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왕전 vs 여불위 (2)
“상방님! 젊은 적장을 얕보지 마시옵소서! 진왕 영정은 아직 어려서 현명치 못한 판단을 내렸다고 치더라고 창평군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진나라가 아장에 불과한 왕전을 갑자기 장군으로 임명했다면 창평군이 그자에게서 그만한 잠재력을 발견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사는 평소와는 달리 주군인 여불위의 의견에 끝까지 반대했고 여불위는 그런 그의 절박한 표정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은 우리 장수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일부러 적장을 얕잡아 보는 듯한 말을 했지만, 분명 이사의 말대로 영정과 창평군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왕전에게 병부를 맡겼겠지.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옹나라가 위수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면 난 평생 중원의 패자가 된 조선의 눈치를 보는 약소국의 재상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테니까······.’
여불위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반세기에 가까운 그의 지난 인생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한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대상이 되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막대한 부와 인맥을 이용해 조국에서 재상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약소국의 권력자가 되는 것 만족하지 못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진나라의 떨거지 왕족에게 천금을 투자하여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던 젊은 시절.
전국칠웅 중 최강국인 진나라의 재상이 된 후에도 자리에 걸맞은 명성을 얻기 위해 천하의 선비와 도사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아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리고 익숙지 않은 병법을 익혀 직접 진나라군을 이끌고 동주를 정벌해 공을 세웠던 중장년.
느긋하고 호사스러운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던 그가 이토록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이유는 오직 중원 최강대국의 실권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여불위는 미증유(未曾有)의 젊은 적장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서도 왕전의 도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사. 그대가 말하고 싶은 바는 잘 알겠네. 그러나 함양을 지키던 적군이 제 발로 성 밖으로 나온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옹나라는 종묘사직을 보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위수 이남으로 영토를 넓혀 중원의 패자로 부상할 기회를 영영 잃고 말 걸세. 나를 수년 동안 보좌해온 자네이니 이런 때에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잘 알고 있겠지.”
“후······. 제가 아는 상방께서는 과감하게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이번 ‘사업’에 투자하시겠지요. 알겠습니다. 여 상방님. 더는 진나라군과의 결전에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 * *
여불위는 군사회의를 마치자마자 전군에 언제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진나라군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나절 후 왕전은 휘하의 장수들과 함께 지휘관 막사에서 옹나라군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본진으로 돌아온 정찰기병대의 보고를 듣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혹시 옹나라군이 슬금슬금 부대를 뒤로 물리면서 시간을 끌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불위는 예상대로 회전을 피할 생각이 모양이구나.”
그의 혼잣말을 듣고 곁에 있던 몽무가 왕전에게 물었다.
“왕 장군님. 드디어 바라시던 데로 역적 무리와 전면전을 벌이시게 되었군요. 반나절 안에 회전을 벌일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몽 기병대장. 아직은 전투를 벌일 때가 아니니 병사를 뒤로 물릴 준비를 해주시오.”
젊은 장군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진나라군 장수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몽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조금 더듬으면서 왕전에게 물었다.
“자······ 장군님! 어제까지만 해도 하루라도 빨리 옹나라군을 섬멸하고 합종군이 도착하기 전에 방어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정확하게는 ‘최대한 적은 손실만 입고 하루라도 빨리 옹나라군을 섬멸해야 한다.’고 말했었소. 역적 여불위를 따라 함양을 떠난 식객 중에는 부장으로서 한 사람을 다할 준수한 장수가 많았으니 개활지에서 우직하게 회전을 벌이면 우리 병사들도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을 거요.”
“하지만 이 근방은 20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몸을 숨길만한 울창한 숲이나 갈대밭이 없으니 정직하게 전면전을 벌이는 것 말고는 적군을 물리칠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함양을 떠나기 전부터 옹나라군이 제 발로 사지로 들어서도록 유인할 계책을 하나 세워두었소.”
“계책이라 하심은······?”
“함양에서 가져온 보급품 중에 2만 명 정도 되는 병사에게 지급할 수 있는 서융의 물건이 있소. 옹나라군이 이 근처에 도착하기 전에 덩치 큰 병사 2만 명을 선별해 서융의 전통복장과 병장기를 갖추게 한 후 본진에서 함양 방향 쪽으로 보낸 다음 진나라군이 나타나면 돌아오라고 전해주시오.”
“왕 장군님. 소장의 지혜가 부족하여 그런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서융이 보낸 지원군이 함양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옹나라군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요.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서융의 병사들이 우리군 진영에 속속 도착하는 모습을 보면 역적 여불위의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겠소?”
“아······! 적장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흐리는 계책이로군요!”
“그렇소. 여불위는 과거 안읍에서 조선과 위나라의 연합군과 싸울 때 조선 태자의 간계에 놀아난 후로는 더욱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 되었다고 들었소. 그러니 이 정도 공은 들여야 교활한 역적이 함정에 발을 들일 것이오. 아마 이틀 후면 옹나라군이 이곳에 도착할 테니 지금 바로 병사들에게 서융의 물건을 나눠주는 게 좋겠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 장군님.”
* * *
진나라군이 장군의 명에 따라 다가오는 적군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하는 동안 여불위가 이끄는 옹나라군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동쪽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나라의 군대가 북쪽에 흐르는 위수를 낀 평편한 강변에서 마주쳤을 때, 옹나라군 장수들은 진나라군 진영에 차례로 들어서는 서융의 옷과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수군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벌써 서융의 병사가 진나라군에 합류할 리가 없는데!”
