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최초의 그림책 (1)
계는 태자의 대답을 듣고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전하. 소신이 무지하여 한낱 책으로 어찌 인구 천만의 대국에 내분을 일으킬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자세히 찬찬히 설명해주마. 지금 진나라의 태후와 상방 여불위는 불륜 관계있다.”
“전하! 그 말씀이 사실이옵니까?! 소신이 부리는 함량의 요원 중에서 그런 정보를 입수한 자는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음······. 사실 오랜만에 예지몽을 꿨다.”
“그러셨군요. 꿈으로 은천의 은광과 마우리아국의 위치를 알아내신 후로는 처음이군요. 여전히 단군왕검의 가호가 전하와 함께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상방쯤 되는 자가 한낱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여불위는 진나라 왕에게 둘의 관계를 들키는 게 두려워서 하루라도 빨리 태후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 하는 중이다. 원래 진나라의 태후 조희는 여불위의 애첩이었는데 조희가 남편인 진나라의 장양왕이 죽고 나서 일방적으로 여불위에게 구애를 해왔거든. 이제 여불위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노애라는 이름의 한량을 시켜 태후의 관심을 끌게 할 거다.”
“한낱 한량이 지체 높은 상방을 사모하는 여인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듣자 하니 그 노애라는 자는 진나라의 화류계에서는 꽤 이름을 날리는 인문인데, 양물이 워낙 거대하고 단단해서 그곳에 크고 무거운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매달고도 한 시진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하더구나. 진나라 태후는 애초에 여불위의 출중한 정력에 관심이 많을 뿐 그자의 권세나 인품을 사모하고 있는 게 아니다.”
“허허허······. 오동나무 수레바퀴라······. 사람이 아니군요. 코끼리도 그런 재주는 부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직접 보지 않으면 그 얘기는 믿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여불위는 대체 어떻게 그 노애라는 자를 궁궐에 들여보내서 진나라 태후에게 접근시키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함양의 왕궁은 경비가 철통같고 궁인들이 서로를 철저히 감시해서 잘 훈련받은 암부의 요원조차 잠입할 수 없었습니다.”
“간단한 일이다. 노애가 함양의 궁궐에 스며들기 어려우면 진나라 태후가 궁 밖으로 나가서 살면 되는 거 아니겠느냐?”
“아······!”
“여불위는 조만간 태후가 함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요양을 가지 않으면 중병을 앓게 된다는 조작된 점괘로 어린 진나라 왕을 속일 것이다. 그럼 노애는 거세를 하지 않고 내시로 변장해 태후를 보필하면서 휴양지로 떠나겠지.”
“음······. 암부에 몸담으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그보다 혐오스러운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하.”
“그러게 말이다. 네가 할 일은 노애가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제후의 자리에 올라 여불위의 권세까지 갉아먹기 전에 진나라 왕의 귀에 추문이 들어가게 해 노애따위보다 훨씬 만만치 않은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거다.”
“전하. 그렇다면 번거롭게 서적을 발간하는 것보다는 태후가 많은 시종을 데리고 궁을 나서는 순간부터 함양에 추문을 퍼뜨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진나라의 평민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책에 꼭 글만 쓰라는 법이 있느냐? 글 없이 그림만 그려져 있는 책이라면 평민들도 분명 관심을 둘 거다. 게다가 우리 조선에는 가느다란 선을 그릴 수 있는 깃펜이 널리 쓰이고 있으니 품속에 숨길 수 있는 크기가 작은 책을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지.”
“그림만 그려져 있는 책이라! 그런 물건이 세간에 나오면 분명 흥미를 갖는 자들이 많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하. 즉시 솜씨 좋은 화가와 제지기술자를 데리고 함양으로 떠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너라.”
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자에게 읍한 후 침실 밖으로 나갔다.
한부는 점점 멀어져가는 계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된 애한테 좀 미안한 짓을 하게 됐네. 그래도 어쩌겠어. 중원의 생태계를 파괴할 독초로 자라날 게 뻔한 싹에는 미리 제초제를 치는 수밖에.”
* * *
태자의 밀명을 받은 계는 즉시 왕검성의 조정에 전령을 보내 제지기술자 몇 명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예산을 아낌없이 풀어 하북 땅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모든 준비가 끝나자 계는 제나라 상인으로 위장한 후 암부의 요원을 포함한 1백여 명의 일행과 함께 공작비로 쓸 재물과 제지에 필요한 도구를 실은 우마차 몇 대를 끌고 조나라를 거쳐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향했다.
계는 함양에 도착한 후 과거 백기를 포섭할 때 함양에 잠입했던 시절 친분을 다져온 인물들에게 재물을 풀어 다시 환심을 산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여불위를 만날 기회를 잡았다.
기원전 246년 7월 초, 여불위는 계를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 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물었다.
“그대가 제나라 출신인 상인 임계로군요. 내 식객 중에 자네가 씀씀이가 관대한 군자라고 칭찬하는 이가 적지 않았소. 그런데 무슨 일로 본인을 만나고 싶다고 한 거요?”
“평소 여 상방께서는 유능한 학자나 용한 도인, 그리고 이재에 밝은 상인을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소인은 상방과 진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 사업을 함양에서 시작하고자 상방께 도움을 청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군요. 이미 우리 진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고 본인도 세간에서 천하제일의 거부로 불리고 있소. 이런 본인의 흥미를 끌만 한 새로운 사업이라는 게 대체 뭔지 궁금하구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진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데 이견을 가진 이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어쩌면 조선이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 점점 늘고 있더군요. 조선은 갖가지 유용한 특산품과 남만에서 수입한 사탕이나 코뿔소 뿔 같은 진귀한 물건을 중원에 팔아서 나날이 부강해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대는 나를 설득하러 온 거요? 아니면 능멸하러 온 거요? 새로운 사업을 논하다가 갑자기 가증스러운 동이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궁금하구려.”
