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64화 (164/195)

[164화] 포로를 아군으로

한부가 소리치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고 그 중 위왕 위무기가 가장 먼저 고조선의 태자에게 물었다.

“조선의 태자여. 이번엔 어떤 계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인지 몹시 궁금하구려.”

“진나라 포로를 죽일 기도 꺼림칙하고 아직 살려서 함곡관 너머로 데려가서 노비로 삼기도 어렵다면 차라리 옹나라에 줘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옹나라에 말이오? 호······. 그거 재미있는 발상이구려. 확실히 옹나라와 진나라는 위정자들의 사정으로 서로 다른 나라가 되었을 뿐이니 귀족이 아닌 백성들은 동포와 굳이 두 나라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소.”

“그렇습니다. 폐하. 또 옹나라는 지난 전쟁에서 왕전이 이끄는 군대에게 크게 패해 많은 장정을 잃었으니 풍년이 든 밀밭에서 추수할 일손이 많이 부족할 겁니다. 그러니 같은 말과 문화를 공유하는 진나라 포로를 백성으로 삼을 수 있다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번에는 신평군 염파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얼마 전까지 동포였다고 해도 진나라와 옹나라의 병사들은 전장에서 만나 죽고 죽이는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고는 하나 진나라군 병사들 중 순순히 옹나라에 투항하는 자가 몇 명이나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겠지요.”

“신평군과 조나라의 병사들이 본태자를 도와주신다면 상당히 많은 진나라 포로가 기꺼이 옹나라 왕실을 섬길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 조나라인들이 말씀입니까? 소장이 데리고 있는 부장과 병사들은 진나라인들을 설득하기는커녕 참수하자고 아우성을 칠 듯합니다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나라 포로들에게 옹나라에 귀화하지 않으면 신평군 염파에게 맡겨서 장평대전에서 죽은 조나라 장정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제물로 쓰겠다고 겁박하면 아무래도 옹나라 왕실에 붙는 자가 더 많지 않겠습니까?”

“흠······. 그럴듯하군요. 알겠습니다. 제 병사들에게 진나라인을 겁줄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신평군.”

합종군의 군사회의가 끝난 후 한부는 옹나라의 수도 옹성에 사절을 보내 자기 뜻을 전했고 신평군 염파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진나라의 병사들을 잡아둔 임시 포로수용소 근처에 큰 구덩이를 여러 개 파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진나라군 포로들은 아침 일찍부터 해가 질 때까지 삽으로 땅을 파는 조나라의 장정들을 보고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절규했다.

“조······ 조나라인들이 우리를 갱살(坑殺)해서 장평에서의 원한을 풀려는 구나!”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야! 윗 대가리들끼리 권력다툼 때문에 나라가 두 동강 나서 자중지란을 일으키다가 국력을 허비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 아니냐고!”

그렇게 죽음의 공포가 진나라군 포로들 사이에서 전염되어 가기 시작한 지 엿새째 되던 날, 한부의 연락을 받은 여불위가 휘하의 식솔 수천 명과 함께 합종군의 군영에 찾아왔다.

여불위는 몇몇 최측근과 함께 합종군의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오면서 상석에 앉아있는 한부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저 겉보기에는 훤칠한 장수가 독사처럼 교활한 조선의 태자란 말이지······.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구나. 저놈만 아니었어도 이 여불위는 여전히 중원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상방이자 진왕의 중보일 터인데! 하늘은 어찌 이 여불위를 낳으시고 다시 한부를 낳으셨다는 말인가!’

한부는 그런 여불위의 모습을 보고 그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급히 표정을 고친 것 같은데. 내가 저 입장이어도 그랬겠지만, 여전히 나한테 좋은 감정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여불위가 한부의 앞으로 다가와서 읍할 때, 두 사람은 마치 수십 년 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정중한 인사를 나누었다.

“옹나라의 상방 여불위가 중원의 패자인 조선의 태자를 뵙습니다.”

“여 상방님. 본태자의 초청에 응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누추한 군영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국오군자 중 한 분이시자 고명한 무장이신 전하께서 합종책에 참여한 다른 나라를 설득해 우리 옹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으니 감사는 제가 드리는 게 마땅할 듯 하옵니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신 분이 참으로 겸손하시군요.”

그후 두 사람은 탐색전을 겸한 대화를 주고받았고 여불위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전하. 옹나라와 진나라는 본래 한 나라임에도 폭군 영정이 친모인 조 태후를 홀대하며 불효를 일삼고 부덕한 정치를 펼쳐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바람에 죄 없는 백성들이 가족에게 창을 들이밀고 활을 겨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비록 적국이라고는 하나 본태자도 진나라 백성들의 고충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길이 없군요.”

“그러하시다면 부디 합종군의 포로가 된 진나라 백성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주십시오. 옹나라 왕실과 소신이 어리석고 불쌍한 백성들을 품어 동맹국인 조선과 위, 조, 제, 한 네 나라와 함께 중원의 평화를 위해 힘쓰도록 잘 타이르고 가르치겠습니다.”

“옹나라 왕실의 청을 받아들이겠소. 부디 여 상방의 식객들과 함께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진나라 백성들을 잘 설득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시오.”

