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춘신군의 오판
함곡관의 성문이 부서지자 황하를 건넌 고조선군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관내 깊숙한 곳으로는 진입하지 마라! 대신 모든 성문을 포위하고 불이 붙지 않은 성벽 위를 먼저 차지하는 거다!”
고조선군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에 따라 파쇄추를 뒤로 물린 다음 방패와 무기를 손에 들고 관문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통해 거의 비어버리다시피 한 함곡관의 성벽 위를 점거했다.
그로부터 약 반나절이 지나자 함곡관 관내의 건물은 거의 다 타버리고 말았다.
워낙 관내 이곳저곳에 화염에 휩싸인 열기구가 떨어진 바람에 불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불길이 잡힌 관내 구석의 거리에 남아있던 진나라군 병사들의 눈에 비친 것이라고는 천하제일 험관이라는 명색이 무색할 정도로 잿더미가 돼버린 함곡관의 풍경과 성벽 위에서 쇠뇌와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고 자기를 겨누고 있는 합종군 병사들뿐이었다.
진나라의 재상 창문군은 결국 1만 명도 안 남은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성문 밖으로 나와 한부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합봉군의 맹주인 조선의 태자여. 더는 저항하지 않을 테니 포로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 말에 조나라의 상방 신평군 염파가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호통쳤다.
“어림없는 소리! 40만 명이나 되는 우리 조나라의 병사들도 장평에서 인간 백정 백기에게 같은 말을 했었을 터이다! 그런데 너희 진나라인들은 우리나라의 장정들에게 무슨 짓을 했지?!”
장군 이목도 염파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부디 진나라의 융적들을 참수해 장평에서 죽은 수십만 조나라 장정의 넋을 달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상장군 무명은 그 말을 듣고 가면 아래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왕 위무기는 진나라군 포로를 학살하는 데 반대했다.
“우리 합종군이 백기가 장평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기를 버린 포로를 무참히 죽인다는 소문이 함곡관 너머에 퍼지면 진나라의 백성 중에는 합종군에게 항복하는 대신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는 자가 늘어날 거요. 반대로 우리가 포로에게 관대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불필요한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쉽게 함양으로 진격할 수 있겠지요.”
조나라 출신이 아닌 다른 나라의 장군들의 의견도 대체로 위나라 왕과 같았다.
한부는 양측의 의견을 듣고 잠시 고만하다가 창문군에게 물었다.
“창문군은 본태자의 질문에 대답하시오. 함곡관을 지키던 진나라군 병사는 전부 몇 명이었소?”
“약 20만 명이었습니다. 전하.”
“지금 성문 밖으로 나와서 우리에게 투항한 병사는 1만 명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나머지 진나라군 병사는 전부 탈영한 거요?”
“대부분 도깨비불에 타죽거나 연기를 마시고 죽거나 겁에 질린 소 떼처럼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아군에게 밟혀 죽었습니다. 현산의 산길로 탈영한 자는 많아 봐야 5만을 넘지 않을 겁니다. 지금 관내는······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지요······.”
창문군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리자 한부는 염파와 이목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신평군. 그리고 이목 장군. 당장 장평에서 갱살당한 조나라 장정의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으나, 우선은 함곡관 안의 상황을 둘러보고 포로의 처우를 결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소만.”
고집 세기로 유명한 두 장수도 합종군의 고조선 태자의 권유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 늙은이는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울 틈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소장도 전하와 신평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한부는 두 조나라 출신 장군이 자기 의견에 동의한 후 합종군의 장수와 병사 전원을 데리고 함곡관의 안으로 들어갔다.
대들보와 반석만 남기고 전소해버린 앙상한 건물과 거리 곳곳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불에 그슬린 시체들.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광경에 한부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후······. 생지옥이 따로 없네. 화공에 죽는 병사보다는 탈영병이 더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진나라 쪽으로 이어진 길이 좁은 산길 하나밖에 없어서 예상보다 사상자가 많이 나왔구나······.’
이목은 함곡관의 참상을 바라보다가 견디기 힘든지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잿더미에서 눈길을 돌리면서 신평군 염파에게 물었다.
“허······. 장평에서의 참상도 이보다 끔찍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신평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조선에 항복한 줏대 없는 항장의 견해라고 치부해 버리실 수 있겠으나, 소장의 생각에는 진나라 백성은 이미 장평에서의 죗값을 치른 듯합니다.”
“본인도 이 장군의 견해에 동의하오. 조선의 태자시여. 진나라군 포로를 참수하자는 의견을 철회하겠습니다. 본인이 몽오와 함께 차가운 강물에 수장시킨 진나라인도 적지 않으니 이 이상 진나라군 백성에게 전략적으로 불필요한 보복을 하자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한부는 그런 노장의 말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신평군. 그럼 함곡관에서 잡은 포로는 무기를 빼앗고 모두 풀어주겠소.”
“포로를 노비로 삼지는 않으실 생각입니까?”
“아직 초나라군이 꽁무니에 붙어 있는 상황에서는 포로를 데리고 진군하기 어려운 데다 함곡관의 곡식 창고가 완전히 불타 버려서 포로를 먹일 군량을 당장 충당하기가 쉽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진나라군 포로를 풀어주면 고향에 돌아가 비염귀의 위력과 함곡관의 참상을 퍼트려 남은 진나라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겠지요.”
“과연······. 말씀대로만 된다면 피 한 방울 화살 하나 허비하지 않고 함양까지 진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장평에서의 원한은 함양의 성벽 안에 숨어있는 진나라 왕에게 풀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그리고 그 전에 합종책에 참여한 모든 나라를 배신한 초나라를 벌합시다.”
