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배신과 응징
고조선을 필두로 한 다섯 나라의 군대는 잿더미가 된 낙양을 등 뒤에 남겨두고 황하를 따라 북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나라군 정찰 부대는 48만 명이나 되는 적군이 함곡관으로 진격해 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함양의 궁궐에 그 사실을 알렸고 진왕 영정은 창평군을 불러서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어명을 내렸다.
“창평군. 드디어 진나라와 경의 조국이 함께 공동의 적과 싸워야 할 때가 됐소. 합종군이 함곡관을 완전히 포위하기 전에 어서 초나라 왕에게 전령을 보내 제나라와 조선을 공격하라고 전하시오.”
“폐하.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전령을 함양에서 가장 날쌔고 힘 좋은 말에 태워서 거양으로 가라고 지시하고 입궐하는 길입니다.”
“역시 일 처리가 빠르구려. 이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좋은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그후 함양의 성문을 나선 진나라의 전령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 닷새 만에 거양의 궁궐에 도착해 초나라 왕에게 창평군이 준 서신을 전했다.
초왕 웅원은 그 서신을 읽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알현실에 모여있는 모든 장수와 대신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우리 초나라가 장왕께서 천하를 호령하시던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중원의 패자가 될 때가 왔다! 상방 춘신군은 짐의 곁으로 오너라!”
춘신군이 왕에게서 10보 떨어져 있는 곳까지 다가오자 왕은 곁에 있는 내관에게 병부를 건네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병부와 20만 병사의 지휘권을 경에게 맡기겠노라. 다른 장수들과 힘을 합쳐 올해가 가기 전에 정예병이 원정을 떠나고 없는 제나라를 정복하고 하북에서 조선의 세력을 몰아내길 바란다.”
“삼가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춘신군은 내관이 가져다준 병부를 두 손으로 받은 후 미리 징집해 둔 20만 대군을 이끌고 거양성을 나섰다.
그러자 거양 시내 곳곳에 잠입해있던 고조선 암부의 요원들은 즉각 그 사실을 계성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들의 수장에게 알렸고 계는 잠입 요원이 보낸 서신을 읽고 나서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예정보다 거의 5만 명이나 많은 초나라군이 함곡관 방향이 아니라 북동쪽으로 진군하고 있단 말이지······. 이번에도 태자 전하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구나! 어서 봉화를 올려서 대만 왕국의 수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수장님!”
수장의 지시를 받은 암부의 요원들은 즉시 계성 외곽의 언덕 위에 마련해둔 봉화로 달려가서 마른 장작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승천하는 용을 닮은 굵고 긴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자 계의 동쪽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봉화가 잇달아 연기를 뿜었고 하북의 동부 항구 도시에서 정박 중이던 대만 왕국 수군의 전사장은 그 모습을 보고 전 함대에 출진 명령을 내렸다.
“서쪽에서 올라오는 저 연기를 보라! 우리의 조상을 바다로 몰아냈었던 초나라의 묘족이 이번에는 은인의 나라 조선의 등 뒤에 칼을 겨누었다! 바다와 파도의 자손들이여! 모두 도끼와 창을 들고 남쪽을 배를 몰아라! 초나라의 해안을 불바다로 만들어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자!”
전사장의 연설에 고무된 폴리네시아인 전사들은 무기를 높이 들고 우레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긴 카누 두 척 위에 갑판 역할을 하는 널빤지를 올려서 만든 전함에 올라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조상의 원수를 갚자! 은인의 나라에 은혜를 갚자!”
곧 폴리네시아인 전사 7만 명을 태운 크고 작은 전함 약 3,500여 척이 삼각돛을 펼치고 먹이를 쫓는 돌고래처럼 무리 지어서 남쪽 바다로 나아갔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후 대만 왕국의 함대는 드디어 초나라의 최북단이자 하북 지역의 남동부 해안가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을 급습했다.
그러자 그 마을에 사는 초나라 백성들이 항구를 향해 새까맣게 몰려오는 카누 떼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아악!”
