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48화 (148/195)

[148화] 만약의 사태를 위한 보험

한부의 명을 받고 위, 조, 한, 초, 제 다섯 나라로 떠난 사절들은 대부분 각 나라의 왕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다음 계의 궁궐로 돌아와서 옥좌에 앉아있는 태자와 고조선의 장수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하지만 유독 초나라에 다녀온 사절만이 곤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한부에게 보고했다.

“전하. 유감스럽게도 초나라 왕은 진나라 원정군의 출진 날짜를 한 달 정도 늦추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여섯 나라가 이미 함곡관에 병력을 모으기로 한 날짜를 정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이나 늦겠다니? 초나라 왕이 무슨 변명을 댔는지도 말해보시오.”

“그······ 그게······. 소 발굽으로 점을 쳐보니 불길한 점괘가 나와서 출진을 미룰 수밖에 없으니 전하께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부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면서 옥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점괘라······. 고대에는 만능 핑곗거리지. 하늘이 그런 징조를 내리셨다는데 내가 뭐라고 따지겠느냐고.’

기원전 3세기 중반인 현재, 동서양의 문명국 중 대부분은 나라의 큰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신관이나 무당을 불러서 길흉을 점쳤다.

하지만 여불위가 진나라의 상방이던 시절 조 태후와 노애를 옹 땅으로 보낼 때 그랬던 것처럼 권력자가 점괘를 조작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았다.

한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데다 며칠 전에 암부의 요원에게 받은 보고 때문에 더더욱 초나라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 창평군이 거양에 다녀갔다는 첩보가 들어온 다음에 초나라 왕이 진나라 원정군 출진을 미루겠다고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진나라하고 초나라가 손을 잡았다는 물증은 없지만, 영 느낌이 싸하단 말이야. 게다가 춘신군의 성향도 다른 전국사군자하고는 좀 다르고. 아, 이제 나까지 전국오군자던가?’

한부는 전생에 익힌 역사 지식 덕분에 창평군이 원 역사에서는 초나라의 대신들이 전국시대 마지막 초나라 왕으로 추대했을 정도로 조국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초나라 왕의 최측근인 춘신군은 주로 진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데 힘써온 다른 전국오군자와는 달리 정복 전쟁을 벌이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인물이기에 한부의 초나라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춘신군은 이미 소양왕 시절에 진나라와 초나라가 불가침 조약을 맺는 데 큰 역할을 했고 11년 전 초나라가 노나라를 멸망시키던 해에도 정복 전쟁에 앞장섰었지. 야심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니까 이번에 합종군이 함곡관으로 떠나 있는 사이에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몰라.’

그러나 한부는 진나라 원정군 출진을 앞두고 장수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기에 속내를 감추면서 초나라에 다녀온 사절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쁜 점괘가 나와서 그런 거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우리 조선도 큰 전쟁이나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늘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우제점을 치지 않소? 경은 며칠 쉬었다가 다시 거양에 가서 초나라 왕에게 먼저 함곡관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사절이 보고를 마치자 한부는 궁궐에 모인 고조선군 장수들에게 진나라 원정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사와 군수품의 상태를 점검하라고 지시한 다음 은밀히 암부의 본부로 사람을 보내 계를 불렀다.

계는 태자의 부름을 받자마자 즉시 그의 침실에 찾아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인사했다.

“암부의 수장 계가 전하를 뵙습니다.”

“빨리 왔구나. 계야. 네게 급히 시킬 일이 생겼다. 아무래도 초나라의 동향이 수상해서 말이다.”

“창평군이 거양에 다녀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네 말대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조금 전 초나라가 함곡관에 늦게 병력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전하. 진나라는 영성기와 여불위에게 위수 이북의 땅을 빼앗겨서 예전만큼 강대국이 아닙니다. 이제 진나라가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40만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반면 합종군은 초나라의 지원군이 없이도 48만 명이나 되는 데다 최근에 크테시비우스 박사가 발명한 신무기가 있으니 분명 함곡관을 점령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함곡관을 점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혹시 초나라가 합종의 맹약을 어기고 우리 조선의 동맹국인 제나라나 한라를 침략할까 봐 걱정되는 거지.”

“설마 초나라가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겠습니까?”

“진나라와 초나라가 불가침 조약 정도가 아니라 물 밑에서 공고한 동맹을 맺었다면 진나라 초나라 왕은 충분히 우리 조선이 주축이 된 합종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합치면 70만 명에서 80만 명쯤은 될 테니까.”

“음······.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나라는 늘 제나라의 농지와 염전을 탐내왔고 서쪽 대륙에 진출한 지 몇 년 안 된 우리 조선이 합종군의 맹주 노릇을 하는 것을 고깝게 여길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런데 그렇게 불안하시다면 이번 원정을 취소하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위, 조, 한, 제 네 나라는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진나라 원정을 취소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초나라는 정말로 진나라와 비밀 동맹을 맺고 제나라나 한나라를 를 침략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이웃 나라를 공격하지 않겠지. 그럼 우리 조선만 다른 나라의 신뢰를 잃게 되지 않겠느냐?”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우리 조선이 갑자기 진나라 원정을 포기했는데 초나라가 아무런 배신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은 조선에 불만을 품고 더는 맹주로 여기지 않겠지요. 그동안 원정군을 꾸리느라 많은 물자와 인력을 써왔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오랜 우방인 대만 왕국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초나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다. 왕검성에서 정식으로 격식을 갖춘 사절을 보내면 초나라 조정이 눈치챌 수 있으니 무역상으로 위장한 요원을 시켜서 대만 왕국의 왕에게 내 뜻을 전해다오.”

