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진나라의 분열
‘이거 정말 환장할 노릇이구나! 일부러 점괘를 조작해서 태후를 먼 곳으로 보냈건만, 기어코 왕이 노애의 일을 알게 됐어!’
진왕 영정의 호통을 들은 여불위의 등골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물론 함양에 사는 제후와 대신 중 대부분은 아직 태후 조희와 가짜 내시 노애의 스캔들이 그저 망측한 헛소문으로 여기고 있지만, 누구보다 어린 진나라 왕의 집요한 성격과 잠재력을 잘 아는 여불위는 지금의 사태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정은 조나라에 볼모 생활을 하던 도중 조나라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경험 때문이지 사람을 쉽게 의심하는 편인데······. 잘못하면 왕이 종이를 처음 들여온 내 의도를 오해할 수도 있겠어.’
그는 왕을 향해 허리를 기역 자로 숙이면서 영정에게 사죄했다.
“폐하! 종이가 왕실을 음해하는 간악한 대역죄인의 손에 들어간 것은 모두 그 물건을 처음 들여온 소신의 불찰입니다! 부디 소신의 실책을 스스로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옵소서!”
“여 상방. 방금 짐이 이 사달을 바로 잡을 방법을 말하지 않았소?! 짐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던 거요?!”
“폐하. 집안에 들어온 강도가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부러뜨려도 강도가 도망치게 내버려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강도가 다시 다른 흉기를 들고 그 집의 담을 넘지 않을 거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흠······. 계속 말해보시오.”
“전하의 말씀대로 제지소를 폐쇄하고 이미 시중에 풀린 춘화집을 회수하여 불태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불경스럽고 망측한 책을 발간한 자들을 색출해서 엄벌에 처해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 일을 경이 해보겠다는 말이구려. 좋소. 함양을 지키는 모든 병사를 풀어서라도 대역죄인 무리를 잡아들이도록 하시오. 그 자들은 짐이 직접 심문하고 벌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여불위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인사한 후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진왕 영정은 그의 심복인 내관을 은밀히 자신의 침실로 불러서 물었다.
“믿을만한 사람들을 저잣거리에 보내서 망측한 소문의 주인공인 노애라는 남자에 대해서 알아보니 의외로 화류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더군. 그자가 정말로 얼마 전에 왕실의 내관이 됐나?”
“그렇사옵니다. 폐하. 약 두 달쯤 전에 내관이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군. 보통 내관에 지원하는 자들은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자식이지 않나? 그자는 애인들이 주는 돈 덕분에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들었거늘. 게다가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거라곤 거대한 물건뿐인 자가 거세까지 하면서 내관이 됐다고? 노애에게 물을 것이 많으니 당장 그자를 짐 앞에 대령하라.”
“그자는 내관이 되자마자 태후의 시종이 되어서 지금은 태후를 모시고 옹성에 있는 별궁으로 떠났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진왕 영정은 내관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그럼 소문대로 노애가 태후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잖느냐!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자가 음탕한 시정잡배를 내관으로 추천했단 말이냐!”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놀랍게도 상방 여불위라고 하옵니다. 폐하.”
“뭐? 여불위가?! 이런 발칙한 자를 봤나! 감히 지금껏 짐의 아버지 행세를 해오면서 어머니에게 그따위 놈을 붙여줬다는 말이지!”
영민한 어린 왕은 자기 어머니가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여불위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왕 영정은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해가 지면 은밀하게 창평군과 창문군을 이곳으로 불러와라. 진정한 진나라의 두 충신에게 전할 말이 있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잠시 후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자 어명을 받은 내관은 어둠을 틈타 초나라 왕족
출신이자 진나라의 대신인 창평군과 창문군을 진왕 영정에게 데리고 왔다.
그 두 사람은 원역사에서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왕 영정의 군대를 이끌고 함양 시내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고 둘 중 창평군은 여불위의 뒤를 이어 상방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두 진나라의 신하는 어린 왕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폐하. 야심한 밤에 어인 일로 저희를 부르셨는지요?”
“왕실을 능멸하고 나라를 훔치려는 큰 도둑을 잡고자 두 사람을 불렀소.”
“감히 진나라 왕실에 반역을 꾀하는 무리가 나타났다는 말씀입니까?!”
“나라가 외교적으로 고립된 시기에 역심을 품은 무리가 나타나다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로군요.”
“그러게 말이오. 게다가 이 나라의 상방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하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 생각 때문에 지금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오.”
“설마 여 상방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폐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여 상방은 이미 진나라에서 폐하 다음가는 권세와 부를 누리고 있으니 굳이 역심을 품을 이유가 없을 듯합니다!”
“짐도 막연한 추측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오. 정말 믿고 싶지 않지만, 요즘 세간에 떠도는 태후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고 그 일을 역적 여불위가 꾸몄다는 정보를 방금 입수했소. 그 파렴치한 자가! 짐의 앞에서는 아비 노릇을 하면서 뒤로는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이오!”
영정이 치를 떨면서 말하자 창평군과 창문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세상에······. 법가의 나라에서 그런 추잡한 짓을 저지르다니······.”
