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합종군 vs 진나라군 (2)
처음으로 합종군과의 전투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사기가 오른 진나라군 병사들은 전장에서 도망치지 못한 한나라군 패잔병을 처치한 후 방심하고 있을 적군을 급습하기 위해 좁은 산길과 길 양옆의 숲속을 달려갔다.
그로부터 약 10분이 지나자 왕전이 이끄는 진나라군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나라의 부대였다.
제나라군의 장수들은 앞서 간 한나라군이 진나라군의 복병을 크게 무찔렀다고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적군이 나타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 적군이 몰려온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어서 조선군과 다른 나라의 진영에 진나라군이 습격해왔음을 알려라!”
그러자 맨 앞줄에서 행군하던 제나라군 병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 손에 들고 있는 창을 앞으로 내밀었고 후미의 병사 중 몇 명은 다른 합종군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선두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왕전은 그 모습을 보고 곁에 있는 부장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병사들은 짧은 무기를 들고 있으니 창병과 정면에서 맞붙으면 불리하다! 계획대로 숲속의 아군 별동대가 먼저 적진의 양 측면을 공격하면 그때 본대도 돌격한다!”
“알겠습니다! 왕 장군님!”
장군의 명을 들은 부장들은 활을 가진 병사에게 발사하면 소리가 나는 화살인 명적을 쏘게 하여 숲속의 별동대에 신호를 보냈다.
- 삐리리리리리리!
명적 몇 개가 호루라기와 비슷한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현산의 울창한 숲 위를 날자 짧은 검과 손도끼 따위로 무장한 진나라군 병사 수천 명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면서 우림 속에서 달려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대왕 폐하를 위하여!”
그때 제나라군 행렬의 중심부에 있던 병사들은 전우의 어깨너머로 눈앞의 적군만을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기세가 오른 적군과 갑작스러운 난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숲속에서 적군이 몰려나온다!”
“얼른 창을 숲 쪽으로 돌려라!”
극소수의 제나라군 병사는 창 대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적군에게 대항했지만, 대부분 제나라군 병사는 어찌할 줄을 모르며 허둥거리다가 진나라군이 휘두른 검과 손도끼에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갔다.
“끄아아아아악!”
“이젠 다 틀렸어! 다 이긴 전쟁이라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왕전은 전장에서 한 발 떨어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한나라군 부대 바로 뒤가 제나라군 부대였단 말이지! 하늘이 아직 진나라와 이 왕전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제나라군은 중원 여러 나라의 군대 중에서 가장 실전경험이 부족하고 사기도 낮은 편이었다.
지금의 제나라 왕은 할아버지인 전전 대의 왕이 너무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 주변국을 압박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일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옥좌에 앉은 후 철저하게 전쟁을 피해 왔고 그렇기에 제나라군 장수와 병사는 오랫동안 실전경험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한부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제나라군을 대규모 회전에서 그저 많은 머릿수를 이용한 방패막이로나 쓸 생각이었는데, 그런 병사들이 사나운 적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제나라군 병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손에 든 무기를 바닥에 던져버린 후 다른 나라의 아군 부대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더더욱 기세가 오른 진나라군 장수와 병사들은 겁먹은 사슴 떼처럼 도망치는 적군을 쫓으려고 했지만, 왕전은 그런 부하들을 급히 제지했다.
“도망치는 적을 쫓지 마라! 이제 전투를 마치고 잽싸게 전리품을 챙긴 다음 최대한 빨리 산을 내려간다!”
그러자 몇몇 진나라군 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젊은 장군에게 물었다.
“왕 장군님. 어찌 승기를 잡았을 때 겁먹은 적군을 몰아치지 않으십니까? 이제 오늘 같은 기회는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장군님! 합종군의 의지를 이 현산에서 완전히 꺾어버리시지요!”
그러나 왕전은 여러 부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자네들 이번 전투에 동원한 아군이 1만 명 정도임을 잊은 건가? 아무리 현산의 산길이 좁고 지형이 험해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에 유리해도 지금 수십만 대군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다.”
“오늘 전투에서 보시다시피 합종군은 머릿수만 많았지 모두 오합지졸입니다. 도망치는 제나라군 패잔병 숫자라도 더 줄여두는 편이 좋지 않을는지요?”
“산악지형에 익숙한 조선군이나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군, 그리고 오래전부터 정예 보병대인 무졸을 육성해온 위나라군이 한나라나 제나라의 잡졸과 같을 리 있겠나? 정말 그랬다면 우리 진나라는 역적 여불위가 상방이던 시절에 이미 중원을 통일했겠지. 더는 반론을 듣지 않겠다. 이럴 시간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선산 강철 무기를 하나라도 더 챙겨서 얼른 하산하도록.”
진나라군 장수들은 그제야 주변에 널려있는 제나라군이 버리고 간 무기 중에 강철제 창이나 검이 적잖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원 세상에! 그러고 보니 귀한 강철 무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잖아!”
“저거 하나만 고향에 가져가서 팔아도 몇 년은 놀고먹겠구나!”
고조선 왕실은 강철은 한반도에서만 생산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여 지금까지 강철 제련법을 지켜왔으며 외국에 수출하는 강철의 양도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특히 고조선 왕실은 한부가 어린 시절부터 잠재적 적국으로 여겨온 진나라에는 강철 수출을 철저하게 막았기에 진나라에 흘러들어간 강철 무기는 대부분 제나라 출신 상인이 진나라인에게 개인적으로 판 극소량뿐으로 장군조차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진나라군도 이번 전투에서의 승리로 최소한 소수의 최정예부대 정도는 무장시킬 수 있는 강철 무기를 손에 넣은 것이다.