그 후 여불위는 위왕 위무기와 합종군의 다른 장수들을 만나 가식적인 덕담을 나눈 후 자신의 식객들과 함께 합종군 군영 구석에 있는 임시 포로수용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가 곧 조나라군 병사들에게 도살장으로 향하는 가축처럼 끌려가 구덩이 던져질 거로 생각하고 있던 진나라군 병사들은 진나라의 옷을 입은 선비 무리가 나타나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여기에 우리나라 선비들이 찾아온 거지?!”

“왕께서 합종군에게 항복해서 우릴 풀어주기로 한 거 아니야?”

“글세······.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네. 잠깐만! 저 맨 앞에 있는 사람 여불위 아니야?!”

“뭐?! 그 역적 여불위?!”

몇몇 진나라군 포로 중 장수였던 자들은 여불위가 나타났다는 말에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면서 노성을 질렀다.

“역적 놈이 우리를 비웃으려고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온 모양이구나! 동포들의 개죽음을 그리도 보고 싶더냐!”

“동포는 얼어 죽을 동포! 저 백정만도 못한 놈은 원래 한나라 출신이라고! 진나라의 재상이 돼서 태어난 조국을 침략하는데 앞장서던 놈!”

그러자 다른 진나라군 포로들도 그를 노려보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불위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애써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입을 열었다.

“아······. 어리석은 정치 때문에 가엾은 백성들이 이토록 고통받다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란 말인가!”

그가 자주색 비단옷에 더러운 피고름을 묻혀가면서 영혼을 담은 연기를 하자 그 자리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 소문으로 듣던 거하고는 여불위의 인상이 많이 다른데?”

“그러게 말이야.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다가 왕께 발각되고 나서 외적에게 붙은 역적 중의 역정이라고 들었는데······.”

노회한 정치인은 그런 대중들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연설을 시작했다.

“가엾은 백성들아! 너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진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나라가 두동강 나며 죄 없는 백성들이 외세의 침입에 신임하게 된 것은 모두 이 여불위의 탓이다! 나는 진나라의 상방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조 태후의 음행을 일찍 눈치채지 못하여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고 그로 인해 어린 왕의 성정이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여 친부모를 죽이려 드는 사태를 막지 못했다! 내 능력과 덕이 부족해서 말이다!”

그 말에 수많은 포로들이 옆에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수군거렸다.

“그래······.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긴 했어. 이미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세에 중원 최고의 부를 거머쥐었었던 진나라의 상방이 뭐하러 음탕한 태후의 뚜쟁이 짓을 하겠어? 들키면 역적이 되고 안 들켜도 자기한테 득 될 게 하나도 없는데?”

“듣고 보니 그렇네.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잃을 게 많으면 그런 짓은 안 저지르지.”

여불위는 그런 진나라 백성들의 반응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무능한 자도 수십 년 동안 헌신해온 진나라의 백성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일은 도저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숙적이었던 조선의 태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옹나라가 합종책에 합류하여 그대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가엾은 백성들이여! 이제 우리 옹나라의 왕실을 섬겨 부디 부모께서 내려주신 소중한 신체와 목숨을 지키거라! 그리해야 아직 멸망해가는 진나라에 남아있는 가족의 안위를 지킬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여불위가 연설을 마치자 그의 식객들도 입을 모아 포로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진나라에서 높은 학식과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받는 자들이 많았기에 여불위를 경계했던 진나라군 포로들은 서서히 옹나라에 귀화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그래······. 내가 여기서 땅에 파묻혀 죽어버리면 고향에 있는 처자식은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힘들겠지.”

“잘 생각해보니까 어리석은 왕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내 고향 마을이 있는 파촉 땅을 서융의 야만인들에게 넘겨준다고 했었어. 그런데 여 상방은 동이족

태자에게 머리를 숙여가면서까지 우리 목숨을 구하러 왔잖아?”

“매몰찬 영정보다는 여 상방과 옹나라 왕이 백성을 아끼는 위정자다! 옹나라 왕실을 도와 고향에서 밤잠을 설치고 있을 가족을 구하자!”

몇몇 포로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던 다른 포로들도 살길이 생긴 것에 기뻐하면서 옹나라에 귀화할 것을 결심했다.

한부는 먼발치에서 여불위가 20만 명이나 되는 진나라 포로들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해야 하나? 가문에 벼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장사꾼 가문에서 태어나서 진나라의 재상 자리를 꿰찬 인물답게 말솜씨가 예사롭지 않네. 아무튼, 이제 여불위한테 진나라 포로 중에서 쓸만한 자들을 추려내서 함양성을 포위하는데 병사를 보태라고 해야겠다.’

* * *

여불위는 진나라군 포로를 설득해 귀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옹나라가 다시 합종책에 합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왕전과의 전투에서 참패로 상실했던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

그리고 한부는 그 대가로 옹나라에 지원군과 물자를 요구하여 병사 3만과 함께 적잖은 군량과 화살 등의 군수품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옹나라 영토를 통과한 흉노의 기병대와 남쪽에서 전투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얼마 안 남은 파촉의 진나라군을 격파하면서 북진해온 어우락의 군대가 속속 합류하면서 합종군의 군세는 어느세 60만 명을 훌쩍 넘어서게 되었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한부는 대열의 선두에 서서 서쪽의 평야를 검으로 가리키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함양을 향해 진군하라! 한 줌도 안 남은 진나라군을 물리치고 폭군 영정을 옥좌에서 끌어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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