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함양성을 포위하다.
고조선과 위, 조, 제, 옹, 흉노, 어우락의 장수와 병사가 진왕 영정과 적장 왕전이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는 함양성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수가 너무 적어서 직접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현산에서 진나라군의 매복에 당하고 살아남아 수송부대에 합류한 한나라 출신 병사들까지 합치면 전부 여덟 나라의 병사로 구성된 합종군의 진격.
한부는 덩치 큰 갈색 한혈마를 탄 채로 홀로 대열의 선두에서 행군하던 중 드넓은 평야를 가득 메우며 자기 뒤를 따라오는 대군을 바라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까지 오느라 열 살 때부터 온갖 고생을 다 해왔었지. 이제 진나라를 박살 내서 중원을 전부 집어삼키려고 드는 나라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온 천하에 보여주면 드디어 고조선이 중국에 망하는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거다.’
진나라의 침략에 시달려 왔거나 나라를 잃었던 합종군 여러 나라의 장수들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쌓여온 선조의 원한을 갚을 생각에 전의를 불태우며 행군 중인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한부가 이끄는 60만 대군이 시시각각 진나라의 숨통을 죄어오자 함양은 전화(戰火)가 미치지 않을 지역으로 피난 가려는 백성들이 등짐을 지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여보! 합종군이 벌써 함양에서 1백 리 밖까지 쳐들어왔대요!”
“부인! 애들 잘 챙기시오! 피난민이 더 몰려서 북새통이 되기 전에 얼른 성 밖으로 빠져나갑시다!”
진나라 왕실은 상앙의 변법 이후 법가의 엄격한 법률과 주변국에 비해 높은 세율로 평민을 가혹하게 통치해왔기에 귀족이 아닌 백성들은 주변국 백성에 비해 왕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몰리게 된 시기에 최후까지 외적에게 대항하겠다며 스스로 손에 무기를 드는 진나라 백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자 패장 왕전과 함께 함양을 지키고 있던 상방 창평군은 즉시 입궐해 진왕 영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폐하······. 함양에 남아있던 백성들이 합종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등짐을 지고 어린 자식의 손을 잡아끌면서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발칙한 것들! 위기에 처한 진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산불을 만난 들짐승처럼 제 살길만 찾으려 든다는 말인가!”
“모두 조선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잘못된 전략을 세워 나라를 망친 소신의 무능함이 원인이 되어 벌어진 일입니다. 부디 소신을 참수하시고 왕전 장군을 서융의 영토로 추방하신 다음 제 목을 적진에 보내시어 진나라를 구하시옵소서.”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경의 목을 베어 적진에 보낸다고 그냥 물러날 합종군이 아니란 말이오!”
“소신은 초나라가 합종책에서 빠져나오도록 설득한 다음 초나라 왕으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니 조선의 태자를 비롯한 합종책에 참여한 여러 나라 장수가 소신을 경계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소신과 왕전 장군이 사라진다면 합종군도 굳이 진나라를 멸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크흠······.”
어린 왕은 창평군의 진심 어린 충언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창평군의 말대로 하면 짐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지 모르지. 조선은 연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연나라 왕과 왕족들을 죽이지 않고 백호의 장으로 삼아 조선 반도로 보낸 적이 있으니. 하지만 그게 귀양살이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진왕 영정은 아버지인 장양왕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태어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으며 자라온 과거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비굴하게 동이족
태자와 다른 나라의 장군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살아남아 봐야 얻는 건 치욕스러운 여생뿐이다.’
그는 결국 최후까지 합종군의 공격에 저항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창평군에게 말했다.
“창평군. 짐은 결코 가증스러운 침략자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오.”
“폐하······. 천년 고도 함양의 궁궐이 함곡관처럼 불타고 거리마다 죄 없는 백성들의 피가 흘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어차피 우리 진나라의 국운이 다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면 장렬하게 외적과 싸우다 비장한 최후를 맞아야 후세의 사람들이 짐을 비웃지 않을 것이오.”
“이미 뜻을 굳히셨군요. 그렇다면 소신도 투항을 입에 담는 대신 폐하께서 진나라의 마지막을 지켜보실 때 곁을 지키겠습니다.”
“고맙소. 창평군. 그럼 코앞까지 다가온 합종군을 맞을 준비를 시작합시다. 우선 싸울 수 있는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니 왕전 장군에게 성문을 빠져나가려는 백성들을 붙잡아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징집하라고 전해 주시오”
“폐하. 왕실에 대한 충심을 저버린 백성을 도시 안에 붙잡아두면 오히려 내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냥 보내주는 것만 못할 겁니다.”
“그 배은망덕한 것들이 폭도로 변하기 전에 그놈들의 부모나 처자식을 잡아다가 한데 모아두고 인질로 삼으면 감히 짐의 명을 어길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오.”
어린 왕이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창평군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암군보다는 폭군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 * *
진왕 영정의 어명이 떨어지자 함양을 지키는 진나라군 병사들은 도시를 빠져나려는 피난민들을 위협해 식량과 물자를 빼앗고 반항적인 장정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아서 열 살 이상인 남자를 모조리 징집하기 시작했다.
