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형가를 만나다.
형가.
진시황 암살을 기도했던 셀 수없이 많은 암살자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의 문턱에 섰었던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객이자 협객.
그 이름이 귓가를 스치자마자 한부의 심장은 축젯날의 북처럼 고동쳤다.
‘형가라! 그 형가가 제 발로 날 찾아왔단 말이지! 석이의 말대로 검술 실력이 뛰어난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담력 하나만큼은 분명히 진짜배기겠지. 그런 인물을 데리고 있으면 분명 요긴하게 쓸 일이 생길 거야.’
한부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자 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전하. 매일 낯빛이 희멀건 하고 눈그늘이 턱에 닿은 문관만 만나시다가 젊고 당찬 무관을 만날 생각에 기쁘신 겁니까?”
“그저 너하고 계와 함께 온 천하를 누비던 젊은 시절이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아무튼, 네 말을 들으니 그 형가라는 청년에게 흥미가 생기는구나.”
“그 친구를 직접 만나보시면 분명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형가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살다가 몇 년 전에는 진나라를 유랑했었다는데, 그때 형가의 아버지가 비단 자락에 진나라 서부의 지도를 그렸다고 하더군요. 조선 왕실이 자기를 조선의 무관으로 등용해주면 기꺼이 그 지도를 전하께 바치겠다고 합니다.”
“뭐? 지도? 그 지도 실물을 직접 확인했느냐?”
“그렇습니다. 전하. 그 지도가 얼마나 정확한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진나라 영토의 여러 도시의 위치와 지명이 적혀있는 걸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한부는 석의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거 느낌이 싸한데? 혹시 그 녀석이 날 죽이러 온 걸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위나라 왕이었던 폐주나 연나라의 폐태자 단은 모두 진나라에 살고 있었지.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나 여불위가 형가한테 날 죽이라고 의뢰했을지도 몰라.’
원역사의 형가는 위나라에서 태어났지만,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중 대부분을 연나라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위, 조, 한 세 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매수한 다음 연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연나라 태자 단의 의뢰를 받아 진시황에게 연나라 지도를 바친다는 핑계로 접근해 지도 두루마리 안에 숨겨둔 비수로 그를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러니 지금의 그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고조선 왕실에 원한을 품고 한부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한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민하다가 다시 석에게 말했다.
“어쩌면 그 형가라는 청년은 내 목을 노리고 온 자객일지도 모르겠구나.”
“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의 말씀이라면 틀림없겠지요! 어서 병사를 풀어 그 음흉한 녀석을 잡아들이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라. 내 직감이 그렇다는 것일 뿐 아직 형가가 자객이라는 물증은 없다. 그러니 그자의 속내를 한번 떠봐야겠다. 너는 다시 그 청년에게 돌아가서 궁궐의 알현실로 데리고 와라. 나는 그동안 옷 아래에 갑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한부는 석과의 대화를 마친 후 예복 안에 경번갑을 입은 다음 갑옷과 환도로 무장한 충직한 호위병 열 명과 함께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긴 다음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나는 지금부터 연나라 왕이 사용했던 옥좌에 앉아서 기병대장 석이 데려올 인물을 기다리겠다. 너희는 옥좌 뒤쪽에 병풍을 가져다 놓고 그 뒤에 숨어 있다가 내가 휘파람을 불면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그자를 제압해라. 형가라는 자가 만약 정말로 나를 해치려 한다면 심문하여 배후를 캐낼 생각이니 되도록 죽이지 말고 생포해야 한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역사적인 인물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그 후 약 30분이 지나자 드디어 전설적인 자객 형가가 한부의 곁에서 10보 떨어져 있는 곳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고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올렸다.
“미천한 자에게 전하를 알현할 기회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소인은 위나라 출신 검객 형가라고 합니다.”
“석에게 얘기 들었다. 네 관상을 보고 싶으니 고개를 들어봐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형가는 지시대로 고개를 들어 한부와 눈을 마주쳤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은 마치 칼에 베인 상처처럼 길고 가늘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작은 입이 인상적이었고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손목이 두꺼운 걸로 봐서 옷 아래에는 단단한 근육이 감춰져 있는 게 분명했다.
한부는 그의 첫인상을 보고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널 추천한 기병대장 석이 말하길 네가 조선 왕실에 귀한 물건을 바치고 조선의 무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던데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그게 정말 쓸모가 있는 물건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구나. 지금 가지고 있다면 어서 꺼내 보아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형가는 대답과 동시에 품속에서 나무로 만든 심에 흰 비단이 감겨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한부는 그 물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바로 진나라 지도로구나. 기병대장 석. 형가에게 지도를 받아서 내게 가져오라.”
“알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석이 비단 두루마리에 손을 뻗는 순간, 형가가 뭔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사실 소인이 전하께 드리고 싶은 것은 지도 따위가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갑자기 두루마리 심의 한쪽 끝을 오른손으로 잡고 병뚜껑을 열 듯 세게 비튼 다음 세차게 잡아당겼다.
