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왕전을 영입하다.
여불위가 왕이 될 꿈에 부풀어 이사와 대화하고 있을 때 함양에서는 왕전과 멸망한 진나라 백성이 성문을 열고 합종군에게 항복했다.
왕전은 합종군 수뇌부에게 함양에 사는 백성들을 해치거나 노비로 삼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함양의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합종군에게 항복했다.
그는 합종군에게 더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며 함양의 모든 백성이 항복을 받아들일 때까지 스스로 함양의 백성들이 따르는 다른 몇몇 명사들과 함께 볼모가 되겠다고 제안했는데 한부를 비롯한 합종군 수뇌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부는 병사들에게 함양의 병영과 무기고를 점거하고 시내를 순찰하며 치안 유지에 힘쓰되 백성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고 지시하는 한편 고조선군 숙영지에 쾌적한 숙소를 짓고 왕전을 그곳에 머물게 하면서 볼모이자 손님으로 대접하는 중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여불위는 함양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믿을만한 심복을 통해 자기의 계획을 한부에게 알렸다.
한부는 자기 막사에서 여불위의 심복이 가져온 서신을 읽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진나라와 옹나라 쪽의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정리되겠구나. 이런 일은 여불위가 그 늙은 여우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보험을 들어놔서 나쁠 건 없겠지.”
그는 손에 든 여불위의 친필이 적혀있는 흰 비단 조각을 잘 접어서 품에 넣은 후 호위병 몇 명과 함께 왕전이 묵고 있는 막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고조선의 태자가 자기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왕전은 탁자 앞에 앉아서 죽간으로 만든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오늘도 독서 중이셨구려. 이곳에서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소?”
“전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함양의 치안이 안정되고 모든 백성이 새 주인을 받아들이면 공과 다른 함양의 유지들을 석방할 테니 조금만 더 견뎌주시오. 그건 그렇고, 본태자의 제안에 대해선 생각해 보셨소?”
“비록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막고자 제 손으로 폐주 영정을 옥좌에서 끌어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진나라 왕실의 녹을 먹었던 자가 나라가 망하자마자 조선의 신하가 된다면 저잣거리의 잡배조차도 절 비웃을 겁니다. 허락하신다면 조선의 동맹국이자 진나라 왕실의 후예인 옹나라의 녹을 먹으며 함양의 백성을 돌보고 싶습니다.”
한부는 왕전이 고조선군 숙영지에 지내기 시작한 날부터 그를 장군으로 영입하고자 집요한 설득을 이어왔다.
젊은 명장 왕전을 영입하면 앞으로 약 반세기 정도는 고조선의 부흥을 질투하는 외세의 위협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거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왕전은 선비나 장수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 왕실의 녹을 먹는 일을 흠으로 여기지 않는 전국시대의 정서에 익숙한 인물이고 진나라 왕실은 이미 망해버린 상황이니 동아시아 최강국의 태자인 한부의 제안에 끌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전국시대 4대 명장 중 가장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답게 세간의 평가를 의식해 선뜻 진나라의 숙적이었던 고조선의 장군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부는 왕전이 천천히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왕 장군. 어쩌면 이 서신을 읽어보면 마음이 좀 바뀔지도 모르겠구려.”
“이건······. 여불위 그 탐욕스러운 자가 옹나라 왕실마저도 배반할 생각이란 말입니까! 게다가 조선은 그 일을 묵인할 생각이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노련한 정치인이고 충분한 보상을 주면 다루기 어렵지 않은 여불위와 아직 수염도 안 난 어린애인데다 독선적이고 숙적 진나라 왕실의 핏줄인 옹왕 영성기. 만약 왕 장군이 내 입장이라면 둘 중 누구에게 산서 지역 제후들의 관리를 맡기고 싶겠소?”
“하아······.”
왕전은 한부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우선 진나라 왕실의 후예인 옹나라 왕을 섬기면서 함양 일대를 지키는 장군이 되어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왔던 함양의 백성들을 돌보는 한편 진나라 왕실을 배신한 역적이라는 오명을 씻어나갈 생각이었지만 서신의 내용을 읽고 미래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전은 여불위가 작성한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옹왕 영성기와 새로운 나라를 세울 여불위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옹왕 영성기의 패륜이 도를 넘었군요. 아무리 조 태후가 미워도 그렇지 어찌 양어머니를 살해할 음모를 꾸밀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여불위도 폐주 영정을 등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자기를 토사구팽 할 생각이 없는 옹나라 왕을 배신할 생각만 하고······.”
“그뿐이겠소? 만약 여불위가 함양 일대에 자기 나라를 세우고 하루아침에 유능한 재상을 잃은 데다 내전이 일어난 옹나라를 공격해 차지했을 때 왕 장군이 어느 나라의 녹을 먹지 않은 채로 여전히 함양에 남아있다면 무사할 수 있겠소?”
“그럴 경우라면 제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여불위는 인재를 모으는 걸 좋아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은원관계를 분명히 하는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자가 지휘하는 군대를 물리쳐 망신을 주고 목숨까지 거둘 뻔했으니······.”
“그러니 조선의 장군이 되어 여불위와 함께 곧 패륜을 저지를 영성기를 벌하고 함양의 백성을 평안케 하시오. 그게 공을 위하는 길이고 백성을 위하는 길이오.”