“만약 진나라가 조선이 독점하고 있는 특산품 중 하나를 생산하여 천하의 모든 나라에 팔 수 있게 된다면 조선은 그만큼 가난해지고 진나라는 더욱 부강해지지 않겠습니까?”
“호······. 이제야 좀 흥미가 생기는군요. 그럼 그대가 조선의 특산품 중 하나를 만들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여 상방님. 소인은 제나라에 자주 드나드는 조선인 상인들과 친분을 쌓다가 면종이를 만들 줄 아는 제지기술자 몇 명을 종으로 부리게 됐습니다.”
계의 말을 듣자 여불위가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진나라는 죽간보다 가볍고 부피가 작은 데다 쉽게 글을 쓸수 있고 비단보다 훨씬 저렴한 면종이의 가치를 일찍부터 알아보고 하북과 요서에 첩자를 보내 그 제조방법을 알아내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한부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자기가 마우리아 제국에서 들여오거나 미래의 지식으로 개발한 물건은 왕검성 일대나 한반도 남부에서만 생산하도록 조치했고 진나라 첩자 중에는 한국 조어를 능숙한 발음으로 구사할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었기에 번번이 임무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불위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에게 대답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진나라에 귀한 선물을 가져오신 셈이구려. 정말로 면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그대의 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하겠소.”
“함양 외곽의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제지소로 쓸 건물 한 채만 마련해주신다면 바로 면종이 생산 시범을 보여드리지요.”
“좋소. 마침 적당한 건물을 한 채 가지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면종이를 만들어 보시오.”
“소인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 상방님,”
그 후 계는 일행과 함께 함양성 밖으로 나와서 여불위가 붙여준 하인의 안내를 받아 강가에서 가까운 한 창고 건물로 향했다.
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건물의 안과 밖을 둘러본 후 제지기술자들에게 물었다.
“어떤가? 이 건물을 제지소로 삼을 수 있겠나?”
“그렇습니다. 종이를 만들려면 물이 많이 필요한 데 강을 끼고 있고 실내가 넓으니 제지소를 차리기에는 적격입니다. 재료로 쓸 천만 준비되면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잘됐군. 그럼 금방 재료를 구해다 주겠네.”
계는 제지기술자들이 여불위가 마련해준 건물 실내에 제지 장비를 배치하는 동안 부하들과 함께 다시 함양 시내로 돌아가서 낡은 옷이나 헝겊 따위를 싼값에 사들이고 잡부로 쓸 일꾼을 고용한 다음 제지소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제지기술자들이 면종이 생산을 시작하자 계는 다시 여불위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다.
“여 상방님의 배려 덕분에 진나라 최초의 제지소가 면종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이오?!”
“보십시오. 상방님. 바로 어제 만든 면종이입니다.”
계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불위에게 지금까지 함양의 제지소에서 생산된 면종이 중 가장 품질이 좋은 종이 한 장을 봇짐에서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여불위는 그것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계에게 말했다.
“표면이 매끈하고 잡티가 적은 걸 보니 분명히 양품이구려! 매일 서도를 들고 죽간에 글을 새기느라 고생하는 관리들이 이 물건을 보면 크게 기뻐할 것이오. 본인과 함께 제지소에 가봅시다. 이게 정말로 그곳에서 생산된 물건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소.”
“알겠습니다. 여 상방님.”
계는 여불위를 함양 외곽의 제지소로 데리고 갔다.
함양의 제지소는 왕검성의 그것과는 달리 증기기관 대신 사람의 힘으로 물에 불은 천 조각을 가공했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여불위의 눈에는 그곳에 놓여있는 장비가 그저 신기해 보였다,
“호······! 저 뜰채 같은 것으로 절구로 빻은 천이 녹아있는 물에서 섬유를 건져내는 거로군! 야만스러운 동이족에게 저런 지혜가 있다는 게 놀랍구나!”
“어떠십니까? 여 상방님.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오! 임 공! 그럼 사업 얘기를 해봅시다. 그대의 사업에 천금을 투자하면 종이를 판 돈 중에서 몇 할을 주겠소?”
“처음에는 소인도 직접 함양에서 제지소를 운영해볼까 생각했었습니다만, 며칠 전부터 임치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군요. 그러니 제게 천금을 주시면 여 상방님께서 부리는 자들에게 종이 만드는 법을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임 공은 그 돈만 받고 진나라에서는 제지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여 상방님. 천금이 있으면 어차피 삼대가 일을 하지 않고 호의호식할 수 있으니 더는 돈을 벌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불위는 계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지는 제법이지만 포부가 작은 자로구나. 진나라에서만 면종이를 독점적으로 만들어 팔아도 천금이 아니라 억만금을 벌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아무튼, 조나라 수도 한단에 볼모로 잡혀 왔었던 장양왕을 얻었을 때 이후로는 가장 값진 재보를 얻게 됐어.’
여불위는 계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임 공. 대신 천금을 받고 나면 진나라에는 제지소를 차리지 않겠다고 약조하시오. 만약 그대가 약조를 어긴다면 본인이 부리는 자들이 공의 제지소에 찾아가 불을 지를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진나라는 물론이고 진나라와 국경을 접한 다른 나라에도 제지소를 차리지 않겠습니다.”
그후 계는 여불위와 함께 제지소를 나와서 그의 저택으로 돌아가 금붙이가 가득 담긴 상자 수십 개를 받았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천금이 실린 수레를 끌고 여불위의 저택을 나오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여불위가 만든 종이에 춘화를 그릴 준비를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