저 작아진 노쇠한 아버지의 모습.
한부는 그런 아버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면서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