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최초의 그림책 (2)
함양 시내로 돌아온 계는 여불위가 준 천금 중 일부를 써서 여러 사람이 묵을 수 있는 큰 집을 한 채 산 다음 데리고 있는 암부의 요원과 화가를 모두 그곳에 집합시켰다.
전원이 모두 집안의 밀실에 모이자 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여불위에게 한 말이 있으니 난 이만 귀국하겠다. 너희는 함양에 남아서 나머지 임무를 수행해라. 우리 제지기술자들이 진나라의 공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나면 한동안 함양은 여불위가 제지소를 짓는다고 떠들썩해질 거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문방구를 조금씩 사들이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춘화에 관심을 보일 것 같은 진나라 백성과 미리 사귀어두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수장님.”
다른 암부의 요원들은 모두 수장의 명령에 따랐지만, 오직 형가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에라이! 이거 도저히 못 참겠구먼! 수장님! 몇천 리나 되는 길을 왔더니 이 형가에게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면서 소인배나 할법한 추잡스러운 일을 시키시려고 하십니까?! 대체 그런 짓에 무슨 대의가 있으며 이딴 일이 왕실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씀입니까?! 이런 건 협객이 할만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자 다른 암부의 요원들이 하나같이 형가를 노려보더니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면서 그를 꾸짖었다.
“무례한 놈! 목소리를 낮춰라! 어느 안전이라도 고함을 지르느냐?!”
“신입 주제에 감히 상관의 명을 거역하다니! 수장님! 부디 저놈을 항명죄로 다스려 조직의 규율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형가는 순식간에 무장한 요원 수십 명에게 둘러싸였음에도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면서 자기도 품에서 비수를 꺼내면서 소리쳤다.
“오냐! 덤벼봐라! 맨 처음 덤비는 놈은 나랑 같이 저승 구경하러 가는 거다!”
계는 그런 형가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길들지 않은 야생마 같은 놈이구나.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녀석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래도 담력 하나는 대단한 놈이니 잘 구슬리면 한 사람 몫쯤은 해내겠지.’
그는 형가를 분노한 부하들 틈에서 구해내기로 마음먹고 크지 않지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그만둬라. 조선 왕실의 적에게 향해야 할 검을 동료에게 겨눠서야 하겠느냐?”
암부의 요원들이 수장의 명에 따라 마지못해 비수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자 계는 형가의 앞으로 걸어가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형가. 너는 태자 전하의 앞에서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고 들었다. 네가 말하는 협객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소인배 같은 짓거리가 태자 전하와 조선 왕실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합니다!”
“이번만은 특별히 너희 말단 요원에게도 작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겠다. 화가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춘화 배포 작전은 태자 전하께서 직접 기획하신 것으로 진나라 태후와 상방 여불위의 부적절한 관계를 드러내 진나라 왕과 여불위가 서로 반목하게 하는 것이다.”
“허······! 설마 춘화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럴 바엔 목숨을 걸고 진나라 왕의 목을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더 협객다워서 말이냐? 네 말대로 천신만고 끝에 진나라 왕을 암살했다고 치자.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 상방 여불위가 진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거나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는 왕을 옥좌에 앉히고 다시 조선과의 전쟁을 준비할 게 뻔하지.”
“음······.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수장님.”
“알았으면 임무에서 성과를 내서 오늘의 무례를 만회해라. 한 나라의 태후를 조롱하는 내용의 책을 배포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구태여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수장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 * *
계가 형가를 달래는 동안 여불위는 자기가 부리는 제지기술자가 만든 면종이를 가지고 입궐하여 진왕 영정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기뻐하십시오. 폐하. 소신이 조선의 동이족이 독점하고 있던 제지기술을 입수했나이다.”
“호······.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냈구려. 여 상방. 그럼 조만간 책을 읽을 때마다 그 무거운 죽간을 들지 않아도 된단 말이오?”
“물론 면종이 양산을 시작하여 여러 서적과 문서를 필사하는 작업을 마치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리겠지만, 적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는 폐하께서 즐겨보시는 서적의 필사는 마칠 수 있을 듯하옵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나저나 중원 서부의 여러 나라에 면종이를 팔기 시작하면 아무도 경이 천하제일의 거부임을 부정하지 않을 듯하오.”
“소신이 어찌 면종이처럼 쓰임새가 많은 물건을 독점하여 사사로운 이득을 챙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지소를 폐하께서 임명하신 관리가 운영하고 면종이는 소금이나 철제 농기구처럼 조정이 전매하는 물품으로 지정하여 국부를 늘리는 데 쓰시는 게 좋을듯합니다.”
“여 상방! 아니, 중보! 정말 그래도 되겠소? 교활한 동이족에게서 제지법을 알아내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을 텐데 말이오.”
“물론입니다. 폐하. 기쁜 마음으로 소신이 지은 제지소를 바치겠나이다.”
“여 상방! 아니, 중보! 참으로 고맙소! 그대의 공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오!”
“진나라의 상방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
여불위는 진왕 영정이 자신을 다시 중보라고 부르자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간에 돌던 헛소문 때문에 서먹해졌던 왕하고의 사이가 이제야 예전처럼 돌아오겠구나. 게다가 종이를 팔아서 국고가 가득 차면 더 수월하게 조선을 정벌할 병사를 기를 수 있겠지.’