“전하. 대만 왕국은 분명 섬 전체를 통일한 후로 예전보다 세력이 훨씬 강해졌지만, 여전히 한나라보다도 인구가 적습니다. 대만의 왕이 온 나라의 병사를 한곳에 모은다고 해도 아마 8만 명이 안 될 텐데 그 정도의 병력으로 초나라의 수십만 대군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대만 왕국군과 초나라군이 허허벌판에서 회전을 벌이면 초나라 쪽이 압승을 거두겠지. 하지만 대만 왕국은 섬나라고 초나라의 수군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 초나라도 뱃길로 제나라나 한나라를 공격할 병사들을 옮기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그야 두 나라가 해전을 벌일 일은 없겠지. 하지만 대만 왕국의 수군이 현란한 항해술로 초나라의 해안지역을 약탈하고 적의 육군이 도착하기 전에 도망치기를 반복하면 초나라는 해안 도시를 지키는 데 병력을 할애하느라 이웃 나라를 공격하기 어려울 거다. 그사이에 나는 함곡관을 최대한 빨리 점령하고 그곳에 수비병력을 배치해 진나라의 중원 진출을 막은 다음 먼저 합종의 맹약을 어긴 초나라를 응징하면 되겠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정말로 초나라가 우리 조선을 배신한다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되겠습니다!”

“다만 이 방법을 쓰려면 우리를 배신한 초나라군이 동맹국의 국경을 넘기 전에 대만 왕국의 수군들이 초나라의 동부해안을 급습해야 한다. 그러니 가능한 많은 요원을 초나라 땅에 심어두고 초나라군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대만 왕국에 그 사실을 알려라. 초나라는 물론 동맹국들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 * *

한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한 보험을 들어둔 다음 조선, 위, 조, 한, 제 다섯 나라의 합종군 48만 명을 이끌고 먼저 함곡관으로 가는 길에 있는 낙양을 향해 진군했다.

그런데 합종군이 낙양성 인근에 도착했을 때, 본대를 앞질러서 행군 경로로 정찰하러 갔던 고조선의 기병대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한부와 상장군 무명에게 돌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저······ 전하! 낙양성이 불타고 있습니다! 낙양이 완전히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뭐라고?! 낙양의 백성 중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했느냐?!”

“낙양의 성벽 주변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 백성들은 불이 나기 전에 전부 성 밖으로 대피한 듯합니다.”

“하······. 그럼 진나라 왕이 백성을 함곡관 너머로 강제 이주시키고 낙양에 불을 지른 게로구나. 어차피 낙양을 지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우리가 그 도시를 전초기지로 삼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야.”

상장군 무명은 태자의 말을 듣고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년의 고도 낙양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로다.”

한부는 노장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란 눈빛으로 가면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즈 시절에 더한 일도 하신 분이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그나저나 삼국지의 동탁도 아니고 영정이 선 넘는 짓을 하긴 했네.’

주나라의 수도였던 낙양은 중국의 전설에 중원 대륙 최초의 세습 왕조라고 전해지는 하나라와 고고학적으로 중국 최초의 왕국인 상나라, 그리고 몇 년 전에 진나라에게 멸망한 동주가 도읍으로 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한부는 그 소식을 즉시 동맹국의 장군들에게 알렸고 고대 중국의 무장들은 하나같이 분개하면서 어린 진나라 왕을 저주했다.

“영정 그자는 주나라 봉신의 후예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자로구나! 누가 융적이 아니랄까 봐 다른 도시도 아니고 낙양을 태우다니!”

“역시 진나라의 야만인들은 서주를 멸망시킨 견융족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제 여든을 넘긴 조나라의 명장 염파는 분한 나머지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빨개진 채로 한부를 찾아와서 소리쳤다.

“조선의 태자시여! 시대가 변했다고 하나 주 왕실의 봉신을 조상으로 둔 자가 낙양을 불사르는 게 말이나 됩니까?! 서둘러 함곡관으로 진격하시어 하루라도 빨리 야만족의 소굴인 함양에 낙양과 마찬가지로 불을 지르셔야 합니다!”

“진정하십시오, 염파 장군. 우리가 흥분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면 가증스러운 진나라만 이롭게 할 뿐입니다. 우선은 차분하게 함곡관으로 진군하시지요.”

“진나라가 일시적으로 궁지에 몰리긴 했지만, 우리 합종군의 상황도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15만 대군을 보낸다던 초나라는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고 낙양을 전초기지로 삼는다는 계획도 틀어졌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선 함곡관을 포위하고 주변의 상황을 살펴야 그 험관을 넘을 계책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한부는 그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노장에게 대답했다.

“함곡관을 공략할 계책은 이미 세워뒀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한 가지 조건만 더 갖춰지면 함곡관은 하루 이틀이면 점령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전하! 대체 무슨 수로 천하제일의 험관을 하루 만에 떨어트린다는 말씀입니까? 무슨 조건을 갖추면 그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북풍입니다. 신평군. 북풍이 불면 곧바로 함곡관을 공격할 테니 언제든 병사들이 황하를 건널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