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합종군 vs 진나라군 (4)
왕전은 합종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후 즉시 서융의 장수와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수가 늘어난 진나라군을 이끌고 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위수 일대를 정찰하던 고조선군의 기병대는 적군이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숙영지로 돌아와 한부에게 보고했다.
“기사 령이 태자 전하께 보고 드립니다! 진나라와 서융의 연합군이 우리군의 숙영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적군 중 진나라군과 서융족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아보았느냐?”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지는 못했사오나 서융족의 수는 진나라군 병사 수의 절반 정도로 보였습니다.”
“진나라인으로만 구성된 부대가 대략 20만 명이었으니 적군은 한 30만 명 정도라고 보면 되겠군. 수고했다. 너희 부대에 술과 고기를 내릴 터이니 숙소로 돌아가서 잘 먹고 푹 쉬도록 해라.”
뜻밖의 상을 받은 기병들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막사 밖으로 나가자 한부는 즉시 군사회의를 열어 위나라 왕과 다른 나라의 장군들에게 진나라군의 동태를 알렸다.
위나라 왕은 한부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선의 태자여. 전면전에 소극적이던 적장이 갑자기 싸움을 걸어오다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군요. 흉노와 촉나라의 후손들이 우리 군에 지원군을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게 분명하오.”
“본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일은 하급 무관이나 병사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거늘······. 어쩌면 진나라의 세작이 우리군 진영에 잠입해 있는지도 모르겠소.”
위왕 위무기의 말에 그 자리에 모인 장수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러나 한부는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위나라 왕과 다른 장수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물증은 없지만 아마도 옹성에 잠입한 진나라의 세작이 흉노와 옹나라가 화친을 맺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는 게 정황상 맞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소?”
“진나라가 어우락이 보내올 지원군을 경계하고 있다면 남쪽의 국경지대에 수비부대를 배치해야 하는데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정보는 우리군 진영이 아닌 옹나라에서 새어나갔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합니다.”
“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이 자리에서 논하는 전략과 전술이 적진에 전해지지는 않겠군요. 그래도 짐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굳이 젊은 적장의 도발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위나라 왕의 말에 신평군 염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폐하. 우리 합종군은 적군보다 수가 많고 좋은 병장기를 갖추고 있으며 정예병의 비중도 더 높습니다. 새파란 애송이가 겁도 없이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이유가 있습니까?”
“신평군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만, 반대로 남과 북에서 많은 수의 지원군이 오고 있는 와중에 굳이 회전을 벌일 필요도 없지 않겠소? 전원 기병으로 구성된 흉노의 10만 대군과 그보다 수는 적어도 코끼리를 부리는 어우락군까지 합류하면 우리 합종군이 진나라군과 싸워서 질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을 것이오.”
“회전을 벌일 때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적장이 저 많은 병사를 데리고 함양성 안에 틀어박힐 수도 있습니다. 작년과 올해는 풍년이 들었으니 함양의 곡식 창고에는 백성과 진나라의 30만 대군을 적어도 3년 이상 먹일 수 있는 밀이 비축되어 있을 겁니다.”
“공성전을 시작하기 전에 적군의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줄여 두자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폐하. 비록 대만 왕국의 해군 덕에 앞으로 서너 달쯤 병사들을 먹일 수 있는 군량을 확보하긴 했지만, 전쟁을 오래 끄는 건 능사가 아닙니다. 겨울이 되면 황하와 위수가 얼어서 뱃길로 군량을 나르기도 어려워질 테니 말입니다.”
“음······. 그 말씀에도 일리가 있군요. 조선의 태자여. 이번에도 그대가 결정하는 수밖에 없겠소. 전투를 피하면서 흉노와 어우락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소? 아니면 젊은 적장의 도발에 응하겠소?”
한부는 위왕 위무기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함양의 성벽은 분명히 높고 튼튼하겠지. 당연히 위나라 왕의 말대로 지원군을 기다렸다가 전투를 벌이는 게 안전빵이긴 하지만, 그럼 전쟁이 길어져서 장기적으로 보면 인명피해나 재정손실이 더 커질 수도 있어.’
그는 원 역사의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쇠락한 카르타고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높은 성벽에 의지해 막강한 로마군의 공격을 3년이나 막아냈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진왕 영정과 왕전은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니 30만 대군이 고스란히 함양성 안으로 숨어버리면 진나라 원정도 길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왕전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폐하. 위험부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신평군의 말씀대로 이번 전투에서 진나라군을 확실히 제압하는 게 좋겠습니다. 중원 여러 나라의 백성들은 진나라의 끊임없는 침략 때문에 수십 년째 고통받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게 천하가 평안해지는 길일 겁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더 고민하지 않겠소. 그럼 지금부터는 어떻게 진나라군을 물리칠지를 논의해야겠군요.”
“우선은 우리 합종군에게 유리한 전장을 골라야겠지요. 정찰부대를 더 풀어 주변의 지형을 철저하게 조사한 다음에 적장 왕전을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유인할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 * *
한부는 군사회의를 마친 후 기병 수천 기를 풀어 위수 일대의 지형을 살핀 다음 부대를 이동시켰다.
진나라군의 정찰부대는 합종군의 40만 대군이 진나라군의 쪽으로 이동하다가 행군을 멈추고 새 숙영지를 짓는 모습을 보자마자 왕전에게 돌아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왕 장군님. 적군이 이곳에서 동쪽으로 50리쯤 떨어진 평야 지대에 숙영지를 지었습니다.”
