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왕전 vs 여불위 (1)
진왕 영정은 왕전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듣고 눈살을 조금 찌푸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여불위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그 역적은 비록 무관 출신이 아니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조선과 위나라의 연합군에 큰 패배를 당한 적이 있긴 하지만, 병법에 문외한은 아니다. 직접 병사를 이끌고 동주를 정복한 성과를 올린 적도 있는 자이지.”
“소장도 여불위를 얕잡아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폐하. 하지만 우리 진나라만큼은 아니라고는 하나 옹나라가 처한 상황도 그리 녹록지는 않으니 역적 영성기와 여불위의 마음도 적잖이 조급할 겁니다. 그 점을 이용해 거부하기 어려운 미끼를 던지면 큰 손실 없이 옹나라군을 물리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불위의 마음이 조급할 거라고? 지금 옹나라에는 역적 영성기와 여불위의 통치에 불만을 드러내는 제후나 대신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지금이야 그렇지만, 옹나라의 역적들은 우리 진나라가 합종군에게 굴복하고 나면 다음은 조선을 중심으로 뭉친 다섯 나라의 칼끝이 자신의 목을 겨눌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겁니다. 조선의 태자와 여불위의 악연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래서 옹나라는 다섯 나라와 동맹을 맺고 합종책에 끼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
“합종책에 합류한 다섯 나라의 왕과 재상 중에는 이번 전쟁이 거의 끝나간다고 여기는 자가 많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옹나라가 뒤늦게 다섯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면 합종군이 함양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진나라 정벌에 도움이 됨을 입증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서 여불위의 마음이 조급할 거라고 말한 건가······. 이른 시일 내에 우리 진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앙숙인 조선의 태자도 옹나라가 합종책에 합류하는 데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래서 소장은 우리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미끼로 삼아 여불위라는 대어를 낚아보려 합니다.”
“흠······. 확실히 여불위가 우리 군과의 회전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함양을 지킬 병사가 남아나질 않으면 옹나라는 합종책에 참여할 명분이 생기겠지.”
진왕 영정은 그렇게 말하더니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화파 제후와 대신 몇몇이 그런 어린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간곡한 목소리로 간언(諫言)을 올렸다.
“폐하! 저 무모한 청년의 허황된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시옵소서! 만약 단 한 번의 전투로 남은 병사 20만 명까지 잃어버리면 진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집주인이 손에 무기를 쥐고 있어야 마당까지 들어온 도적 떼를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돌려보낼 수 있는 법입니다! 겨울이 올 때까지 적군의 공세로부터 함양성을 지켜낼 수 있는 병사가 남아있어야 다섯 나라와 평화협정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린 왕은 그들의 호소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경들이 말대로 합종군과 평화협정을 맺어서 종묘사직을 보전해봤자 창평군의 말처럼 우리 진나라는 십중팔구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서 동쪽과 남쪽, 그리고 북쪽에 국경을 맞댄 적대국을 두게 될 거요. 게다가 기껏 동맹을 맺은 서융의 부족들도 짐이 약속한 땅을 이미 조선, 조, 위, 제, 한 다섯 나라에 빼앗겨 못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를 적대하게 될 거고 말이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선 망국을 면해야 과거 월왕 구천이 오왕 합려에게 그러했듯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후일을 도모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폐하!”
“경들은 정말로 우리 진나라가 한나라보다도 못한 약소국으로 전락한 채로 사방에 적을 두고도 재기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짐이 보기에는 왕 아장보다 경들의 제안이 더 무모하게 들리는구려!”
어린 왕이 조용하지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꾸짖자 주화파 제후와 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진왕 영정은 노기가 어린 눈빛으로 신하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더는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자가 없음을 확인한 다음 다시 왕전에게 말했다.
“아장 왕전은 들으라. 경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병부와 함께 병사 20만 명을 맡기겠다. 이제 경의 어깨에 진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반드시 역적 여불위와 그자를 따르는 반군을 물리치도록 하라.”