“도깨비다! 갈색 피부 바다 도깨비들이 마을을 공격한다!”
대만 왕국의 폴리네이사인 전사들은 마치 중세의 바이킹처럼 해안가에 카누를 대고 강철로 만든 손도끼와 길이 1.5m 정도의 짧은 창을 들고 밀물처럼 마을로 들이닥쳤다.
“저항하는 자는 죽이고 도망치는 놈은 내버려 둬라!”
“빼앗을 만한 건 전부 빼앗고 마을은 불태워버려!”
인구 5백 명 정도의 작은 어촌은 대만 왕국의 전사들이 상륙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철저하게 약탈당한 다음 불길에 휩싸였고 살아남은 마을 주민들은 혼비백산하면서 내륙의 관청으로 도망가서 현감을 만나 외적이 쳐들어왔음을 알렸다.
“으흐흐흑! 현감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야만인 무리가 저희 마을에 들이닥쳐서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현감님! 그놈들을 물리쳐서 저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현감은 맨 처음 관청에 도착한 어민들에게 하소연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다른 마을에서도 피난민 수백 명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급히 말을 탈 줄 아는 병사를 부른 다음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수만 명이나 되는 야만인 해적이 날뛰고 있다면 우리 현에 있는 병사만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 마침 춘신군께서 부리는 제나라 원정군이 가까운 곳을 지나고 있다 하니 서둘러 지원을 요청하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현감님!”
현감의 명을 받은 기병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춘신군을 찾아가서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벽촌의 기사 장읍이 상방이신 춘신군을 뵙습니다! 현재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 해적 떼가 작고 날쌘 배를 타고 몰려다니면서 하북 남부의 여러 해안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일을 왜 내게 보고 하는 거지? 제나라의 수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해적의 습격 정도는 각 고을을 지키는 현감이 알아서 막아야 함을 모르느냐?”
“그게······. 소인도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만, 해적 무리의 규모가 적어도 수만이고 배의 숫자도 수천 척이나 돼서 현을 지키는 병사만으로는 도적 떼를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해적이 수만 명?! 설마 상방인 날 우롱하는 건 아니겠지?!”
“소인 같은 말단 병사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남동쪽에서 온몸이 땀에 젖은 기병 세 기가 춘신군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조금 전 보고를 마치고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와 비슷한 말을 꺼냈다.
“상방님! 현재 강소의 연안에 자리 잡은 거의 모든 항구 마을과 어촌이 수만 명이나 되는 해적 무리에게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해안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내륙의 마을에서도 갈색 피부의 해적들이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바다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동쪽 해안의 항구 마을이 타격을 입으면 군량 확보에 문제가 생길 터인데······!”
춘신군은 제나라 침공을 시작하면 우선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우마차로 하루 거리인 항구 마을을 점령한 다음 해상으로 임치 공략에 필요한 물자와 공성 무기를 운반할 계획이었다.
그래야 제나라 원정군이 더 적은 수송부대를 이끌고 빠르게 북진할 수 있는 데다가 고대에는 가축의 힘으로 물건을 나를 수밖에 없는 육상보다는 큰 배에 한꺼번에 많은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해상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편이 훨씬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또한 초나라의 병사 대부분이 제나라 원정에 동원된 사이에 작은 배에 탄 수만 명의 해적이 장강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인근의 농지와 마을을 약탈하고 다닌다면 초나라의 국고 수입과 백성이 급감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춘신군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도 해안 마을을 습격하는 해적을 먼저 격퇴하기로 마음먹고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
“하늘이 우리 초나라에게 시련을 내리시는구나! 이제 사흘만 더 진군하면 제나라와의 접경지역인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하지만 주인이 없는 집안에서 활개치는 강도를 내버려 두고 사냥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먼저 동부 해안에서 날뛰는 해적을 소탕할 것이다!”