“관군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의 가족은 즉시 처형하겠다!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순순히 어명을 받들어 조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얼마 지나지 않아 함양의 거리 곳곳에서 백성들의 곡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 소식은 성문이 폐쇄되기 전에 간신히 함양을 빠져나온 피난민들을 통해 합종군의 진영에도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합종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대부분 어린 진나라 왕의 표독스러움에 경악했는데, 그중에서도 진나라군 포로 출신으로 구성된 옹나라군 병사들은 특히 분통을 터뜨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악독한 폭군을 왕이랍시고 섬기고 있었구나!”
“함양에는 출가한 동생네 가족이 살고 있다고······. 제발 다들 무사해야 할 터인데!”
그로부터 며칠 후 합종군은 드디어 함양에 도착해 도시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진나라의 장군 왕전은 성벽 위에 서서 다양한 나라의 군대로 구성된 적군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 동쪽 중원의 나라들에 북에서 내려온 흉노, 거기에 먼 남만에서 온 촉나라의 후손들까지······. 그야말로 온 천하가 진나라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 셈이로구나······.”
진왕 영정이 노인과 아이까지 끌어모아 병사를 늘 현재 함양을 지키는 진나라군은 약 10만 명.
함양 수비대에 사기가 낮고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가 많이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함양의 성벽은 높고 튼튼하며 다양한 방어시설이 설치되어있고 성안의 모든 병사와 백성이 아껴먹으면 3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왕전은 함곡관을 불태웠던 비염귀만 성벽을 넘기 전에 성벽 위에 설치된 상자노로 잘 저격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의 공격에 기민하게 대처하면 60만 명이 넘는 적군이 공격해와도 1년 이상 버틸 수 있을 거로 예상했다.
하지만 함양을 제외한 진나라의 거의 모든 지역이 자기 손으로 실행한 청야전술 때문에 초토화되거나 합종군에게 점령당해서 함양의 높은 성벽에 의지해 밀물처럼 몰려오는 적군을 막아낸다 한들 진나라의 예정된 멸망을 조금 늦출 뿐일 것이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었던 걸지도 모르겠구나······. 이미 진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킬 방법이 없어졌는데 힘없는 백성들을 희생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몽무와 함께 패잔병 3만 명을 이끌고 함양성으로 퇴각할 때만 해도 진왕 영정과 마찬가지로 적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허리가 굽은 백발의 노인과 부모에게서 떨어져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눈이 부은 열 살 소년이 허름한 옷 한 장만 몸에 걸친 채 극과 창을 들고 성벽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냉철한 젊은 명장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왕전이 갈등하고 있을 때, 한부도 합종군 숙영지의 망루 위에 올라 함양의 성벽 위를 바라보다가 진나라군의 노인병과 소년병을 발견하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함양에서 탈출한 피난민들이 한 말이 사실이었구나······. 영정 그놈 어린놈이 정말 독하구만. 아직 새끼라도 독사는 독사라 이건가? 나도 지금까지 별의별 흉악한 짓을 다 해왔지만, 소년병을 징집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건만.”
그때, 망루 밑에서 고조선군의 부장 한 명이 그를 불렀다.
“전하. 전군의 발석차 부대가 함양성을 공격할 준비를 마치고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부는 자기를 부른 부장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한마디만 하면 발석차가 기름이 가득 담긴 불붙은 항아리를 함양성 안으로 퍼붓겠구나. 그런데 함곡관하고는 달리 함양성 안에는 영정 때문에 탈출하지 못한 민간인이 수십만 명이나 있단 말이지.’
그는 원 역사의 초한 쟁패기에 함양을 완전히 불태우고 그곳에 살던 모든 백성을 학살했었던 초패왕 항우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생각해내자 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 이게 최선인가?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함양을 공략하면 그 업보 때문에 나중에 조선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는 거 아닐까? 뭔가 피를 덜 흘리고도 함양을 빨리 점령할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런데 그때, 원 역사의 진나라의 장군이자 왕전의 아들 왕분이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점령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 한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그 방법을 쓰면 화공보다는 민간인이 덜 다칠 거야!”
그는 망루 아래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부장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일단 화공은 보류하겠다! 그리고 당장 위나라 왕과 다른 나라의 장군들에게 전령을 보내서 내 막사에서 군사회의를 열자고 전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부장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읍한 후 빠른 걸음으로 휘하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부도 망루에서 내려와 지휘관 막사로 돌아가서 위왕 위무기와 다른 나라의 장군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모든 회의 참석자가 막사 안에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자 한부가 입을 열었다.
“예정에 없던 군사회의에 모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급히 함양을 공격할 전술에 관한 논의를 하려고 부득이 다시 여러분을 제 막사에 모시게 됐습니다.”
그 말에 위왕 위무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조선의 태자여. 며칠 전에 화공으로 성벽 안에 있는 적군과 적군의 군수품을 줄이기로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그 결정을 내린 이후로 진왕 영정은 피난민을 함양성에 붙잡아두고 방패막이로 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적국의 백성이라지만 무고한 양민이 수십만 명이나 갇혀있는 성안에 불을 지르는 건 불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인 듯합니다.”
“그렇지만 정공법으로 전 단단한 성을 공격하려 든다면 진나라 백성들 대신 우리 병사들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오.”
“그렇겠지요. 그러니 수공을 써서 진나라군의 전의를 꺾으면 어떻겠습니까?”
“수공이라!”
“함양에는 높은 건물이 많으니 위수의 물을 끌어다가 수공을 펼쳐도 그리 많은 적군이나 민간인이 다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진나라군이 비축해둔 곡식과 군수품은 흙탕물에 젖어서 금방 썩거나 못쓰게 돼버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