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함곡관 너머로
왕전의 진나라군이 노애를 죽이고 여불위의 옹나라군을 무찌르는 동안 합종군은 드디어 초나라의 수도 거양을 떠났다.
한부는 43만 대군의 선두에서 한혈마를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런······. 완벽한 보급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진나라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줘버렸구나······.”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상장군 무명이 그 말을 듣고 태자를 위로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전하. 예정에 없던 초나라 정벌을 진행하면서 많은 군량과 군수품을 소비했으니 당연히 진나라 원정을 재개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병참선을 닦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상장군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구려.”
“빈말이 아닙니다. 전하. 합종군이 현산을 넘어 진나라 땅에 들어서면 중원의 본국에서 출발한 수송부대는 지금까지처럼 빠르게 우리 군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에게 함곡관 전투에서 패배한 충격을 추스를 시간을 주지 않겠다고 무모하게 행군을 서두르다가 적진 한가운데서 군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면치 못할 겁니다.”
한부는 무명의 말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히 서두르다가 수양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지. 이번 판단은 전략적으로 분명 옳았어. 내가 진나라 왕이라면 합종군이 현산을 넘기 전에 청야전술을 펼치게 분명 하니까.’
원 역사에서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보급품 수송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로 총 1백만 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세 차례나 침략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이런 수나라군을 상대로 적군에게 식량을 약탈당할 위험이 있는 마을과 농경지를 미리 태워버리는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대항했고 수나라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한부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중원의 다른 지역에서 진나라로 가는 길은 하나같이 구불구불하고 험한 산길이었기에 병참선 확보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한부가 이끄는 합종군은 거양성을 떠난 지 20일 만에 낙양을 지나 함곡관에 도착했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이목은 아군의 행렬이 성문에 도착하기 전에 마중 나와서 태자에게 인사했다.
“장군 이목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홀로 함곡관을 지키느라 노고가 많았소. 이목 장군.”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전하. 초나라를 정벌하신 전하와 다른 장수들에 비하면 별로 한 일이 없어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본태자가 거양에 가 있는 동안 진나라군이 함곡관을 탈환하려 하지 않은 모양이구려.”
“말씀 대로입니다. 옹나라에서 온 사절의 말에 따르면 합종군이 초나라를 정벌하는 동안 옹나라가 진나라를 침략하였기에 진나라군이 함곡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옹나라에서 사절을 보내왔다는 말이오?! 그자가 함곡관까지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구려.”
“사절은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옹나라가 조선, 위, 조, 한, 제 다섯 나라와 동맹을 맺고 합종책에 참여해 함께 진나라에 대항해 싸우고 싶다는 옹나라 왕의 뜻을 전했습니다.”
“여불위가 사사로운 감정을 잊고 나라를 위해 큰 결단을 한 모양이구려! 합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오! 동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진나라를 압박하면 이번 원정을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요!”
한부가 기쁜 목소리로 외치자 그의 등 뒤에 있는 행군의 피로에 지친 장수와 병사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나 기쁜 소식을 알려준 이목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옹나라는 합종군이 현산을 지나기도 전에 먼저 20만 대군을 일으켜서 위수를 건너 진나라군과 회전을 벌였다가 큰 패배를 당해 15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고 옹성으로 퇴각했습니다. 반면 진나라군은 그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없다시피 하며 현재 합종군을 막기 위해 현산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20만 명이나 되는 옹나라군을 대파하고도 진나라군의 피해가 거의 없단 말이오? 혹시 진나라군을 지휘한 적장이 누구인지도 확인했소?”
“왕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젊은 장수라고 합니다. 전하. 또한 함곡관까지 도망쳐온 진나라군 패잔병 중에는 몽무라는 이름의 부장이 큰 철퇴를 휘두르며 기병대를 이끌고 옹나라군 진영을 휘젓는 모습은 마치 굶주린 호랑이가 날뛰는 것처럼 무시무시했다는 말을 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목의 말을 듣자 한부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 왕전과 몽무라······. 두 사람이 실전에서 활약하려면 최소한 5년 정도는 남았을 거로 생각했건만. 진나라의 위기가 까다로운 적장의 등장을 앞당긴 모양이구나······.’
한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원 역사의 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진나라의 젊은 맹장 이신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어렵지 않게 물리친 전국시대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 항연.
그리고 그 항연을 다시 손쉽게 물리친 진나라군의 두 장수가 바로 명장 왕전과 그의 부장인 몽무였다.
문제는 왕전이 심리전에 능한 뛰어난 장수임은 전생에 쌓은 역사 지식으로 알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전술과 전략을 즐겨 사용했는지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전쟁사 기록은 동시대의 고대 로마나 그리스 같은 서구권의 기록과는 달리 전투의 승패나 양군의 피해 정도만 기록할 뿐 상세한 전투 과정은 묘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진나라와 동맹을 맺은 서융의 여러 부족이 보낸 지원군이 속속 함양에 도착하고 있는 상황이 더욱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그렇게 한부는 함곡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른 장수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군사회의를 열었다.
모든 참석자가 급히 마련한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한부가 이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목 장군. 옹나라에서 온 사절이 아직 함곡관에 머무르고 있소?”