곧 진나라 조정은 많은 인력과 예산을 동원하여 함양 일대를 비롯한 여러 곳에 제지소를 짓고 제지기술자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계는 임무를 마친 고조선인 제지기술자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로부터 약 몇 달이 지나 계절이 늦가을에 접어들자 함양의 시장 곳곳에는 조정의 허락을 받고 종이를 파는 상점이 줄줄이 늘어섰고 많은 선비가 죽간과 서도 대신 면종이와 붓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양에 남은 암부의 요원들은 계가 여불위에게 받은 금을 써서 면종이를 잔뜩 사들인 다음 화가들에게 춘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아무 남녀를 그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글자가 적혀있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책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 누구인 알 수 있도록 잘 묘사해야 한다. 특히 남자 쪽은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로 망측한 짓을 하는 모습을 반드시 그려야 한다.”
“나리. 남자 쪽은 그렇게 그린다고 해도 여자 쪽은 실물을 볼 기회가 없어서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수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조만간 진나라의 태후가 궁궐을 떠나 함양에서 먼 경치가 좋은 고을로 요양을 떠난다고 한다. 이 나라의 태후는 자기 미모를 뽐내는 걸 즐긴다고 하니 분명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고 시내를 지날 거야. 그때 태후의 용모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려라.”
“알겠습니다. 나리.”
며칠 후 한부의 예상대로 태후 조희는 여불위에게 소개받은 노애를 데리고 궁궐을 나섰고 고조선에서 온 화가들은 태후의 행렬을 구경하는 진나라 백성 사이에 섞여서 그녀의 모습을 관찰한 다음 밤낮으로 춘화를 그렸다.
그리고 기원전 246년의 초겨울이 시작되자 함양에 남은 암부의 요원 수십 명은 품속에 비수 대신 춘화집을 숨기고 거리로 나섰다.
형가는 함양에 도착한 후 친분을 다져온 진나라인 세 명을 술집에 불러 모아 술을 사서 먹인 다음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른 한량들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들 이번에 여 상방께서 조선에서 들여오신 종이라는 물건을 어떻게 생각하나?”
“엥?! 형구 이 친구가 벌써 취했나? 어떻게 생각하긴! 당연히 아무 생각도 안 들지!”
“이 친구 지금 우리 중에서 자기만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거 맞지?!”
“허허! 진솔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음흉한 구석이 있었구먼!”
“이거 하나만 알도 둘은 모르는 사람들일세? 종이에 글자만 쓰라는 법이 있나? 요즘 끝내주는 그림이 그려진 책이 세간에 돌고 있는 거 몰라?”“뭐? 그림? 그것도 유가의 선비들이나 즐기는 고상한 취미이지 않나? 이 친구가 겨우 술 한잔 사고 끝까지 잘난 체를 하려고 드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려나? 이런 화끈한 그림을 맨날 공자왈 맹자왈 거리는 샌님들이 좋아할 것 같아?”
형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속에서 춘화집을 꺼내서 한량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진나라인 세 사람은 처음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형가에게 대답했다.
“흠······. 확실히 이건 굉장히 진귀한 물건이구먼.”
“형 대인. 소인이 식견이 부족해서 귀한 분을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요.”
“이 책 한 권만 주면 하늘에 맹세코 평생 형님으로 모실게!”
“허······. 이 친구들 태도 변하는 것 좀 보소. 원래는 밀 한 가마니 값은 받고 팔아야 할 물건이지만, 자네들이니까 특별히 외상으로 주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형가는 큰 선심을 쓰는 양 품속에서 춘화집 두 권을 더 꺼내 한량들에게 준 다음 웃고 떠들면서 술을 마시다가 헤어지고 다시 다른 무리를 만나 놀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형가는 화가들이 그린 춘화 중 약 3분의 1을 진나라의 관리에게 발각되지 않고 혼자 배포해 고조선 암부의 요원 중에서 가장 큰 성과를 냈는데, 이는 모두 한부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원역사의 형가는 진시황 암살에 참여하기 전 연나라에 살던 시절에 악사 고점리 등의 친구들과 매일 같이 저잣거리에서 만나 마치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방탕하게 놀아 ‘방약무인’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긴 인물인데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최초의 춘화집은 오락거리가 부족한 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자극적인 물건이었고 마침 계절이 밖에서 놀기 어려운 겨울이다 보니 태후 조희와 노애의 불륜을 암시하는 책 수백 권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함양 전체에 퍼져 나갔다.
거기에 진나라인 중에서도 춘화를 그려 파는 자들이 생겨나니 기원전 246년의 12월 초에는 함양의 백성 중 거의 절반은 한번은 춘화를 본 적이 있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갑자기 함양의 궁궐을 떠난 태후 조희와 노애의 관계를 의심하는 진나라 백성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그 춘화집에 나왔던 남자 말이야. 아무리 봐도 노애 아니야? 그 일도 안 하면서 불륜 상대들이 준 돈만으로 잘 먹고 잘산다는 한량말이야.”
“자네도 그 생각했어? 역시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는 건 천하에 그놈밖에 없겠지?”
“그리고 여자 그림은 왠지 말이야······. ‘그분’을 좀 닮지 않았어?”
“음······. 나만 그런 생각한 게 아니었구먼. 좀 이상하긴 해. 그분이 함양을 떠나시기 직전에 노애도 없어졌잖아? 항상 여자를 끼고 거리를 활보하던 놈이.”
“이거 혹시······?”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모르지. 그분도 그쪽으로는 그다지 소문이 좋은 분은 아니니까 말이야.”
이런 소문은 함양 시내 전체에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어린 진나라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진왕 영정은 내관을 통해 그 소문을 듣자마자 궁궐로 대신들을 불러서 불같이 화를 냈다.
“경들은 뭣들 하는가! 시내에 종이로 만든 음란한 책이 돌아다니고 그 때문에 왕실을 명예를 더럽히는 헛소문이 돌고 있는 걸 아직도 모르나? 당장 제지소를 폐지하고 춘화집을 압수해라! 오늘 이 시간부터 짐의 나라에서 동이족이 만든 삿된 물건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