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진나라의 발버둥
한부가 크테시비우스 박사와 함께 열기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진왕 영정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진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영정은 먼저 함양에서 옹왕 영성기와 옹나라의 재상이 된 여불위를 추종하는 무리를 몰아내는데 큰 공을 세운 창평군과 창문군을 재상으로 삼아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게 하고 서쪽의 여러 서융족
부족과 대등한 조건으로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나라 밖의 적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불위가 진나라의 재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동안 많은 재물을 들여 후원해왔던 조정의 여러 관리와 아직 관직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유능한 선비 중 상당수가 여불위를 따라 옹나라로 가버리는 바람에 진나라는 갑작스러운 인재난에 시달려야 했다.
계의 외곽에서 세계최초로 열기구 비행시험이 성공하던 날, 영정은 함양의 궁궐에서 아직 진나라에 남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어전회의를 진행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함양에 남은 대신을 전부 불러 모아도 들을만한 소리를 하는 자가 어찌 한 명도 없다는 말인가? 창평군.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역적 영성기와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킨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조정에 유능한 인재가 부족하구려.”
“폐하. 국내에서만 인재를 찾으실 것이 아니라 널리 천하의 인재를 구하고 계심을 알리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불위를 따라 옹나라로 떠난 대신과 선비들보다 더 유능한 인재가 조정에 넘쳐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는 나라가 두 동강 나고 이웃의 모든 나라와 적대하고 있지 않소?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짐의 신하가 되려 하는 유능한 선비가 몇 명이나 될는지······.”
“비롤 위수 이북을 반역자 영성기와 여불위에게 빼앗겼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진나라는 중원에서 세 번째로 넓은 비옥한 영토와 7백만 백성을 자랑하는 강대국입니다.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 망국의 위험을 넘기면 다시 많은 인재가 진나라를 찾을 겁니다.”
“뭔가 생각해둔 계책이 있는 모양이구려.”
“소신이 직접 초나라에 가서 초나라 왕과 춘신군을 만나 우리나라와 동맹을 맺고 조선을 견제하자고 설득해보겠습니다. 폐하.”
“흠······. 초나라는 조선과 스무 해 넘게 교역을 해오지 않소? 과연 초나라가 근래에 기세등등한 조선과 적대하면서 우리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할지 모르겠구려.”
“그래서 더더욱 초나라의 왕족인 소신이 초나라를 방문하려는 것입니다. 폐하. 소신은 여전히 고향의 친족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니 한번 시도는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창평군은 진시황이 노애의 반란을 막을 때 큰 공을 세운 진나라 왕실의 충신임과 동시에 진나라에서 상방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도 자신이 초나라인임을 잊지 않은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다.
원 역사의 그는 진나라가 위, 조, 한 삼진의 세 나라를 멸망시킨 후 초나라를 침략하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초나라 왕을 사로잡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진나라를 버리고 멸망의 위기에 놓인 조국으로 돌아가 전국시대 초나라의 마지막 왕위에 올라 진시황에게 맞섰다.
현재의 창평군도 원 역사처럼 초나라와 진나라 양국에 애정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세력이 너무 강해진 고조선이 초와 진 두 나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내가 조선의 태자라면 분명 동쪽의 여섯 나라, 가능하면 옹나라까지 끌어들이는 합종책으로 우리 진나라를 압박하려고 하겠지. 그럼 진나라는 소진이 여섯 나라의 재상 노릇을 하던 시절처럼 함곡관 밖으로는 한발도 나오지 못하게 될 거고 초나라는 조선을 중원의 패자로 모시는 제후국이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될 거다.’
진왕 영정은 창평군의 말을 듣고 그가 초나라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진나라가 처한 난관을 돌파할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의 요청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창평군. 경의 가족을 모두 함양에 두고 초나라에 다녀온다고 약속하면 그 제안을 수락하겠소.”
“음······.”
“함양에서 여불위의 잔당을 일소한 그대를 이렇게 대하는 게 섭섭하겠지만, 친모이신 조 태후와 양아버지처럼 여기던 역적 여불위에게 배신당한 후로는 도무지 사람을 믿지 못하겠소. 경을 홀대하려는 게 아니니 이해해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그건 그렇고 경이 정말로 초나라와의 동맹을 성사시키면 큰 상을 내릴 것이오. 함양을 떠나기 전에 원하는 것을 말해주면 그대가 돌아오기 전까지 준비해 두겠소.”
“소신이 진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성사시키면 부디 여불위가 차지하고 있던 봉지와 그자의 저택을 하사해주십시오.”
진왕 영정은 그 말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알겠소. 창평군.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시구려.”
그 후 영정은 다른 대신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는 다음 어전회의를 마쳤고 창평군은 동향 출신인 창문군과 함께 퇴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궁궐 밖으로 나왔을 때, 창문군이 조금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창평군에게 말했다.
“창평군. 아까 대왕께 왜 그런 대답을 하셨습니까?”
