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합종군 vs 진나라군 (3)
한부는 왕전이 주도한 습격에 6만 명에 가까운 병사를 잃은 후 전군에 최대한 신중하게 주변 지역을 정찰하면서 천천히 산길을 행군했다.
그런 이유로 합종군은 본래 늦어도 한 달 안에 마칠 예정이었던 산악행군에 무려 두 달을 소요하는 바람에 원래의 계획보다 많은 시간과 군량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리고 계절이 늦여름에 접어든 8월 말, 마침내 합종군 행렬의 선두에선 고조선군이 좁은 산길을 벗어나 현산의 서쪽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 병사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시커먼 잿더미가 되어버린 농경지와 마을, 그리고 진흙을 부어 메워버린 우물이었다.
한부는 말 위에서 진나라군이 청야전술을 펼치고 지나간 주변을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쯧! 일찌감치 예상한 일인데도 직접 현장을 보고 나니 영 기분이 별로구먼.”
그 말을 들은 상장군 무명이 태자의 말에 맞장구쳤다.
“동감입니다. 전하. 게다가 불탄 마을과 농경지의 상태를 보니 진나라군이 불을 지른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입니다.”
“상장군은 잿더미만 보고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이오? 비결이 궁금하구려.”
“간단합니다. 큰 도시나 마을을 불태우면 잿더미 속에 남은 잔불이 며칠씩 꺼지지 않고 남아서 적게나마 연기가 올라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근방에서 본 불탄 마을 중에서 그런 곳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음······. 젊은 시절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식이었구려. 그럼 지금 상장군이 적장 왕전이라면 어떤 전략으로 합종군을 상대하겠소?”
“청야전술이 효과를 봐서 군량 보급이 늦어진 덕에 현산을 넘은 합종군 병사들이 쇠약해진다면 회전을 걸거나 적의 군영을 급습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함양성에 틀어박힌 다음 겨울을 버티지 못한 적군이 제풀에 지쳐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둘 다 합종군에는 최악의 상황이구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병참선을 철저하게 닦아놓고 원정을 시작하길 천만다행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적장 왕전이 새파란 젊은이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도 합종군이 현산의 산길 이외의 경로로도 군량과 보급품을 운송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할 겁니다.”
“상장군이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구려. 그럼 왕전과 진왕 영정을 놀라게 할 준비를 시작해봅시다.”
한부는 무명에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곁에 있는 병사에게 기병대장 석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태자의 곁으로 말을 달려온 석이 말 등위에서 내려 읍하면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이곳에서 거리가 멀지 않은 위수 강변의 나루터를 몇 군데 찾아봐라. 그중 한 곳의 근처에 숙영지를 짓고 주변을 사수한다.”
“부둣가 말씀입니까? 저번에 초나라를 정벌할 때 대만 왕국 해군의 존재가 진나라에 알려져서 함양 상륙 작전은 취소된 것으로 말고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그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진나라 왕이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함양에서 가까운 위수 일대는 철저히 지킬 테니 이제 상륙 작전은 무리겠지. 하지만 대만 왕국의 선원과 배로 함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루터에 군수품을 가져오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 뱃길을 이용해서 본국의 물자를 진나라 영토 안으로 가져오실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보안 문제로 합종군 내부에서는 상장군하고만 이야기했지만, 대만 왕국의 왕실과 계성에 남아 있는 관리들에게는 합종군이 초나라에서 거양성을 포위했을 때 이 작전의 내용을 이미 전해두었다. 아마 며칠 후면 갓 추수한 밀을 실은 배가 위수에 들어설 테니 그 전에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두자.”
“그렇지 않아도 현산을 넘어올 수송대가 언제 도착할지 몰라서 조금 불안했는데 참으로 잘됐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곧 기병대를 풀어 물자를 선적할 수 있는 나루터를 찾아내겠습니다.”
* * *
기병대장 석은 한부의 명에 따라 수천 기의 기병을 위수 강변에 급파해 주변에 짐을 쌓을 공터가 넉넉한 나루터를 수색했다.
마침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진나라군의 소규모 정찰부대는 커다란 한혈마를 탄 고조선군 기병대가 위수를 따라 말을 달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진나라군 군영의 지휘관 막사로 달려가 왕전에게 그 사실을 알렸지만, 젊은 명장은 적군의 움직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낼 수 없어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합종군의 기병대가 왜 위수의 강변을 따라 움직이는 걸까······. 조선의 태자나 위나라 왕은 함양의 수비대가 강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위인이 아닌데······.”
젊은 장군의 혼잣말을 들은 몽무는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왕전에게 말했다.
“왕 장군님. 혹시 합종군이 뱃길로 군량을 나르려는 건 아닐는지요? 위수는 황하의 지류이니 얼마든지 강을 통해 하북의 물자를 나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요. 몽 기병대장. 황하는 강바닥에 흙이 많이 쌓여서 배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강이 얕은 지점이 적지 않아서 수송선으로 병사 수십만 명이 먹을 군량을 운송하려 들다가는 배의 밑바닥이 강바닥에 닿아서 뒤집히는 배가 태반일 테니 말이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사람만 탄 배보다는 짐을 많이 실은 배의 선체는 물에 많이 잠기겠지요. 이번에도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군님.”