* * *
합종군이 풀어준 포로와 패잔병들은 들불처럼 진나라 전역으로 도망치면서 합종군이 함곡관을 단 하루 만에 점령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한부가 진나라군 포로들이 함곡관에서 동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서진 중인 초나라군은 함곡관이 벌써 함락됐다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춘신군은 서쪽을 정찰하고 돌아온 기병대의 보고를 듣고 들뜬 목소리로 휘하의 장수들에게 말했다.
“모두 기뻐하시오! 방금 돌아온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함곡관 쪽에서 반나절 동안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자욱한 연기가 올라왔다고 사라졌다고 하오!”
그 말에 초나라군 장수 중 한 명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방님. 어쩌면 합종군이 함곡관에 불을 질러서 연기가 올라온 것일 수도 있는데 어찌 그리 기뻐하십니까?”
“장군. 함곡관은 천혜의 요새라 관문 밖에서 안에 불을 지를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하오. 만에 하나 합종군이 관내의 건물 중 하나에 불을 질렀다 하더라도 산불이 난 것처럼 자욱한 연기가 치솟을 리 있겠소?”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진나라군이 합종군 진영에 불을 지른 모양입니다!”
“본인의 생각도 그렇소. 그렇다면 지금 진나라군은 십중팔구 함곡관에서 몰려나와 간신히 화마를 피한 합종군의 패잔병을 추격하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도 행군을 서둘러 진나라군과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합종군을 포위해야 하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상방님. 당장 전군에 행군 속도를 올리라는 명을 전하겠습니다.”
그 후 초나라군 병사들은 반나절 동안 언제든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가지고 있는 갑옷과 무기를 모두 장비한 채로 서쪽을 향해 강행군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과 마주친 것은 패잔병이 아닌 약 43만 명이나 되는 적군이었다.
한부가 수성의 달인 이목에게 고조선군 다섯 군단을 맡겨 함곡관을 지키게 한 다음 남은 병력을 모두 이끌고 서진 중인 초나라군을 요격하러 온 것이다.
춘신군은 지평선 너머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군을 보자 등골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럼 그 연기는 대체 뭐였던 거지? 설마 하루 이틀 만에 함곡관이 점령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조선의 태자가 우리를 꾀어내려고 일부러 큰불을 지른 건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구나!”
많은 초나라군 장수도 그와 같은 의문을 품었지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함곡관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내는 것이 아닌, 거의 세배나 많은 적군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
춘신군은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아둔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즉시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전군 수레와 우마차를 버리고 퇴각하라! 한시라도 빨리 초나라 땅으로 퇴각해야 한다!”
지금 양군이 마주친 곳은 한나라의 영토였지만, 강행군하면 반나절 만에 초나라 땅에 들어설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한부는 제 발로 사지(死地)에 걸어들어온 배신자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기병대를 내보내 초나라군의 발을 묶어라!”
고조선 태자의 외치자 그의 곁에 있는 병사가 손에 들고 있는 뿔나팔을 입에 물고 힘차게 불었다.
- 뿌우우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신평군 염파가 이끄는 호복(胡服)을 입은 조나라군의 궁기병대 1만기와 군단장 사마근이 이끄는 고조선군 궁기병대 1만기, 기병대장 석이 지휘하는 편곤을 든 개마무사 1만기,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나라의 궁기병 약 1만기가 도망치는 초나라군의 후방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 두두두두!
4만기가 넘는 기병이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자 춘신군은 급히 최후방의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전령을 보내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는 전멸을 면치 못한다! 보병 4만 명과 궁병 5천 명, 그리고 궁기병 7천 기를 남겨서 나머지 병사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라!”
후방의 장수는 어쩔 수 없이 상방의 명을 따라 후방에 남아 결사대를 지휘했다.
“신호가 떨어지면 정면에서 달려오는 적 기병대에 일제히 활을 발사해라!”
후방의 초나라군 궁수와 궁기병들은 맹수 무리처럼 몰려오는 개마무사대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재빨리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발사!”
초나라군 장수가 다시 외치자 1만 개가 넘는 화살이 초나군 진영을 떠나 가로변이 긴 직사각형 진형을 유지하며 달려오는 개마무사대를 향해 날아왔다.
석은 큰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방패를 들어라!”
그 명령에 따라 개마무사들이 작은 원형 방패를 들어 투구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을 가리자마자 그들의 머리 위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려 경번갑과 마갑을 때렸다.
- 팅! 티딩! 팅! 팅!
연철로 만든 조잡한 화살촉이 강철 갑옷을 뚫지 못하고 요란한 금속음을 내면서 튕겨 나가버리자 기세가 오른 개마무사대는더욱 맹렬히 돌격해 뒷걸음질치는 초나라군 창병의 머리를 향해 편곤을 휘둘렀다.
- 퍼억!
투박한 편곤의 쇠뭉치가 한번 흔들릴 때마다 초나라군 병사들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얼굴과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개마무사대가 적진을 분쇄하는 동안 합종군의 궁기병대는 수적으로 열세인 초나라군의 궁기병대를 쫓아낸 후 무방비한 적 보병대를 포위하고 빙글빙글 돌면서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초나라군 병사들은 마치 궁지에 몰린 사냥감처럼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하나둘 쓰러지는 전우를 보고 겁에 질려 무기를 손에서 놓으면서 항복했다.
“으아아아! 항복하겠습니다! 쏘지 마세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