“하······ 조 태후가 난을 피해 함양까지 도망쳐와서 도움을 청하면 여불위는 새 나라를 세울 명분을 챙기면 주변국도 그를 비난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토록 중요한 기밀을 안 이상 전하의 제안을 거절하면 여불위가 제게 자객을 보내기 전에 전하께서 보내신 자들이 저를 해치실 테고 말입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소? 그저 여 상방이 거사를 마칠 때까지 잠시 그대를 옛 연나라의 왕족들처럼 조선 반도로 보내는 선에서 끝낼 거요.”
“제 장래의 선택지를 모두 없애버리셨군요······.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만큼 소장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오늘부터 조선 왕실에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 왕 장군!”
* * *
한부는 왕전을 영입하고 나서 며칠 후 여불위가 함양에 도착하자 그를 자기 막사로 불러 위왕 위무기와 다른 나라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 상방님. 이렇게 금방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변함없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대왕께서 하루라도 빨리 불타버린 궁궐을 재건하라 명하셔서 다시 함양에 오게 됐습니다.”
“옹나라 왕께서 마음이 급하신 모양이군요. 귀국하신 지 겨우 닷새 밖에 안 지났는데 다시 먼 길을 오시느라 많이 피로하시겠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하오나 명색이 재상이라는 자가 나라와 왕실을 위한 일에 몸을 사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위왕 위무기가 여불위에게 대답했다.
“이토록 근면하고 유능한 재상이 두셨으니 옹나라의 장래가 밝습니다.”
한부는 여불위의 속내를 모르는 위나라 왕이 예의상의 칭찬을 하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네. 영씨가 아니라 여씨의 나라와 왕실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거겠지만.’
그렇게 형식적인 덕담을 주고받은 다음 한부가 다시 여불위에게 말했다.
“참, 여 상방님께 조선의 신임 장군을 소개해 드려야겠군요.”
“전하께서 함양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찾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직접 만나보신 적은 없겠지만, 여 상방님께서도 잘 아시는 장수지요. 폐주 영정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전 장군입니다.”
“그 왕전이 조선에 귀화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여 상방님. 석 기병대장. 지금쯤이면 왕 장군이 새 갑주를 다 입었을 테니 어서 데리고 오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석은 한부에게 읍한 후 병사 몇 명과 함께 막사 밖으로 나기더니 곧 철판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강철 경번갑을 입은 왕전을 데리고 돌아왔다.
왕전은 합종군의 여러 장군 곁을 지나 한부의 앞으로 걸어온 다음 두 손을 모아 읍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왕전 장군. 이 분은 옹나라의 여불위 상방님이시오. 어서 인사드리시구려.”
“알겠습니다. 전하.”
왕전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여불위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했다.
“얼마 전 조선의 장군으로 임명된 왕전입니다. 존함은 익히 들어왔으나 이렇게 고명하신 옹나라의 재상을 직접 뵙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 말에 노련한 정치인인 여불위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굵은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다.
‘처음 보긴 뭘 처음 봐! 난 위수에서 뗏목을 타고 도망치면서 네놈이 말을 타고 전장을 달리면서 내 병사들을 몰아붙이는 진나라군을 지휘하는 네놈을 봤단 말이다!’
그러나 그는 왕전이 중원의 패자가 된 조선의 장군이 된 이상, 여불위가 소국일지언정 자기 나라를 세우고 싶다면 그를 적대해서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금세 환하게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이 그 성난 범같은 왕전 장군이셨군요! 젊은 분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설마 아들뻘인 분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여불위의 대응은 제법 무난하고 자연스러웠지만, 한부는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합종군은 각자 조국으로 귀국할 것이지만, 왕전 장군은 조선군 3만 명과 함께 이곳에 남아서 한동안 여 상방님을 도와 함양 일대의 치안유지 업무를 맡을 겁니다. 부디 전 장군과 조선의 병사들이 궁궐 재건과 함양 일대의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한부는 여불위가 자기 나라를 세워 옹나라에서 독립할 때 분노한 옹왕 영성기가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은 여불위의 나라를 공격하는 사태를 막을 치안유지군을 남기기로 했는데 그 병사들을 왕전에게 맡겼다.
왕전과 여불위는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없지만, 두 사람은 한부와 조선 왕실에게 인정받고 새 출발을 하려면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불위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부의 얼굴을 바라보고 간신히 화를 참았다.
‘참아야 하느니라. 중원 최고의 장사꾼이라고 자부하는 내가 손이 큰 손님이 짓궂은 장난을 친다고 역정을 내서야 하겠는가? 이 굴욕을 참아내면 나도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게 될 터인데 참아야 하고말고.’
여불위는 속내를 숨기고 한부에게 읍하면서 감사의 말을 건넸다.
“폭군 영정을 몰아내 주신 것만으로도 조선과 다른 여러 나라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데 일부러 많은 병사를 남겨서 옹나라의 부흥을 도와주시다니요······. 옹성의 궁궐에 계신 대왕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 * *
함양에서 한부와 여불위의 회담이 끝난 후 합종군은 왕전이 지휘하는 고조선군 3개 군단만을 남기고 함양을 떠났고 여불위는 즉시 함양의 궁궐 재건 공사에 착수해 그 소식이 옹성에 있는 옹나라 왕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옹왕 영성기는 여불위가 예상한 대로 쾌재를 부르며 믿을만한 대신과 제후 몇 명을 불러 궁궐의 밀실로 불러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여 상방이라도 궁궐 재건공사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에는 전처럼 옹성에서 벌어진 일을 바로 눈치채지 못할 것이오! 이 기회에 왕족인 체하는 비천한 무희를 반드시 숙청해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