“삼가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 * *
왕전은 장군으로 승진한 후 가장 먼저 아직 진나라 조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국의 모든 고을에 남은 병력을 모두 함양으로 보내라는 명을 전했다.
진나라는 평소 엄격한 법률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다져놨기에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어명을 받은 현령과 현감은 대부분 왕이 보낸 전령이 도착하자마자 자기 고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비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사를 함양에 보냈다.
그후 함양에 지방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속속 모여드는 사이 왕전은 그동안 눈여겨봐 온 장수에게 사람을 보내서 부장으로 발탁했는데 그중에는 신평군 염파와 방난이 이끄는 조나라군을 상대하다가 전사한 장군 몽오의 아들 몽무도 있었다.
몽무는 평소 왕전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지만, 자기와 마찬가지로 아장 자리에 있었던데다 나이가 어린 그가 직속상관이 되는 것이 썩 탐탁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이 직접 임명한 장군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에 몽무는 함양 외곽의 군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법을 펼치는 훈련을 받는 병사들로 가득한 연병장을 지나 지휘관 막사에 들어서면서 왕전에게 인사했다.
“아장 몽무가 왕 장군님을 뵙습니다.”
“몽형! 오랜만입니다. 제가 함곡관에 가 있는 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이제 장군님께서는 소장의 상관이시니 존대를 삼가셔야 군율이 바로 설 겁니다.”
“몽형. 그러지 말고 우리 두 사람밖에 없는 자리이니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소장은 장군을 보좌하는 하급장교인 아장입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들였다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큰 실수를 할까 봐 두렵습니다.”
“아, 제가 보낸 병사가 말씀을 안 드린 모양이군요. 오늘부로 몽형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할 생각입니다.”
“기병대장?! 실전 경험이라곤 장안에서의 패전뿐인 아장이 벌써 기병대장 자리에 앉히셔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도 실전 경험이라고는 함곡관에서의 패전이 전부인 아장이었습니다만.”
“허허······. 그러고 보니 그렇구먼. 대체 대왕과 상방께서 뭘 보고 자네를 장군 자리에 앉히신 거지? 그야 자네가 병법에 밝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책으로만 배울 수 있을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닐 터인데.”
“이제야 말씀을 놓아주시는군요. 역시 둘만 있을 때는 이러는 편이 편하네요. 몽형. 대왕과 창평군께서도 우리가 너무도 믿음직스러워서 높은 자리에 앉히신 건 아닐 겁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조선의 농간 때문에 유능한 장수가 너무 많이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냐 아버님도 그렇게 돌아가셨고 말일세.”
“역적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방이었으니 진나라의 내부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자가 사실상 진나라를 통치할 때 우리 두 사람은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죠. 대왕과 창평군께서는 우리의 재능이 방심한 여불위가 드러낸 빈틈을 찌르길 바라셔서 과감한 조처를 하신 겁니다.”
“과연 내가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코앞에서 위기에 빠지신 부모조차 구하지 못한 자인데······.”
“여전히 그 일을 자책하시는군요. 늙은 호랑이 염파와 병법가 방난이 이끄는 군대가 동시에 덤비면 무안군 백기가 살아 돌아와도 막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이제는 과거의 일로 후회하시기보다는 부친의 원수를 갚는 일에만 집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무예를 단련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원수를 갚다니? 여불위는 분명 역적이지만, 돌아가신 아버님께 해코지를 한 적은 없는데?”
“아직 합종군의 소식을 접하지 못하셨습니까? 조나라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이 바로 몽형의 원수인 신평군 염파입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제가 몽형의 아버님 일로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몽형. 우선 하루라도 빨리 여불위를 꺾고 제때 현산의 산길에 복병을 배치해야 염파에게 복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몽무는 왕전의 말을 듣고 커다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늘이 아버님의 복수를 할 기회를 주셨는데 염파 그 노인네가 편안한 표정으로 늙어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알겠네. 기꺼이 동생의 검이 되어 진나라의 적을 무찌르겠네.”
