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중원을 분열시켜라. (2)
“역시 관직과는 연이 없었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자력으로 대국 진나라의 상방 자리에 오르셨던 분답군요. 맞습니다. 여 상방님. 부디 조선 왕실의 신하가 되어 함께 권세와 부를 누려봅시다.”
그 대답에 여불위는 애써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한부는 노회한 재상의 동공이 한순간 커졌었던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권력욕의 화신이 이제 조나라나 위나라만도 못한 옹나라의 재상직에 만족할 리가 없지.’
하지만 여불위는 바로 한부가 던진 미끼를 바로 무는 대신 정중한 목소리로 그에게 따졌다.
“전하께서는 이 여불위를 그저 순간의 이익을 좇아 신의를 저버리는 소인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군요. 그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 상방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천하의 여불위가 옹나라의 상방직 정도에 만족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비록 과거의 진나라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는 하나 옹나라 왕실은 제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영토와 백성을 다스리는 큰 나라입니다. 이제 중원이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섰으니 앞으로 옹나라도 얼마든지 더 부강한 나라가 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옹나라의 왕께서 명군이시고 제후와 대소신료가 뜻을 모아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진나라가 망했으니 옹나라 조정은 왕을 따르는 함양 출신 대신과 조 태후를 따르는 옹 땅의 토착 제후세력이 권력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일 일만 남지 않았습니까?”
“큭······.”
여불위는 고조선 태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짧은 신음만을 내뱉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참으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확실히 이젠 친왕파와 조 태후파의 권력투쟁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성기 그 옹졸한 놈이 분명 조정에 분란을 일을 테니까······.’
옹왕 영성기는 평소 천한 무희 출신인 데다 정적인 진왕 영정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혐오해왔지만, 남쪽의 진나라와 북쪽의 흉노라는 강한 적 사이에 끼어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를 양어머니로 대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진나라가 멸망하고 옹나라가 합종책에 참여한 흉노와 화친을 맺어 당분간 강력한 외적이 침입해올 걱정이 없어졌으니 옹왕 영성기가 조 태후와 그녀의 추종자들을 숙청하려 들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노련한 여불위도 자기가 추대한 왕과 자신의 첩이자 불륜 상대였던 태후가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바로 판단하기 어려운 암울한 상황.
한부는 그런 옹나라의 상황을 잘 이용하면 내정 능력만큼은 출중한 여불위를 고조선의 제후로 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불위가 눈에 띄게 동요하자 한부는 마치 그의 야심을 자극할 만한 말로 다시 그를 유혹했다.
“지금까지 옹나라 조정에 큰 내분이 없었던 건 모두 여 상방님이 친왕파와 조 태후파 제후와 대신들 사이를 잘 중재한 덕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 상방님께서 유능한 식객 전원을 데리고 함양 일대에 자기 나라를 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옹성의 조정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친왕파와 조 태후파 사이에는 큰 분란이 일어나겠지요.”
“아마 분란 정도가 아니라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겁니다. 그럼 두 세력 중 권력투쟁에서 밀리는 쪽은 누굴 의지하려 들겠습니까? 중원의 패자인 조선 왕실은 1만 리 밖에 있고 국경을 접하게 될 위나라와 조나라는 숙적이었던 진나라 왕실의 잔존세력인 두 사람에게 악감정이 남은 상황에 말입니다.”
“음······. 왕이든 조 태후든 야만스러운 흉노에 망명할 리는 없을 테니 분명 절 의지하려 들겠지요.”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여 상방님께서 함양 일대에다 옹성 일대를 차지해 영토와 백성을 늘린다면 공께서 칭왕 하시더라도 분에 넘치는 일이라고 여기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흠! 여씨 왕조라······!”
“생각해 보십시오. 여 상방님. 재상이나 공국이나 군주가 아닌 머리에 왕관을 쓴 왕이 되시는 겁니다! 약재상의 아들이셨던 공이 말입니다!”
원 역사의 여불위는 진왕 영정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후 하남의 영지에 칩거하던 도중 독주를 먹고 자결하면서 심복 이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내 시신을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수직으로 세운 다음 몸의 반만 묻어주게. 죽어서라도 땅을 왕관 삼아 왕이 되고 싶으니 말일세.]
한부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기의 진짜 야심을 자극하자 여불위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전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옹나라 왕이 제게 함양 재건사업을 맡긴다면 기회를 봐서 전하의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 상방님! 조만간 함양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결코 왕검성에 계신 왕검 폐하와 전하를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 * *
여불위는 한부와 밀약을 맺은 후 옹나라군 장수와 병사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옹성에 도착하자마자 옹왕 영성기가 기다리고 있는 옹성의 궁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불위가 궁궐의 대문 앞에 도착하자 내관 한 명이 왕실 근위대 병사 몇 명과 함께 마중을 나와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 상방님! 참으로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오랜만일세. 진 내관. 자네는 원래 웃는 상이지만, 오늘따라 더 표정이 밝아 보이는군.”