“붓과 비단을 가져와서 지도를 그릴 테니 그 주변의 지형을 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
“알겠습니다. 장군님.”
왕전은 기병의 보고를 들으면서 열심히 붓을 움직여 간략한 지도를 그린 다음 팔짱을 끼면서 중얼거렸다.
“북쪽의 위수와 남쪽의 언덕 사이에 있는 평원이라······. 합종군은 우리보다 병사가 많은 데 조선의 태자는 어째서 이런 곳에 숙영지를 지은 걸까······.”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몽무는 주변에 다른 장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왕 동생. 합종군이 위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건 아마 우리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 아니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몽 형. 아마 우리가 30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데리고 함양성 안에 숨어서 농성해서 전쟁이 길어지는 걸 원치 않는 걸 테지요.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합종군이 왜 하필 이런 곳에 숙영지를 차렸는지는 아직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평야는 대군으로 수가 적은 적군을 물리치기에 좋은 장소일 터인데.”
“그렇지만 이곳의 평야는 40만 명이나 되는 합종군이 진을 치기엔 조금 좁습니다. 게다가 이런 지형에서는 조선이 자랑하는 중기병대와 궁기병대를 활용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조선의 태자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어쩌면 동생이 교묘한 전술로 합종군을 괴롭힐까 봐 그저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는 전장을 고른 게 아닐까? 이런 곳에서 양군의 병사가 한데 뭉쳐서 난전을 펼치면 훈련이 덜 된 병사도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겠지.”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현산에서의 전투에서 확인했듯이 합종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나라마다 역량의 차이가 천차만별이지요. 게다가 여러 나라로 구성된 연합군이 전장에서 긴밀한 연계를 펼치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요.”
“한 부대의 역량은 가장 뛰어난 병사가 아니라 가장 형편없는 병사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법이지. 내가 적장이라면 강과 언덕 사이의 평야 지역 한가운데에 두꺼운 보병진을 짜서 수가 적은 진나라군을 단번에 밀어낼 걸세.”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몽 형다운 전술이군요.”
“그거 칭찬 맞겠지? 그나저나 적장이 선택한 전장에서 회전을 벌이는 건 영 께름칙하군. 다른 전장으로 적을 유도하는 편이 좋겠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합종군이 유인책에 걸려들지 않고 시간만 허비하면 우리 진나라군은 함양성 안으로 숨을 새도 없이 합종군과 흉노의 마적떼에게 포위되고 말 겁니다.”
“그럼 끝장이지······. 지금이라도 함양성으로 퇴각해야 하나?”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적은 아마 수가 많고 좋은 장비를 갖춘 두꺼운 보병진을 중앙에 배치하겠지요. 그럼 우리는 오히려 중앙의 본대는 서융의 보병 위주로 세워두고 양익에 기병대와 정예부대를 배치하는 전술로 적장의 허를 찌르는 게 좋겠습니다.”
“서융의 보병들은 힘과 체격이 좋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어서 군대로서는 그리 강하지 않으니 금방 돌파당하지 않을까?”
“적장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이 왕전이 직접 지휘하면 좀 다를 겁니다.”
* * *
기원전 244년 8월 25일 한낮, 합종군의 40만 대군과 진나라와 서융 연합군의 30만 대군이 드디어 함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원에서 마주쳤다.
유유히 흐르는 위수와 남쪽의 작은 언덕 이외에는 장애물이라곤 나무 한 그루도 없는 평원.
한부는 커다란 한혈마의 등 위에서 그곳의 경치를 둘러보고는 원 역사의 서양 전쟁사에 전설로 남은 전투가 펼쳐진 전장을 떠올렸다.
‘이 근처의 지형은 꼭 칸나이 전투 기록을 읽었을 때 봤던 지도하고 닮았단 말이지. 그래서 여기를 전장으로 선택한 거고.’
원역사의 기원전 3세기에 벌어진 2차 포에니 전쟁 초반에 로마군은 명장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을 한부가 전장으로 선택한 곳과 지형이 비슷한 칸나이 지역의 평야로 유인했다.
그 전투에 9만 대군을 동원한 로마군은 주력군을 모두 중앙의 본대에 배치하여 카르타고군의 본대를 순식간에 격파한 다음 양익의 적군까지 궤멸시킨다는 전술로 한니발의 병사 5만 명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런 로마군의 전술을 읽고 일부러 카르타고군 중앙 본대는 개개인의 무력은 뛰어나지만, 조직력이 약해 군대로서는 형편없는 갈리아인 용병만을 배치하고 양익에 정예병을 배치하는 기발한 전술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부는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 왕전을 칸나이와 비슷한 지형의 전장으로 유인하면 한니발과 비슷한 전술로 합종군을 상대하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화약 무기가 없는 고대에 이런 지형에서 적은 병사로 수가 많은 대군을 이길 방법은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선보인 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부는 왕전이 자기가 준비한 덫에 걸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강과 언덕 사이에 있는 평야에 전군을 배치한 다음 적진에 정찰병을 보낸 후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 한 시간이 지나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고조선군의 기병이 본대의 후방에 있는 태자에게 달려가 말에서 내린 후 읍하면서 보고했다.
“기사 을이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진나라군은 서융의 보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기병대와 극병 부대, 그리고 노궁수 부대를 양익에 배치했습니다.”
병사의 보고를 듣는 순간 한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