* * *
기원전 244년 6월의 첫날, 모든 준비를 마친 왕전은 위수 이남의 진나라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는 옹나라군을 공격하기 위해 드디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떠났다.
그러자 함양 일대에 잠입해 있던 옹나라의 세작들은 즉시 그 사실을 옹나라군 진영에 보고했고 여불위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진나라 북부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휘하의 모든 부대를 본진으로 불러들인 다음 군사회의를 열었다.
모든 참석자가 지휘관 막사에 모이자 여불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 중인데 갑자기 본진으로 귀환하라는 명을 받아서 의아할 것이오. 다름 아니라 어제저녁에 도착한 세작이 보고하길 함양을 떠난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이곳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하오.”
상방의 말을 들은 옹나라군 장수들은 하나같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력이 쇠한 진나라가 병사 20만 명을 함양 근처에 집결시켰다는 건 언제 합종군이 침략해올지 모르는 함곡관 근처의 방위를 일시적으로나마 포기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방의 참모로서 옹나라군에 종군한 이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혼자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여불위에게 말했다.
“여 상방님! 하늘이 대왕 폐하와 상방님을 도우시려는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군과 비슷한 규모의 적군이 고작 사흘 거리에서 일전을 각오하고 다가오고 있는데 다행이라니?”
“상방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번 원정의 가장 큰 목표는 조선을 중심으로 뭉친 다섯 나라가 우리 옹나라가 합종책에 합류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할 계기와 명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진나라군이 회전을 걸어와도 곧 싸울 것처럼 행동하다가 병사를 물리길 반복하면서 시간을 끌면 합종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현산의 험한 산길을 통과해 병사가 거의 없는 함양을 순식간에 함락시키겠지요. 그러고 나면 우리 옹나라군이 진나라군의 주의를 끌어서 합종군이 편안하게 진나라를 정벌했다면서 생색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사에게 말했다.
“이 장사! 우리는 진나라 원정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적군이 나타났다고 꼬리를 말고 도망치라고 말씀하시는 거요? 지금이야말로 겁 없이 함양성에서”
이사는 그 장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간신히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노애 아장······. 소신은 그저 우리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조 태후는 옹왕 영성기와 여불위가 진나라 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인맥과 영향력을 총동원해 애인인 노애를 여불위를 보좌하는 아장으로 임명했다.
어차피 아들이 다스리는 진나라와 척을 진 이상 노애가 공을 세운 무관이 되기만 하면 천한 출신인 그와 정식으로 혼인해도 큰 흠이 되지 않을 거로 여겼기 때문이다.
노애는 처음 전장에 나선 날에는 겁을 집어먹고 몸을 사렸지만, 여불위가 가장 안전한 임무만을 맡긴 덕에 몇 번 작은 승리를 거두더니 점점 간이 커져서 지금은 자신을 대단한 무장으로 여기고 있었다.
여불위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사에게 대답했다.
“이 장사. 그대의 말이 전략적으로 옳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노 아장의 말대로 전면전을 벌이세나.”
“상방님! 그러다가 진나라군에게 패배하기라도 하면 옹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말 겁니다!”
“자네의 제안을 따르면 분명 손쉽게 조선을 필두로 한 다섯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함양을 비롯한 위수 이남의 영토는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될 걸세.”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큽니다! 상방님! 우리 옹나라도 북방의 흉노를 막을 병력까지 끌어와서 진나라 정벌을 진행 중임을 이지 마시옵소서!”
“이 여불위가 그 사실을 모르겠나? 하지만 다행히도 진나라군을 지휘하는 적장은 갓 스무 살이 넘은 왕전이라는 새파란 애송이라고 하더군. 병법을 책으로 배운 조나라의 졸장 조괄 같은 부류 말일세. 진나라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분명 도박이지만, 승률이 높고 보상도 큰 도박이 될 거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