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왕전의 결단
몽무의 외침을 들은 백성들은 바로 도망치는 대신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웅성거렸다.
“여기서 나가도 된다고? 저 사람들도 관군 같은데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지?”
“ 수비대에 징집된 우리 장남이 무사한 건가?”
“무관 나리! 정말 저희가 함양 밖으로 도망치면 수비대에 징집된 가족들도 함께 갈 수 있는지요?”
“설마 환갑이 넘으신 우리 아버지는 물바다가 될 함양에 남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백성들의 말을 듣고 몽무는 속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전은 그에게 왕실 근위대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백성을 구출하라고만 지시했을 뿐 그 후의일까지 지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병영에서의 임무를 완수한 후 왕전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군수창고에 가면 왕전 장군께서 너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실 거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더 많은 왕실 근위대 병사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기 전에 얼른 도망치거라!”
그 말에 놀란 진나라의 백성들은 자식이나 늙은 부모의 손을 잡고 병영을 빠져나와 함양 외곽에 있는 군수 창고를 향해 앞다투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몽무와 그의 부하들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제압한 왕실 근위대의 병사 수천 명을 포박한 다음 병영 연병장 한가운데에 모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몽무가 풀어준 백성들이 시내의 군수 창고에 도착해 왕전을 빙 둘러싸면서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왕 장군님! 곧 함양이 물바다가 되어도 성벽 위를 지키고 있을 제 아들이 무사할는지요?”
“장군님! 아버지께서 계속 적군과 사투를 벌이셔야 한다면 저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양에 남게 해주십시오!”
왕전은 간곡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부탁하는 소년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더는 합종군과 싸울 생각은 없지만, 수공이 시작되기 전에 왕실 근위대의 방해를 물리치고 민간인을 성 밖으로 대피시키려면 내 휘하의 병사들은 당분간 이 도시에 남아있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네 아비가 걱정하지 않도록 너라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거라.”
“싫습니다! 장군님! 민간인은 부모를 버리고 도시 밖으로 도망쳐야만 한다면 저도 창을 들고 병사가 되겠습니다!”
겨우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당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다른 백성들도 간곡한 목소리로 왕전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왕 장군님! 소인도 저 소년과 같은 생각입니다! 부모 된 자로서 남은 가족만 살겠다고 열 살 먹은 어린 자식을 이곳에 내버려 두고 도망칠 순 없습니다!”
“저희에게도 무기를 주십시오! 잔혹한 왕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무고한 백성을 수장시키려 든다면 저희가 먼저 무기를 들고 궁궐로 쳐들어가겠습니다!”
왕전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 정말로 궁궐을 점거하면 결국 날 등용해주신 창평군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아니지. 이미 몽 형이 병영을 급습한 시점에서 우린 반역자가 된 거다. 지금 마음을 굳게 먹고 밀어붙이지 않으면 수십만 백성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하고 역사에 배신자의 오명만 남길 뿐이겠지.’
그는 결국 진왕 영정을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합종군과 평화협정을 맺기로 마음먹고는 아우성을 부리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진나라의 백성들이여! 그대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무기를 들고 이 왕전의 뒤를 따라오너라! 가혹한 법을 충실히 따라온 백성을 방패막이로 여기는 어린 왕을 쫓아내고 부모와 자식의 목숨을 구하는 거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폭군 영정을 몰아내자!”
그 자리에 있는 수천 명의 백성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면서 호응하자 왕전은 곁에 있는 부장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반 시진 안에 성벽과 망루 위를 지키고 있는 수비대 병사를 이곳에 집결시켜라! 동포의 피를 덜 보고 폭군을 몰아내려면 해가 뜨기 전에 궁궐을 점거해야 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그렇게 한부가 계획한 수공은 그도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함양에서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왕전은 여불위의 옹나라군과 한나라군을 물리칠 때 보여준 출중한 지휘력으로 휘하의 부장과 장수에게 밀명을 내렸고 함양을 지키던 10만 명의 진나라군 중 약 7만 명이 이제 진왕 영정이 숨어있는 궁궐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왕실 근위대가 움직이기 전에 신속하게 궁궐을 포위하라!”
“동이 트기 전에 거사를 마쳐야 도시가 침수되기 전에 합종군과 협정을 맺을 수 있다!”
손에 횃불을 든 왕전의 병사들이 궁궐로 이어진 대로를 달려가기 시작하자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난 백성 수천 명도 무기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처음에는 사정을 모르고 잠에서 깨 겁에 질린 눈으로 궁궐로 몰려가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진나라 백성들도 왕전이 영정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손에 농기구나 몽둥이 따위를 들고 속속 거리로 달려나왔다.
“가만히 있다가 물귀신이 되느니 싸워보고라도 죽어야지!”
“어린 폭군은 썩 물러나라!”
곧 그 소식은 진왕 영전과 창평군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그때는 이미 왕전의 혁명군이 함양의 궁궐을 겹겹이 포위한 후였다.
포위망을 완성한 후 몽무는 왕전의 명에 따라 굳게 닫힌 궁궐 대문 앞으로 다가가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영정은 들으라! 그대는 백성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군주의 책무를 져버리고 이미 기울어버린 왕실의 명예만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 함양 시민을 겁박하여 승산 없는 전장으로 몰아서 죽이려 하였다! 이제 진나라의 백성들은 그대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짐을 꾸려서 함양을 떠나거라! 그대가 이 제안을 따른다면 무고한 백성은 피를 흘리지 않고 그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진왕 영전은 궁궐 누각의 3층에서 횃불을 들고 궁궐을 둘러싼 왕전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등 뒤의 내관에게 물었다.