“그렇습니다. 전하.”
“옹나라가 합종책에 참여하는 걸 허락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써주겠소. 그걸 그자에게 주어 옹나라 왕에게 전하라고 하시오.”
“전하. 옹나라는 이미 많은 병사와 물자를 잃어 이번 원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흉노에서 보낸 지원군이 진나라의 국경을 쉽게 넘으려면 옹나라 땅을 편하게 지날 수 있어야 하니 여전히 옹나라를 합종책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소. 진나라는 아직 옹나라가 독립하기 전에 흉노의 영역과 맞닿은 북쪽 국경 지역에 장성을 쌓아 놔서 여전히 옹나라가 적은 병력으로도 흉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으니 말이오.”
“흠······. 이번 원정에 꼭 흉노의 힘을 빌리셔야 하는지요?”
“이목 장군. 경이 과거 수년 동안이나 흉노의 침략으로부터 조나라를 지켜왔던 일은 잘 알고 있지만, 본태자는 조선의 태자이자 흉노의 차기 선우 임을 잊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이목을 설득한 후 한부는 이번엔 더는 위나라 왕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대표들에게 옹나라가 합종군에 참여하는 데 찬성하는지를 물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옹나라와의 동맹 체결 여부를 정하고 나자 조나라 대표인 신평군 염파가 입을 열었다.
“전하. 옹나라 얘기가 일단락되었으니 진나라의 건방진 젊은이를 혼낼 방도를 논의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장의 생각으로는 서융의 병사들이 더 모이기 전에 하루빨리 현산을 넘어 함양을 공격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본태자도 그리 생각합니다. 신평군. 하지만 현산의 산길은 좁고 험해 복병을 숨기기에 유리하니 산을 넘기 전에는 신중하게 주변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내키지 않지만, 그러는 편이 현명하겠지요. 그럼 먼저 현산의 산길을 지날 때 어느 나라의 군대를 선두와 중앙에 배치할지를 정하는 편이 좋겠군요.”
염파의 말을 들은 각 나라 대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닫았다.
수레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좁은 산길을 지나는 군대가 복병의 습격을 당할 때 가장 위험한 위치가 바로 행렬의 선두와 중앙이기 때문이다.
보통 복병을 지휘하는 장수가 성격이 급하면 좁은 산길을 적군이 나타나자마자 공격을 퍼붓기에 선두 그룹이 위험해지고 참을성 있고 병법에 능한 장수가 복병을 지휘하면 행렬 중앙을 급습해 적군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려 드는 경우가 많으니까.
한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가장 먼저 신평군 염파의 물음에 답했다.
“현산을 넘는 동안은 조선군을 중앙에 배치합시다. 우리 조선의 병사들은 산을 타는데 능해 산지에서 능숙하게 정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 행렬 중앙이 적군에게 공격당해 전군이 위험에 처하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선두에 설 군대만 정하면 바로 행군을 시작하면 되겠군요.”
고조선 태자가 대답하자 이번엔 한나라의 장군 이궐이 대답했다.
“우리 한나라군이 선두에서 합종군의 행렬을 이끌겠습니다.”
그 말에 신평군 염파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물었다.
“이 장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적장 왕전은 나이는 어려도 제법 만만치 않은 자라고 들었소만. 행렬의 선두에서 적에게 공격당하면 다른 나라의 군대가 한나라군을 지원하러 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아직 천하에 무명(武名)을 떨치진 못했지만, 소장 또한 전국팔웅에 속한 나라의 상장군입니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행군하면 갓 스무 살이 넘은 적장의 얕은꾀에 넘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한부는 호언장담하는 한나라의 상장군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을까?상장군인데도 원 역사에선 기록에 이름도 남기지 못한 듣보잡이라 좀 불안한데······. 한나라가 워낙 국력이 약하고 말년엔 진나라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여서 능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찝찝한 마음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의 대표 중에서 자국 병사를 험한 산길을 지나는 행렬의 맨 앞에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결국 한나라군이 합종군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위나라 왕 위무기도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한나라의 상장군 이궐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장군. 부디 항시 본대가 진군하기 전에 척후병을 앞세워 나무와 수풀 사이에 복병이 숨어있는지 잘 살피면서 행군하길 바라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이 이괄, 결코 병법에 문외한이 아닙니다.”
그렇게 군사회의를 마친 후 한부는 함곡관에 고조선군에서 차출한 수비병 1만 명만을 남기고 47만 대군을 이끌고 현산의 좁은 산길에 들어섰다.
성인 남자 네 명이 어깨를 맞대면 꽉 차는 좁고 가파른 산길의 양옆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울창한 우림.
병법을 거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복병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할 만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한부는 행렬의 중앙에서 가볍고 튼튼한 지갑(紙甲)을 입은 척후병 부대 수천 명을 숲속으로 정찰을 보내면서 울창한 나무 사이를 달려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라의 장군들도 척후병을 몇천 명씩 풀었으니 어지간하면 복병에 크게 당할 일은 없겠지. 현산만 무사히 넘으면 계속 평야 지대니 진나라군은 수와 질에서 앞서는 합종군을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