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초나라의 굴복
압도인 전력우세를 자랑하는 합종군 기병대에게 맹공을 당한 초나라군 결사대는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한부는 앞서 간 아군 기병대가 이젠 초나라군 본대의 측면을 습격해 적진을 혼란에 빠트리는 모습을 보고 합종군 보병대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아군 기병대가 적군 본대의 발목을 잡았다! 보병대도 행군속도를 높여서 초나라의 배신자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말을 탄 고조선군의 기병들이 다섯 개 나라의 부대에 태자의 명을 전하자 39만 보병대가 초나라군 본대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그렇게 수십 분 정도 추격전을 벌인 끝에 합종군은 극히 미미한 손실만을 입고 초나라의 15만 대군을 완벽하게 격파해 버렸고 춘신군을 포함한 수많은 장수를 붙잡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간이 감옥에 갇혔지만, 한부는 조만간 춘신군을 써먹을 생각이었기에 그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서 춘신군을 포박하거나 옥에 가두지 않았다.
대신 한부는 그를 널찍한 천막에 가두고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팽배수 중에서도 정예병 수십 명을 풀어 천막 주변을 철저히 지키도록 명령했다.
전투가 끝난 후 한부는 궁지에 몰린 초나라를 어떻게 처분할지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위나라 왕과 자국의 왕에게 병부를 받은 다른 나라의 장군들을 지휘관 막사로 불렀다.
회의 참석자 전원이 자리에 앉자 한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섯 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와 손을 잡고 우리를 배신한 초나라의 음모를 막아냈으니 마음 같아서는 이를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축배를 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위왕 위무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태자의 말씀이 옳소. 초나라는 오늘 전투에서 분명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중원에서 진나라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니 조금만 숨돌릴 틈을 줘도 다시 그만큼의 병사를 모아 언제 또 우리의 등 뒤에 칼을 꽂으려 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오.”
위나라 왕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자 가면을 쓴 상장군 무명이 한부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전하. 이 늙은이에게 병사 20만 명만 맡겨 주시면 석 달 만에 거양을 점령하고 초나라 왕을 붙잡아오겠습니다.”
“상장군의 실력은 잘 알고 있지만, 되도록 진나라에게 숨돌릴 틈을 주고 싶지 않구려. 우리가 거양성을 치거나 병력을 둘로 나누어서 진나라와 초나라를 동시에 공격하느라 진나라 원정이 더디 진행되면 진나라 왕실은 그 사이에 더 많은 병사를 징집하거나 일시적으로 옹나라와 손을 잡고 우리에게 대항할지도 모르오.”
한부의 대답에 이번엔 장군 이목이 그에게 물었다.
“전하. 그러시다면 어떻게 초나라를 굴복시킬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우선 지금 데리고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거양을 포위한 다음 초나라 왕에게 항복을 받아내면 어떻겠소? 그러면 진나라에게 시간을 덜 주면서도 초나라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을 듯하오.”
그 후 한부가 초나라에 항복을 받아내면서 걸 조건을 설명하자, 위나라 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 조건을 초나라 왕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더는 초나라의 위협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지만 묘족은 하나같이 다혈질이라 과연 항복할지 결사항전을 택할지는 일단 거양을 포위해봐야 알 수 있을 듯 하오.”
“거양에 가는 길에 본태자가 춘신군에게 초나라 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힘을 보태라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비록 춘신군은 이번 전쟁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지만, 그동안 현명한 군자라는 명성을 얻어온 자이니 항복과 결사항전 중 어느 쪽이 초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지 금방 이해할 겁니다.”
“짐도 그 일을 돕겠소. 짐과 공, 그리고 춘신군은 모두 세상 사람들에게 전국오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니 분명 서로 말이 통할 것이오.”
위나라 왕의 말을 마지막으로 합종군의 군사회의가 끝나자 한부는 그와 함께 한 천막에 갇혀있는 춘신군을 찾아갔다.
춘신군은 중무장한 호위병 여러 명과 함께 천막에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차림새와 범상치 않은 품격을 보니 두 분이 위왕 폐하와 조선의 태자이시군요. 이제야 이 못난 자의 목숨을 거두러 오시는 모양이십니다.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만 주시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할 테니 부디 망나니가 더러운 칼날로 이 몸의 목을 내리치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 말에 한부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나라의 재상이 위기에 몰린 주군보다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세상을 떠나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오. 과연 역사가 그런 춘신군을 어떻게 평가하겠소?”
“그럼 어쩌란 말이오? 부족한 지혜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었으니 무슨 낯으로 살아서 대왕의 용안을 뵈란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위왕 위무기가 의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춘신군. 어찌하여 우리 다섯 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킬 거라고 속단하고 있소?”
“제가 합종군의 일원이었어도 이대로 우리 초나라를 배후에 내버려 두고 진나라 원정을 재개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초나라를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릴 생각은 없소.”
“후······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시겠다는 거군요. 우리 초나라에 뭘 원하시는지요?”
이번에는 한부가 위나라 왕 대신 춘신군에게 대답했다.
“우리 조선에 초나라의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1백 리 안에 있는 모든 영토를 할양하고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위나라에 성 일흔 개, 그리고 제나라에 성 서른 개를 넘겨주시오.”
“뭐라고요!!”