이번만큼은 자신의 감이 맞아떨어졌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몽무는 여러 장수 앞에서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신중한 성격의 왕전이 합종군이 강으로 물자를 나를 수 없을 거라고 속단한 이유는 기원전 3세기 고대 중국인이 사용하던 배의 형태가 아직 큰 운하가 없는 황하로 많은 물자를 먼 곳까지 나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기의 고대 중국의 큰 수송선은 바닥이 짐을 많이 실으면 천체가 강물 바닥으로 깊이 가라앉는 구조이기에 강바닥이 얕은 황하를 지날 때 좌초될 위험이 적지 않았다.
반면 대만 왕국의 배는 고대 중국의 배보다 무게가 훨씬 가벼운 데다 카누 두 척을 연결해 그 위에 널찍한 판자를 올려 갑판으로 쓰는 형태라 비교적 많은 짐을 실어도 배의 밑바닥이 황하의 강바닥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내륙국인 진나라에는 아직 대만 왕국이 많은 배와 선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 전해졌을 뿐 그들이 모는 배의 모습이나 특징까지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왕전은 장군의 자리에 오른 후 처음으로 사실과는 거리가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합종군은 뱃길로 함양 일대를 급습할 방도를 찾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중간에 배에 탄 병사들이 내려서 쉴 나루터를 확보하려는 모양이겠지. 그러다 위수 인근의 어촌 마을을 약탈하면 조금이나마 군량에 보탬이 될 테고 말이오.”
“가증스러운 합종군 놈들의 입에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소장이 기병대를 이끌고 아직 불태우지 못한 합종군 군영 주변의 어촌을 모두 태워버리고 그곳에 사는 백성을 대피시키겠습니다.”
“마음아픈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약 이레가 흘러가자 왕전은 지금쯤이면 적군 병사들이 군량이 떨어져 현산을 넘어올 병참 부대만 기다리고 있을 거로 여기고 전면전을 준비하면서 다시 합종군 진영에 정찰 부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정찰부대가 가져온 소식은 그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었다
“와······ 왕 장군님! 합종군 부대에는 이미 많은 양의 군량과 보급품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합종군의 수송부대가 일정을 서둘렀다고 해도 수레를 끌고 현산을 넘으려면 아직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아있을 터인데!”
“합종군은 피부가 짙은 갈색이고 험상궂게 생긴 남만족
선원이 모는 요상한 배를 이용해 강으로 군수품을 운송했습니다! 조잡하게 생긴 배가 짐을 많이 싣고도 어찌나 날렵하게 움직이는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물고기가 등지느러미를 물 밖으로 내밀고 헤엄을 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가······! 식견이 부족해서 큰일을 그르치고 말았구나!”
왕전은 뒤늦게 한탄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제 진나라군은 병사 30만 명으로 며칠 동안 잘 먹고 푹 쉰 데다 염파와 이목등의 명장이 지휘하는 합종군의 40만 대군과 싸워야 할 터이니 침착한 그가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왕전이 그날 들어야 할 나쁜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진나라군 장수가 갑옷이 땀에 젖은 채로 경례도 없이 달려 들어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왕 장군! 옹나라가 흉노와 화친을 맺고 그 흉악한 마적 떼에 길을 빌려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나저나 자네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는 대왕께서 보낸 왕실근위대 소속 전령입니다! 역적 여불위가 부리던 간자 중에는 여전히 진나라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자들도 있는데 그중에 옹나라 땅에 잠입해 있던 자가 대왕께 기밀을 보내왔습니다! 이건 왕께서 직접 작성하신 옥새가 찍힌 서신입니다!”
왕전은 전령의 손에서 낚아채듯이 서신을 받아서 펼쳐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 대왕의 필체와 옥새가 맞는구나! 흉노가 10만 기나 되는 기병을 이끌고 남진하고 있다는 말이냐!”
왕전은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흉노의 기병과 합종군이 합류하기 전에 동쪽에 있는 합종군과 회전을 벌여 물리치는 수밖에.”
그 말에 많은 장수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군님! 합종군이 막 현산을 넘어 지쳤을 때도 가만히 내버려 뒀는데 40만 명이나 되는 적군이 잘 먹고 잘 쉬고 나서야 전투를 벌이다니요! 차라리 함양성으로 귀환해 농성을 벌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장군님! 앞으로 석 달만 지나면 겨울입니다! 합종군도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뱃길로 군량을 운송할 수 없을 테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왕전은 부하들의 볼멘소리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조선의 동이족은 농사를 잘 지어서 조선 왕실의 곳간에는 늘 밀과 보리가 넘쳐난다고 들었소. 그러니 우리가 이 시기를 놓치고 함양성에 틀어박히면 석 달 동안 남만의 기묘한 배가 얼마나 많은 식량을 합종군에게 보탤지 알 수 없는 일이오. 게다가 옹나라는 우리에게 전쟁을 걸었다가 큰 패배를 당했지만, 농경지는 타격을 입은 적이 없으니 홀해 풍년이 들어 남아도는 식량을 흉노의 호위를 받으면서 합종군에게 보태주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겠소?”
그 말에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장수가 더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한탄했다.
“아······. 결국 우리 진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킬 수 없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진나라가 언젠가 중원을 통일할 거로 생각했건만······.”
왕전은 그런 부하 장수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오. 비록 우리 진나라군은 적군보다 수가 적지만 효과적인 전술로 합종군을 물리치면 진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