진나라군 병사들은 앞다투어 들고 있던 청동 검과 도끼를 버리고 강철제 창과 검을 챙긴 다음 합종군이 몰려오기 전에 진나라군 군영이 있는 서쪽을 향해 행군했다.
그리고 제나라군 패잔병에게 적습 소식을 듣고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고조선, 위나라, 그리고 조나라의 장수들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아군 전사자의 시신을 보면서 허망한 표정을 짓거나 분노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부도 몇몇 고조선군 병사가 수습해온 도망치는 아군 병사의 발에 밟혀 죽은 한나라군의 상장군 이궐의 시신을 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탄했다.
“이 장군! 본태자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건만! 어찌 한순간의 욕심을 참지 못하고 이런 몰골로 돌아오셨습니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오직 상장군 무명만이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태자에게 조언했다.
“전하. 상심이 크시겠지만, 우선은 아군의 피해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합종군의 장수들이 슬픔과 분노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면 진나라와 적장 왕전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후······. 경의 말이 맞소. 한시라도 빨리 이번 전투에서 잃은 병사와 군수품을 파악해 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무명은 곧 휘하의 부장들에게 태자의 명을 전했고 고조선군 병사들이 조사를 마치자 기병대장 석이 태자에게 보고했다.
“기병대장 석이 태자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한나라군의 보명 4만 5천 명 중 사상자는 대략 4만 명쯤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혼란을 틈타 탈영했으며 한나라군 기병은 5천 기 중 약 2천 기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또한, 제나라군은 보병 약 2만 7천 명 중 1만 3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제나라군 기병 3천 기중 약 1천 기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6만 명에 가까운 아군 병사를 잃었단 말인가? 진나라군의 산악전투 능력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기라도 한 건가?”“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전하. 죽거나 다친 한나라와 제나라의 병사들은 대부분 아군의 발에 밟히거나 등에 자상을 입고 죽었습니다.”
“그럼 두 나라의 장수와 병사 중에는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자가 많았던 것이 이번 패전의 가장 큰 이유였단 말이군. 조나라나 위나라의 병사 중에도 그런 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 앞으로는 현산을 내려갈 때까지 우리 조선군이 행렬의 선두에 서고 신평군이 이끄는 조나라군을 행렬 중앙에 배치한다. 위나라 왕과 다른 나라의 장군들에게도 내 뜻을 전하도록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 후 합종군은 지금까지 보다 더욱 철저하게 진나라의 복병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산길을 지나기 시작했다.
한부는 산비탈에 매복한 적군을 색출하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가는 고조선군 척후 부대를 보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왕전은 원 역사의 기록보다 더 뛰어난 장수인 모양이구만. 그렇다고 해도 합종군이나 흉노 말고도 중원 밖의 나라가 공격해 올 거라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할 거다. 지금까지 진나라는 패전과 내분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어왔으니 큰 전투에서 한 번만 져도 급격하게 무너져 내릴 거다.
한편 왕전은 조선군이 행렬의 선두에 선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매복 작전을 완전히 포기하고 과감하게 휘하의 부장들에게 현산 서쪽 산기슭에 설치한 군영까지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많은 진나라군 부장이 젊은 명장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질문을 해댔다.
“왕 장군님. 군영에 더 높은 목책과 망루를 세우고 해자를 파서 요새로 삼아 현산을 내려오는 합종군을 막아내시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소장도 전 아장과 같은 생각입니다. 장군님. 이곳의 군영을 철거하면 아직도 40만 명이 넘는 적군이 물밀 듯이 추수를 앞둔 밀밭을 메뚜기떼처럼 휩쓸며 진나라의 곡식을 약탈할 겁니다.”
왕전이 피곤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려 할 때, 기병대장 몽무가 먼저 직급이 낮은 장수들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들 병법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긴 한 건가? 여전히 적군이 우리보다 수가 많고 강하니까 어서 군영을 철거하고 청야전술을 펼쳐야 할 거 아닌가?”
“청야전술이라 하심은······?”
“한마디로 적군이 우리나라의 농경지에 발을 들이기 전에 챙길 수 있는 군량을 모두 챙겨서 함양성 안에 가져다 놓고 남은 가져갈 수 없는 곡식과 마을은 모두 태워버린다는 거지. 아, 마을의 우물도 메워버려야겠군.”
“네?! 기병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올해는 풍년이 들어서 유독 수확량이 많을 터인데 그 아까운 밀을 다 태워버리다니요!”
“그럼 합종군 녀석들이 그걸로 죽을 끓여서 배 터지게 먹을 때까지 내버려 둬야겠나? 쯧쯧······. 장수로서의 기본이 안 된 녀석들이군.”
몽무의 직설적인 비난에 진나라군 부장들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붉어졌고 왕전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 병법보다는 무예에 뛰어난 몽 형님보다도 제대로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부장이 이리도 많다니. 역시 지금도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엔 시기상조다. 아무리 조선의 태자가 병참선을 제대로 닦아놨어도 현산의 산길을 지나면서 나를 수 있는 군량은 한정적이다. 군량이 떨어진 적군이 다음 보급을 받기 직전. 그때 말고는 승리를 거둘 기회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