춘신군은 휘하의 장군 세 명에게 각각 병사를 5만 명씩 맡기고 자기도 병사 5만을 이끌며 네 갈래로 하북과 강소에 날뛰는 적군을 소탕하기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대만 왕국의 전사장은 이런 초나라군의 대응을 예상하고 병력을 몇 갈래로 나누어 동중국 해안 도시와 마을 여러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하다가 초나라의 정예군이 다가오면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치는 전술을 썼다.
때문에 초나라군의 정예 부대는 늘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서 유유히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적 함대의 뒷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밀 한 톨까지 모두 약탈당한 불타는 마을의 화재를 진압하기에만 급급했다.
춘신군은 간발의 차이로 놓쳐버린 적군이 삼각돛이 달린 카누를 보고서야 해적의 정체를 깨닫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삼각돛은 조선 반도에 장사하러 가던 무역상들이 봤다던 남쪽 섬에 사는 남만족의 배가 아닌가?! 그럼 조선은 우리 초나라가 합종책을 깨고 제나라를 칠 거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준비해 놓았다는 말인가?! 그럴 수가······! 그 동이족
태자가 태공망과 맞먹는 무서운 지략가였구나!”
춘신군은 잠시 불타는 해안 마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면서 곁에 있는 부장들에게 말했다.
“전군에 전령을 보내서 항연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만 동부 해안을 지키고 나머지는 거양으로 집결하라고 명해라!”
상방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초나라군 부장 중 한 명이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물었다.
“상방님. 그럼 넓은 동부 해안을 겨우 5만 병사로 지켜내야 합니다. 20만 명이 움직이는 지금도 해적의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저 제비처럼 날쌘 남만의 배를 따라갈 수 있는 배가 없으니 이런 식의 숨바꼭질을 계속해봐야 병사들의 기력만 낭비할 뿐이다. 그보다 지금은 함곡관이 깨지기 전에 합종군의 배후를 쳐서 물리쳐서 조선과 제나라의 보복을 예방하는 게 최선이야.”
“15만 병사로 48만 합종군을 친다는 말씀입니까······?!”
“합종군의 배후가 어지러워지면 함곡관을 지키는 진나라군 장수도 관문 밖으로 병사를 내서 우리에게 호응할 거다.”
“가만히 있다가 진나라가 망하면 어차피 외교적으로 고립된다는 말씀이군요······. 알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군에 상방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 * *
춘신군의 명을 받은 초나라의 장군들 즉시 거양에 집결해 함곡관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동안 초나라에서 벌어졌던 일은 고조선 암부의 요원과 접경지역을 순찰하다 초나라군이 제나라의 정찰 부대를 통해 합종군의 군영에도 전해졌다.
한부가 지휘관 막사에서 군사회의를 열어서 그 사실을 전달하자 수많은 장수가 초나라 왕의 배신을 규탄하면서 함곡관보다 먼저 초나라의 수도 거양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초나라인은 갓을 쓴 원숭이나 마찬가지라는 옛말이 사실이었군요! 중원 다섯 나라를 배신하고 낙양을 불태운 방화범의 편을 들다니! 그렇지 않아도 춘신군의 군대가 여기서 닷새 거리에 도착했다고 하니 초나라를 먼저 칩시다!”
“짐도 신평군의 뜻에 찬성하오. 함곡관을 점령하려면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48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동원하면 거양성을 점령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요. 먼저 배후의 적을 처리하고 다시 진나라 원정을 추진하는 게 현명하겠지요.”
한부는 신평군 염파와 위나라 왕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제안을 꺼냈다.
“두 분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만, 하늘이 우리 다섯 나라를 도우셨는지 마침 오늘 아침부터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내일까지 함곡관을 쳐서 떨어트리고 그 다음에 초나라를 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신평군 염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부에게 물었다.
“저번에도 북풍을 언급하셨는데, 대체 어떤 계책을 준비하셨길래 그러십니까?”
“말로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지금쯤 준비가 다 됐을 테니 모두 막사 밖으로 나와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