- 스르릉!
두루마리 심으로 위장한 검집에서 작은 비수가 뽑혀 나오며 서늘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한부는 즉시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입에 넣고 힘껏 휘파람을 불었다.
- 삐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석은 한부에게 미리 지시받은 대로 형가의 두 팔을 솥뚜껑 같은 큰 손으로 붙잡으면서 앞으로 넘어뜨린 다음 몸으로 짓눌렀고 환도로 병풍을 찢고 나온 호위병 열 명이 달려나와 형가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석은 왼쪽 볼을 알현실 바닥에 댄 채로 쓰러져있는 형가를 맹수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하마터면 내 손으로 태자께 자객을 안내할 뻔했구나! 비수를 뽑기 전까지 너를 믿었던 나 자신이 한심하구나! 네놈은 반드시 끓는 기름에 튀겨 죽여서 조선의 왕족을 해치려 한 자가 어떤 최후를 맞게 되는지 천하에 알려야겠다!”
그러나 형가는 석의 말을 듣고 겁을 먹거나 분해하기는커녕 알현실이 떠나가도록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이 녀석이 죽는 게 무서워서 실성했나?!”
석과 호위병들은 미친 듯이 웃어대는 형가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한부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저자를 심문할 터이니 모두 입을 다물어라. 형가. 내가 보기엔 넌 나를 암살하러 온 게 아니라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 같구나. 네가 정말로 내 목숨을 취하려 했다면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비수를 뽑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내 코앞으로 다가와서 지도를 바치기 직전에 검을 뽑는 게 가장 암살 성공률이 높을 테니 말이다.”
태자가 말하자 석과 호위병들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느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형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형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소인은 위나라의 폐주 위어와 진나라의 상방 여불위의 사주로 전하를 암살할 마음을 품고 조선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저 태어나기만 했을 뿐인 위나라에는 애틋한 감정이 없지만, 연나라는 소인이 스무 해를 살면서 열다섯 해를 보낸 고향이었기에 그 의뢰를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그 마음이 바뀌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소인은 계가 조선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에 진나라로 도망쳤다가 당연히 조선의 위정자들이 함께 도망치지 못하고 고향에 남은 이웃을 핍박하고 수탈하고 있을 거로 지레짐작하면서 비수를 품고 계의 성문을 지났는데 옛 이웃과 고향 친구들을 만나보니 오히려 어리석은 연나라 왕이 다스리던 시절보다 더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게 어찌 네가 내 손에 죽을 이유가 된단 말이냐? 그냥 품속의 비수를 버리면 될 일이지 않느냐?”
“악한 무리에게 속아 한때나마 바른 위정자를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사내대장부로서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 손에 죽으려고 이런 연극을 꾸몄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이 형가, 한때나마 협객답지 못한 불온한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협객답게 죽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석은 형가의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뭐 거의······.”
한부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형가를 보면서 원역사의 형가가 남긴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협객답게 인생 마이웨이로 사네. 괜히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말을 남긴 게 아니구나. 아무튼, 이 간이 크다 못해 부어오른 친구가 나를 좋게 봤다 이거지? 그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기엔 아깝지.’
한부는 잠시 자살할 생각으로 가득한 형가의 마음을 돌릴 궁리를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가. 그대는 협객으로 살다가 협객으로 죽고 싶다고 했으나 이대로 내 손에 죽으면 역사는 그대를 소인배로 기억할 것이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하! 이 형가가 어딜 봐서 소인배라는 말씀입니까?! 어떤 소인배가 부끄러운 실수를 깨끗한 죽음으로 갚으려 한단 말입니까?!”
“그대가 정녕 자신을 협객으로 여긴다면 어찌 과거의 잘못을 이승에 남겨두고 저승으로 도망치는 것인가? 그대의 의협심은 고작 그 정도란 말인가?”
“큭······! 그럼 전하께서는 소인이 뭘 어찌하여야 소인배의 오명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올바르지 못한 마음을 품은 게 부끄럽다면 천하를 평안케 하는 대업에 목숨을 바쳐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는 게 옳네. 게다가 내가 지금 그대를 기병대장 석의 말대로 끓는 기름에 튀겨 죽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대가 흉악범죄를 저질러 벌을 받은 범죄자인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자살한 협객인지 어떻게 알겠나?”
“음······. 듣고 보니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니 나를 해치려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목숨을 버릴 마음을 먹었다면 차라리 그 목숨을 내게 맡겨서 천하와 조선의 부흥을 위해서 써주게.”
“진심이십니까? 전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비수를 뽑아든 한량을 거두어 주신단 말씀입니까?”
“군자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법일세. 암부라는 조직에 자네 자리를 마련해두지. 그림자 속에서 조선과 천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몸담은 곳이네.”
“암부라······! 음지에서 대의와 의협심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협객이 모인 곳인 모양이군요! 협객 형가, 오늘 이 시간부터 조선의 태자 전하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자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