“상방께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셨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도 드디어 폭군 영정이 자기에게 걸맞은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왕께 진나라 원정 결과를 보고드리러 온 길이네. 대왕께서는 궐 안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진나라 원정군이 성문을 지났다는 소식을 들으시자마자 알현실의 옥좌에서 여 상방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에 들르기 전에 입궐하길 잘했군. 그럼 어서 날 알현실로 안내해주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 상방님.”
내관은 다시 한번 여불위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 그를 옹성의 관청을 개조한 궁궐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여불위가 내관의 안내에 따라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색 어의를 입고 옥좌에 앉아있는 옹왕 영성기가 그에게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여 상방! 먼 길을 오느라 참으로 노고가 많았소!”
“상방 여불위가 대왕 폐하를 뵙습니다.”
“경이 앞서 보낸 전령에게 기쁜 소식 잘 들었소! 영정 그 가증스러운 놈이 궁궐에 불을 질러 자결하다니! 폭군에게 걸맞은 최후이지만 수백 년 동안 진나라 왕실의 거처였던 곳이 잿더미가 된 건 마음 아프구려.”
“소신도 불타는 진나라 궁궐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 뭉클했습니다. 폐하. 소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폐주 영정의 만행을 저지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오. 여 상방. 경이 조선의 태자를 설득하지 못했으면 우리나라도 합종군에게 공격받아 영정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오. 게다가 폐주 영정이 다스리던 영토는 합종군의 다른 나라들이 나눠 가질 터이니 어차피 그림의 떡 아니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소신이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 조나라와 위나라 왕에게 옹나라 북부의 영토를 내주는 대신 함양과 그 주변의 영토를 받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럼 짐이 다시 함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참으로 큰 공을 세웠소! 여 상방! 하늘이 짐과 여 상방을 도우신 게 분명하오! 이제 다시 진나라라는 국호를 쓸 날이 얼마 안 남았구려!”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소신도 참으로 기쁘옵니다. 폐하. 다만 폐하께서 함양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먼저 전소한 궁궐을 재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겠지요! 여 상방. 이제 막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피로하겠지만, 한 번 더 짐과 나라를 위해 애써주셔야겠소. 닷새만 푹 쉬었다가 다시 함양으로 내려가 불타버린 궁궐을 재건해 주시구려.”
여불위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어린 왕을 만류했다.
“폐하. 우리 옹나라는 이미 진나라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적지 않은 백성이 다치고 나라의 재물이 넉넉지 않습니다. 함양의 궁궐 재건은 전쟁에 지친 백성의 마음을 어루어만지신 다음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왕실의 권위가 달린 중대사를 뒤로 미룰 수는 없소. 부족한 일손은 폐주 영정을 따르다 항복한 장정 20만 명을 동원하면 될 일이고 궁궐 재건비용은 우선 우리나라 몫으로 받게 될 전리품에서 충당하면 될 것이오. 그러니 다른 말 말고 궁궐 재건사업을 맡아주시구려.”
여불위는 옹왕 영성기의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 앞으로 옹성에서 일어날 일을 계산했다.
‘영성기는 그저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리하게 궁궐 재건을 서두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아마 나를 함양에 보내놓은 다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 태후를 숙청하려는 거겠지. 조 태후가 벌써 죽으면 곤란하니 옹성을 떠나기 전에 손을 써둬야겠구먼.’
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다음 영성기에게 읍하면서 대답했다.
“폐하의 뜻이 이미 굳으니 더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어명을 받으러 닷새 후에 함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폐하.”
그 후 여불위는 알현을 마치고 궁궐에서 나와 자기 저택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곁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했다.
“당장 이사를 응접실로 불러오너라.”
“이 장사는 이미 한 시진 전에 저택에 찾아와 응접실에서 상방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역시 보통 눈치가 빠른 친구가 아니라니까. 바로 그리로 갈 테니 주안상이나 좀 내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상방님.”
여불위는 하인과의 대화를 마친 후 즉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사를 찾아갔다.
그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손님용 의자에 앉아있던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공손하게 읍했다.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여 상방님.”
“내 꾀주머니 이사! 어떻게 내가 자네를 찾을 줄 알았는가?”
“옹나라를 노리던 호랑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양처럼 순해졌으니 이제 집안싸움이 벌어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여 상방께서 저와 그 일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실 듯하여 원정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상방님 댁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내 마음을 잘 읽었군. 옹나라가 북부의 영토를 함양을 포함한 위수 이남의 땅과 교환하기로 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여 상방님. 함양 일대는 우리나라 북부보다 비옥한 농지가 많은 데다 영토 교환 이후에는 변덕스럽고 포악한 흉노와 국경을 맞대지 않아도 되니 옹나라에 유리한 거래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왕을 알현하고 왔는데 나보고 닷새 후에 불타버린 궁궐을 재건하러 다시 함양에 가라고 하더군.”
“궁궐 재건은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왕께서 상방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조 태후를 숙청하시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러니까 내가 없는 동안 자네가 내 사병들을 지휘해서 도성에서 난리가 일어나면 조 태후를 옹성에서 탈출시켜주게.”
“그러셨다가는 왕의 역린을 건드리시게 될 겁니다.”
“걱정할 것 없네. 영성기가 내게 역정을 낼 때면 나도 왕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일세.”
이사는 여불위의 말을 듣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