“여불위가 가지고 있던 영지와 저택을 달라는 것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평소 공을 물욕이 없고 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건만, 섬기는 나라와 조국 모두를 위하는 일에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시다니요······. 천하의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은 저를 탐욕스러운 자라고 흉볼 것이고 현명한 선비는 창문군이 바른 처신으로 제 몸과 가문을 지킬 줄 안다고 평가하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께서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데다 최근에는 친모에게 버림받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시는 바람에 더욱 의심이 많고 정적에게 가차 없는 성격이 되시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 대가도 없이 조국이 아닌 진나라의 안위를 위해 어려운 임무를 맡겠다고 말씀드렸다면 왕께서는 절대로 제가 초나라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흠······. 그렇다면 재물 대신 상방의 자리를 요청하셔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선비가 더 명예로운 관직에 오르길 바라는 건 흠이 되는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왕께서는 영성기의 난 이후 지금까지 공석이 된 모든 관직에 다른 인물을 채워 넣으셨지만, 유독 상방의 자리만큼은 비워두고 계십니다. 이는 제2의 여불위가 나타나 진나라의 국정을 농단하는 걸 꺼리고 계신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조금 전 제가 왕께 상방의 자리를 요구했다면 어쩌면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릅니다.”
창문군은 그제야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창평군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 거기까지 헤아리시고 어전에서 재물을 탐하는 필부를 연기하셨군요. 공이라면 분명 조국에 계신 왕과 춘신군을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 * *
창평군은 창문군과 헤어진 후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싼 다음 튼튼한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에 올라 진왕 영정이 붙여준 호위병 수백 명과 함께 함양의 성문을 나섰다,
그 후 진나라 사절단 일행은 함곡관을 지나 약 3주일 만에 거양 시내에 들어섰고 창평군은 아련한 눈빛으로 동포인 묘족들이 거니는 거리를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함양성은 내전을 치르는 바람에 민심이 흉흉한데 조국의 백성들은 여전히 표정이 밝구나.”
원 역사라면 기원전 245년의 초나라는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수도를 거양보다 동쪽에 있는 수춘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겠지만, 바뀐 역사에서의 거양 시내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약 한 시간 후 진나라 사절단이 거양성의 궁궐에 도착하자 창평군이 앞서 보낸 전령에게 미리 연락받고 마중 나와 있던 초나라 내관들이 창평군을 알현실로 안내했다.
그가 알현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옥좌에 앉아 있는 중년의 왕이 원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은 창평군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랜만에 만난 동생뻘인 친척을 반겨주었다.
“웅보?! 정말 웅보 맞는가?!”
“그 웅보가 맞습니다. 폐하.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대체 이게 얼마 만인가! 자네가 진나라로 떠나고 나서 딱 스무 해 만에 만나는군! 그래!”
“마지막으로 뵀을 때는 폐하께서는 20대 청년이셨는데 이제 태손까지 본 중년이 되셨군요.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그러는 자네는 진나라의 볼모 신분에서 재상이 되어서 돌아왔고 말이야.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지난 20년 동안은 유독 많은 일이 있었지요.”
“그렇지. 아, 어린 시절에 자네와 사이가 좋던 황헐이 초나라의 상방이 됐다는 얘기는 당연히 들었겠지? 이제는 춘신군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서 본명을 잊어버릴 지경이라네.”
“그러고 보니 춘신군의 반가운 얼굴이 보이질 않는군요. 함양 시내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춘신군은 늘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초나라 궁궐의 소식이 그 먼 곳까지 전해지다 놀라우면서도 두렵군. 춘신군은 지금 자기 봉지를 살피러 강동에 가 있다네. 안타깝게도 길이 어긋나버렸네. 그려.”
“춘신군이 강동에도 봉지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황씨 집안의 봉지는 회수 이북의 열두 개 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춘신군이 회수 이북 지역은 제나라와의 접경지역이니 왕실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진언하면서 자기 봉지를 바치고 대신 강동의 땅을 달라고 했다네. 나라를 위해 비옥한 봉지를 늪지대와 우림이 널린 땅과 바꾸다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지 않은가?”
창평군은 초나라 왕의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초나라가 아직 제나라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춘신군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온 회수 이북의 땅을 왕실에 바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초나라는 전국팔웅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어 아직 국토의 절반 이상이 온갖 맹수와 독충이 우글대는 아열대우림이거나 악어가 사는 늪지대였다.
그렇기에 초나라는 늘 비옥한 농지와 생산량이 뛰어난 철광산, 그리고 염전이 널려있는 제나라의 영토를 노려왔는데 최근 몇 년 동안 진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은 덕에 기른 국력으로 제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평군은 이점을 간파하고 초왕 웅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초나라가 제나라 정복을 시작하려는 모양이군요. 조국의 동포들이 오랜 비원을 이루길 바랍니다.”
“고맙네. 웅보. 하지만 과연 내 대에 북진을 시작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몇 년 전에는 반역자 여불위가 진나라군을 이끌고 위나라와 조선을 칠 때 제나라를 정벌할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이제는 제나라 국경을 넘으면 조선, 위, 제 삼국을 상대해야 할 판이 아닌가? 이제는 남쪽의 미개척지나 개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폐하. 이대로 중원에서 동이족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계시면 조만간 조선은 중원의 패자 노릇을 하려 들 겁니다.”
“짐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러시면 어떻겠습니까? 조만간 조선은 초나라에 사절을 보내 진나라를 정벌할 합종책에 초나라도 합류하라고 요구해올 겁니다. 거기에 거짓으로 응하셨다가 다른 나라의 합종군이 함곡관으로 향하면 제나라를 기습하시지요.”
“흠······. 그렇게 제나라를 정복하고 나면 진나라를 도와달라 이 말이지? 괜찮은 생각이군. 춘신군과 한번 상의해 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