“함양에 잠입해 있던 간자의 보고가 잘못됐었단 말인가?!”
장수들의 동요는 곧 병사들에게도 전해져 잇따른 승리로 기세등등했던 옹나라군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말았다.
여불위는 예상외의 사태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의 곁에서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노애에게 명령했다.
“노 아장. 기병대장에게 즉시 진나라군 진영에 정찰병을 보내서 적진에 합류하는 야만인의 수를 헤아려보라고 전하게.”
“아······ 알겠습니다. 여 상방님.”
노애는 부리나케 본대 우측의 위치한 기병대 쪽으로 달려가서 상방의 명을 전했고 옹나라군의 기병대장은 수백 기의 기병을 풀어 서융의 옷을 입고 진나라군 진영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는 병사의 수를 눈대중으로 센 다음 본진으로 돌아와 여불위에게 보고했다.
“여 상방님. 적진에 접근하면 적군이 활을 쏘아대는 통에 정확한 수를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만, 족히 2만 명쯤은 되어 보이는 서융의 병사가 진나라군 진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허······. 난감하게 됐군. 그럼 이대로 며칠만 시간을 끌면 점점 더 적군의 수가 불어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때 이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불위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입들 열었다.
“여 상방님. 정말로 적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중이라면 지금이라도 위수를 건너 도강 지점에 방책을 세우고 노궁수와 궁수를 배치해 진나라군이 함부로 옹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 장사. 정녕 그 방법밖에 없단 말인가?”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더 많은 서융의 지원군이 적장 왕전의 휘하에 들어가기 전에 진나라군 진영을 급습해 우리 군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승리를 거두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만 양군의 규모가 비슷하고 적장의 실력을 알 수 없으니 섣불리 총공세를 펼치는 건 너무 무모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선은 행동이 적장을 도발하면서 반응을 보는 편이 좋겠구먼.”
여불위는 즉시 노애에게 기병 1천 기를 맡겨서 진나라군의 장수들을 도발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노애는 처음 상방의 명을 받았을 때는 낯빛이 어두워졌다가 전투를 치를 필요가 없이 진나라군이 공격해올 낌새가 보이면 도망쳐도 좋다는 말을 듣고 의기양양하게 적진으로 달려가서 소리쳤다.
“애송이 영정의 무례한 신하와 백성들아! 어서 울타리 밖으로 기어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못하겠느냐?! 너희가 섬기는 어린 왕의 양아버지가 몸소 행차했는데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다니! 그게 대체 어느 나라의 법도란 말이냐?!”
그러자 많은 진나라의 장수가 망루 위에 올라 히죽히죽 웃으며 막말을 쏟아내는 노애를 바라보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저런 끓는 기름에 튀겨 죽일 놈을 봤나!”
“저 가짜 환관 놈이 이젠 조 태후와의 관계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그들 중 몽무는 노애의 외침을 듣자마자 불에 달군 쇠처럼 얼굴이 빨개지더니 지휘관 막사 안에서 혼자 책상 앞에 앉아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왕전에게 달려가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왕 동생! 노애 저 천하디천한 놈이 대왕을 능멸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장 기병을 풀어서 저놈을 잡아다가 거열형에 처하세!”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몽 형님.”
“동생! 대체 그때가 언제란 말인가! 저 역적 놈이 망언을 지껄이다가 목이 쉴 때까지 기다리실 생각은 아니겠지?!”
“오늘 밤에 역적의 무리를 무찌를 생각입니다.”
“오늘 밤······? 야습을 시도할 생각인 모양이군. 하지만 적군도 별다른 일이 없으면 야간 경계를 철저히 할 터인데.”
“야습을 시도하는 건 우리가 아닙니다. 한밤중에 옹나라군을 우리 숙영지 깊숙한 곳으로 유인할 수 있으면 적군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지요.”
“적을 우리 진영 안으로 유인한다고? 어떻게?”
“우리 진영에 일부러 불을 질러 서융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꾸미면 여불위도 미끼를 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흠······! 과연 그렇구먼! 분명 여불위는 속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적잖은 군수품을 고의로 태워버려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나? 그건 군법에 어긋나는 일일 텐데.”
“지금은 나라가 위급한 상황이니 낡은 법에 연연할 때가 아닙니다. 그래도 보급품 중에서 특히 귀한 물품이나 군량은 태워 먹으면 곤란하니 옹나라의 역적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은밀히 불을 지를 장소에서 먼 곳에 옮겨두는 편이 좋겠지요. 아, 그리고 숙영지 한가운데의 공터에는 미리 쇠침을 좀 뿌려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겠네. 당장 다른 장수들을 불러올 테니 어서 숙영지에서 불을 지를 부분을 정해주게.”
몽무는 왕전과의 대화를 마치고 지휘관 막사 밖으로 다시 나와서 다른 진나라군 장수들을 불러왔고 젊은 장군은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계책을 부하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후 그날의 해가 서쪽의 지평선 너머로 저물고 둥근달이 뜬 다음 약 한 시간이 지나자 진나라군 진영의 동쪽에서 큰 불길이 올라오면서 병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악! 불이야!”
“서융의 야만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