“폐하. 정말로 소문이 사실이라면 태후께서 한낱 시정잡배의 씨앗을 잉태하시기 전에 그 노애라는 가짜 내관과 여불위를 속히 참하셔야 합니다.”
진왕 영정은 창문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경의 말대로요. 하오나 이 나라 곳곳에는 여불위는 적지 않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고 그자를 따르는 제후나 식객이 워낙 많으니 섣불리 병사를 움직이면 오히려 역공을 당해 짐과 왕실의 충신들이 다치게 될지도 모르오, 그러니 두 사람은 이걸 가지고 있다가 오직 왕실만을 따르는 함양의 무관들에게 보여주고 은밀하게 여불위를 칠 장수와 병사를 모으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 * *
창평군과 창문군은 왕의 밀명을 받은 후로 남의 눈을 피해 왕길 근위대와 함양성을 지키는 수비대 소속 장수 중 왕실에만 충성을 바친다고 여긴 자들을 만나 병부를 보여주면서 임무에 끌어들였다.
두 사람은 의심 많은 진왕 영정이 총애하는 신하답게 충분히 주의 깊게 움직여서 진왕 영정이 여불위를 제거하려 든다는 물증을 남기지 않았지만, 여불위도 일개 상인에서 상방의 자리를 차지한 자답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심중을 눈치챘다.
‘고지식한 창평군과 창문군이 보기 드물게 바쁘게 움직이면서 자주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는 말이지······. 두 놈이 꼬리를 남기진 않았지만, 분명 왕이 태후와 노애의 관계를 완전히 알아채고 날 제거하려고 벼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자기 저택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서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생은 진나라의 상방 정도로 만족하려 했거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나. 진왕이 내 목을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함양의 관군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으니 날 따르는 제후와 대신들의 사병을 모아서 거사를 벌여야 하나?”
여불위는 막강한 권력과 적잖은 사병을 보유하고 있지만, 진나라는 법이 엄격한 진나라에선 상방이라도 관군을 움직이려면 왕의 옥새나 왕족의 인장이 찍혀있는 명령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불위는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 진나라 왕의 옥새를 본떠서 만든 가짜 인장을 저택의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가짜 옥새를 사용하면 원역사의 노애처럼 어명을 위조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함양 수비대 소속 병사 중 일부를 자기 휘하에 두는 데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함양 수비대 병사 중에는 재능있고 어린 왕을 좋아하는 자가 많았기에 여불위가 사실 궁궐을 공격하고 아무 죄 없는 왕을 폐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적지 않은 장수와 병사가 그를 저버리고 진왕 영정의 편을 들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그때, 여불위의 시종이 닫힌 서재문을 열고 들어와서 주인을 불렀다.
“여 상방님. 이사 장사 이사가 여 상방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이사가? 마침 잘됐구나. 어서 여기로 데려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 상방님.”
하인은 여불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이사를 서재로 데려왔다.
이사는 여불위를 만나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여 상방님! 어찌하여 이 위중한 시기에 서재에 틀어박혀 계십니까! 상방님과 여씨 가문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임을 어찌 모르십니까?”
“음······. 역시 내 꾀주머니 이 장사로군. 자네도 창평군과 창문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챘는가?”
“그렇습니다. 여 상방님. 그 둘이 며칠 전 새벽에 은밀히 입궐한 한 후로 평소 줄기던 독서와 무예 수련도 하지 않으면서 함양의 무관들의 집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그 둘은 오직 진나라 왕실만을 섬기는 자들이니 분명 왕께서 조 태후와 노애의 일을 눈치채신 거겠지요!”
“그렇겠지. 그러나 조정의 대신이나 제후 중에서는 내 편을 드는 자가 많아도 함양을 지키는 관군 중에서는 내 편을 들 장수가 별로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었네.”
“여 상방님. 우선은 함양을 떠나 분노한 왕의 칼끝을 피하고 상방님을 도울 조력자를 찾아가시지요.”
“조력자?”
“옹성에 계신 태후는 이미 노애를 진심으로 아끼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분명 왕에게 모든 사실을 들켰더라도 노애와의 관계를 포기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옹성의 태후를 찾아가셔서 그분의 인장을 이용해 다른 지역의 제후와 관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이시지요. 그다음 옹성 일대를 점거하고 왕의 이복동생인 장안군 영성교를 옹립하여 새 나라를 세우십시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구먼!”
원역사에서 진시황의 이복동생인 장안군 영성교는 기원전 23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시황이 보낸 토벌군과 싸우다 전사한 자이다.
이사는 이런 영성교의 흑심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가 여불위의 권력의 원천인 진왕 영정을 해칠까 봐 걱정하며 경계 해왔는데, 그가 정적이라고 생각해온 자가 여불위가 손을 잡게 되는 날이 온 것이다.
여불위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사에게 말했다.
“이 장사. 어서 가서 장안군을 데려오게. 아니, 지금 바로 나와 함께 장안군을 찾아가세나. 그 탐욕스러운 꼬맹이와 손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