“창평군······. 창평군에게선 소식이 없느냐······?”
“폐하······. 아무래도 폭도들이 궁궐을 포위하는 바람에 창평군이 입궐할 수 없었던 듯하옵니다.”
“글쎄. 어쩌면 창평군조차 저 폭도 무리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지. 참으로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한 명도 없구나.”
“창평군이 그럴 리가······.”
“여기 없는 사람 얘기는 그만하면 됐다. 폭도 무리의 수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이런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어 송구하오나 왕실 근위대장의 말에 의하면 10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했사옵니다.”
“10만 명이라······. 그럼 함양 수비대 병사들이 대부분 역적 왕전에게 붙어버렸다는 뜻이렷다······. 진나라 왕실의 명운도 여기까지인 모양이구나.”
“폐하. 불행 중 다행으로 역적 왕전은 폐하를 해치는 대신 함양 밖으로 추방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거 월왕 구천이 그러했든 우선은 옥체를 보존하시고 훗날을 도모하시옵소서.”
“내관은 역적의 약속을 믿는가? 왕전은 십중팔구 아직 함양 시내에 남아있는 짐의 측근을 설득할 생각으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걸 거다. 그 농간에 놀아나 치욕스럽게 죽을 바에는 스스로 제왕다운 죽음을 맞이하겠다.”
“폐하······.”
“내관. 가서 횃불을 가져오너라. 역적에게 이 궁궐을 넘겨주느니 짐의 손으로 태워버리겠다.”
“꼭 그리하셔야 하겠습니까······.”
“너까지 어명을 거역하려 드느냐? 마지막 순간까지 짐을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잠시 후 내관은 불붙은 횃불을 가져와 왕에게 건네주자 진왕 영전이 그것을 받으면서 대답했다.
“그동안 짐의 수발을 드느라 수고 많았다. 너까지 짐과 함께 죽을 필요는 없으니 썩 물러가거라.”
내관은 그 말을 듣고 어린 왕에게 한번 절을 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영정은 그가 누각 밖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방 이곳저곳에 불을 질렀다.
그는 시뻘건 불길이 순식간에 3층 목조 건물에 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중원 통일의 숙원을 이루기는커녕 수백 년을 이어온 진나라의 종묘사직이 내 대에서 끝나는구나! 저승에 가면 무슨 낯으로 조상을 뵙는단 말인가!”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붉은 화염이 그가 서 있는 누각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왕전은 먼발치에서 함양의 궁궐이 불타는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왕께서는 참으로 독하신 분이구나······. 결코 이런 결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거늘······.”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몽무가 왕전의 등을 살짝 두드리면서 주변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 한 명이 타죽어서 수십만 백성의 목숨을 구했다. 왕 동생. 후회할 틈이 있으면 살아남은 백성들이 합종군에게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조선의 태자를 잘 설득할 궁리를 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후······ 몽 형의 말대로입니다. 세 치 혀를 잘 놀려서 진나라가 없어져도 함양의 백성들은 계속 이 땅에 살 수 있도록 해봐야지요.”
* * *
“전하! 함양에서 불길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한부는 자기 막사의 침실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방안으로 달려 들어온 기병대장 석의 말을 듣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뭐라고! 설마 합종군의 장수 중에 몰래 화공을 펼친 자가 있다는 거냐!”
“소장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함양 시내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면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구나! 그래도 도시가 전부 불타버려서 무고한 백성이 너무 많이 죽으면 안 될 터인데. 꾸준히 기병대를 성벽 근처에 보내서 계속 적진의 동태를 살피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석은 한부에게 읍한 후 막사 밖으로 나가서 단잠을 자고 있던 기병 수백 기를 깨워 함양의 성벽 주변을 맴돌면서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고조선군의 궁기병대는 즉시 말을 몰고 숙영지 밖으로 나와 밤새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동이 틀 때쯤 돌아와서 한부에게 보고했다.
“기사 정이 태자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현재 함양성 안에서 올라오던 연기는 사라졌으며 성 밖으로 나온 진나라군의 사절이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하기에 데려왔습니다.”
“그래? 어서 안으로 들여보내라!”
태자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기병은 두 손을 모아 읍한 후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젊은 진나라군 장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한부는 겨우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장수가 장군의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왕전임을 바로 알아챘다.
“그대가 그 유명한 진나라의 젊은 명장 왕전이구려!”
“대단치 않은 무관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말씀하신 대로 소인은 진나라의 장군이었던 왕전입니다.”
“진나라의 장군이었다니? 진나라 왕이 지금 같은 때에 그대를 해임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폐주 영정은 소인을 따르는 병사들과 성난 함양의 백성들이 궁궐을 포위하자 스스로 누각에 불을질러 목숨을 끊었습니다.”
“허······. 아직 수염도 안 난 어린 왕이 그렇게까지······. 그럼 그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뭐요? 그대가 진나라 왕을 몰라냈으니 일국의 왕으로 인정해 주기를 원하오?”
“당치 않습니다. 전하. 소인은 그저 앞으로 이 땅을 누가 다스리더라고 진나라의 백성들이 노비가 되어 외국에 끌려가지 않고 계속 고향에서 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리해주시면 소인을 따르는 병사와 백성들도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함양성의 문을 열 것입니다.”
“흠······. 그대의 뜻은 잘 알겠소. 그 문제는 다른 나라의 장군들과 논의한 다음 대답해 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