춘신군은 고조선 태자의 말을 듣자마자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그의 요구를 수용하면 초나라는 많은 영토와 백성을 잃게 됨은 물론이고 바다와 접하지 못한 내륙국이 되어 해상무역과 어업, 염전에서 얻어오던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부의 요구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 놀라시기엔 이릅니다. 한가지 요구사항이 더 있으니 말입니다.”
“큭······. 말씀해 보시오. 조선의 태자여.”
“합종책에 참여한 다섯 나라는 초나라에게 멸망한 노나라와 월나라의 왕족을 찾아내서 옛 영토를 돌려주어 다시 두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로 합의했소. 초나라가 이 두 가지 요구를 들어준다면 우리도 기꺼이 군대를 물릴 것이오.”
“후······. 초나라의 대왕께서는 외국의 협박에 그리 쉽게 굴할 분이 아니오! 분명 굴욕적인 항복을 하시느니 끝까지 항전하시다가 거양성의 궁궐에 불을 지르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실 분이란 말입니다!”
“그야 우리가 보낸 사절이 이런 요구를 하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공께서 주군을 설득해 보시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소?”
“이 춘신군이 대왕께 그런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권할 것 같습니까?!”
“지금쯤이면 공을 감시하는 부장에게 함곡관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들으셨겠지요.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다가 온 나라가 함곡관처럼 불길에 휩싸여 묘족의 역사가 단절되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오. 비록 국력이 약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초나라의 종묘사직을 지키는 쪽이 낫지 않겠소?”
“하······. 대왕께서 강화조약을 거절하시면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끔찍한 협박이군요.”
위나라 왕은 춘신군의 눈빛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춘신군. 우리 주나라 봉국의 후예 중에는 묘족을 혐오하는 자들이 많은 걸 알고 있겠지요. 묘족
백성들이 평온하게 살려면 천하에 묘족
출신 왕가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오. 군주 한 명의 자존심 때문에 불쌍하고 어리석은 묘족
백성들이 고향을 잃고 타지에서 핍박받으며 살게할 생각이오?”
그 말이 결정타가 되어 춘신군의 의지를 꺽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심장을 비수로 도려내는 듯이 고통스럽군요. 알겠습니다. 한번 대왕께 두 분의 말씀을 전해드려 보지요. 하지만 결과가 좋을 거라는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 *
한부와 위왕 위무기가 춘신군을 설득한 지 약 열흘이 지나자 초나라 땅에 들어선 합종군의 43만 대군은 겨우 5만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 거양성을 겹겹이 둘러싸서 포위했다.
그런 다음 한부는 춘신군을 석방해 거양성으로 돌려보내 초나라 왕을 설득해 조선을 필두로 한 다섯 나라와 강화 조약을 맺도록 설득하도록 했다.
초나라 왕은 처음엔 춘신군의 말을 듣고 격노하며 호통쳤지만, 결국 초나라가 완전히 망하면 중원 전역으로 흩어져서 모진 핍박을 받을 묘족
백성의 안위를 걱정해 다섯 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원 대륙에 식민지를 얻게 되었다.
한부는 고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까 봐 본토와 연결되지 않은 영토를 얻는 것을 늘 꺼려왔지만, 초나라에게 빼앗은 영토는 우방국인 제나라와 노나라를 지나면 하북의 군대와 물자를 쉽게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덜한 지역이었다.
이제 고조선은 제나라와 더불어 중원 대륙에서 유일하게 바다에 접한 나라가 된 것이다.
한편 함양에 있는 진왕 영정과 창평군은 초나라가 잠시나마 합종군의 이목을 끌어준 덕분에 얻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창평군은 초나라가 합종군에게 굴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입궐하여 어린 왕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 폐하. 초나라가······.”
“이미 들었소. 창평군. 전에는 함곡관을 하루 만에 빼앗더니 이제는 그 큰 초나라를 불과 보름도 안 되는 기간동안에 굴복시키다니······. 조선의 태자는 정말 귀신같은 자로구려.”
“폐하. 지금이라도 옹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선은 다툼을 멈추고 함곡관을 넘어오는 외세와 맞서 싸우자고 청해야 합니다.”
“짐도 그러고 싶지만, 여불위는 몰라도 역적 여영기는 치졸한 자라 절대 그럴 마음이 없을 것이오. 짐의 모친이신 조 태후께서도······. 아마 동맹을 거절하실 것 같고 말이오.”
“하오나 폐하. 우리 진나라에 남은 병력만으로는 50만에 가까운 합종군을 막아내기 어렵사옵니다. 이제는 쓸만한 장수라고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왕전과 몽무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진왕 영정은 그 말을 듣고 깊이 탄식하다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져서 서융족의 모든 부족을 동맹으로 삼읍시다.”
“폐하. 서융족이 우리 진나라와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나 중원의 대세가 이미 합종군 쪽으로 크게 기운 만큼 어지간한 보상으로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옛 촉나라 땅을 전부 서융족에게 할양하겠다고 하면 야만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소?”
“폐하! 그 비옥하고 광활한 땅을 정말로 다 내주실 생각이십니까?!”
“창평군. 서융족은 거칠고 호전적인 족속이지만, 하나로 뭉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소. 잠시 촉 땅을 서융족에게 빌려줬다가 합종군을 물리치고 나서 기회를 엿봐 군대를 보내 되찾으면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