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법률과 신문과 인재
비는 한부와 법에 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눈 다음 법가 사상에 근현대 법률이론이 접목된 율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부는 한비의 저택에 고조선 출신 학자 몇 명을 보내서 그에게 법전을 만드는 데 사용할 단군정음과 아라비아 숫자를 가르치도록 지시했다.
한비는 효율적인 통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법가의 학자였기에 금방 표음문자의 편리함과 효용성을 깨닫고 율령 제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빠르게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그렇게 한비가 여러 고조선 출신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율령을 만들어나가는 동안 한부는 법가 최고의 학자가 완성할 새 법을 효율적으로 전파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저 지방 현감한테 법전 하나 가져다주고 그 동네 백성들에게 잘 가르치라고 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겠지. 정말 오랜만에 인터넷하고 스마트폰이 그리워지네. 인터넷은커녕 신문도 없는 시대니 이거 원······. 잠깐만? 신문? 신문은 조선 시대에도 있던 거니까 지금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원역사의 조선 왕실은 중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왕에게 올라간 상소문의 내용이나 조정의 인사이동 등 조정의 소식이나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의 소식을 기사화한 신문인 조보를 발행해왔다.
조보는 조선시대의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이 제작과 배포를 담당하는 일종의 관보(官報)로서 구독료를 내는 전국의 양반에게 배포되었는데 지방에 사는 양반들은 한양에서 온 관리가 몇 달 치 조보를 가져다주면 그것을 읽고 조정의 정보를 얻었다.
또한 서기 1577년의 한양에서는 민간업자가 사헌부의 허가를 받은 후 목판으로 민간 조보를 인쇄하여 양반이 아닌 백성들에게 인류 역사상 최초의 상업신문을 판 일도 있었다.
한부는 이미 종이를 발명하고 증기기관도 상용화한 고조선이라면 인쇄신문을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목판이 아니라 금속활자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활자에 쓸 먹물 개발이 문제긴 하지만 왕검성에 있는 기술자들이 어떻게든 해줄지도 몰라!”
그는 즉시 궁궐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긴 후 한지에 금속가공 기술자와 먹물 장인을 보내 달라는 서신을 작성한 다음 시중을 드는 관리를 불러서 건네주며 말했다.
“이 서신을 왕검성의 궁궐로 보내라. 나라의 발전에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왕검께서 전달해야 할 것이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관리는 두 손으로 서신을 받은 후 종종걸음으로 서재 밖으로 나갔다.
그 후 한부는 진나라가 지난 전쟁에서 큰 패배를 당하면서 입은 손실을 복구하느라 주변국 침략을 자제하는 동안 한비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율령을 다듬어나가면서 왕검성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왕검성에 전령을 보낸 지 몇 달이 흘러 기원전 246년이 가을이 끝나갈 때 그에게 도착한 제2 공조의 수장 크테시비우스 박사의 답변은 조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음······. 지금의 기술력으론 금속활자로 신문을 찍어내는 건 아직 무리란 말이지. 금속 가공기술은 훌륭하지만, 역시 금속활자용 먹물을 만들 화학기술이 문제구나. 너무 아쉽구만.”
고조선의 금속가공 기술자들은 한부가 미래의 지식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기 전에도 이미 무늬와 무늬 사이의 간격이 mm 단위인 섬세한 은거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금속 가공기술을 익히고 있었기에 금속활자를 만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동아시아 전역에서 붓과 먹물보다 죽간과 서도가 훨씬 자주 사용되는 기원전 3세기의 금속활자에 사용되는 점성이 강한 먹물을 개발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뭐, 어쩔 수 없나? 현대 한국에서도 금속활자용 먹물 만드는 기술이 실전돼서 학자들이 그 먹물이 필요할 때마다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는데 고조선 시대에 몇 달 만에 떡하니 만들어 내긴 어렵겠지. 우선 필사본 신물을 만들 준비부터 해보자.”
한부는 왕검이 보낸 서신을 내려놓고 시중을 드는 관리를 시켜 박사 악간을 궁궐로 부른 다음 알현실로 향했다.
악간은 태자의 부름을 받자마자 입궐하여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있는 한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박사 악간이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어인 일로 소신을 찾으셨습니까?”
“악 박사에게 중요한 직무를 맡기고자 불렀소. 단군정음과 서쪽 대륙의 글을 모두 쓸 줄 아는 선비를 관리로 채용해 새로운 관청을 만들고 새로 뽑은 관리들을 부려 매주 계의 관청과 다른 나라의 소식을 적은 문서를 여러 부 작성해 주시오. 앞으로 그 문서를 조보라 부르겠소. 아, 새 관청 이름도 조보원이라고 지으면 되겠구려.”
“왕검께 정기적으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작성한 조보는 왕검 폐하와 지방의 현감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제후와 귀족들에게 배달할 것이오.”
“관직에 오르지 않은 귀족에게도 공문서를 보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경도 잘 알다시피 이제 조선은 전국칠웅 중 초나라와 진나라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국이 되었소. 이는 물론 기쁜 일이나 덕분에 왕검성의 제후와 관리들은 계의 소식을 빨리 알기 어렵고 계에서도 왕검성의 소식을 금방 알 길이 없어졌소. 조보를 발간하면 분명 이런 불편함이 많이 해결될 거요.”
“대단히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하오나 아무리 조선의 재정이 풍부해도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제후와 귀족에게 보낼 조보를 만드는 데 들어갈 막대한 예산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옵니다.”
“처음부터 모든 제후와 귀족에게 조보를 보낼 생각은 없소. 또 현 관직에 오르지 않은 제후와 귀족에게는 돈을 내는 자에게만 조보를 배달할 생각이오.”
“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자는 기꺼이 제값을 치르고 조보를 사서 보겠지요. 그 방법이라면 너무 많은 예산이 들어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게다가 계에서 처음 발행한 조보가 반응이 좋으면 왕검성의 조정에서도 조보를 발행하여 계에 보낼지도 모르오. 나아가 진나라를 제압하고 천하에 전란이 사라져 국가기밀이 적국에 새어나갈 걱정이 없어지고 금속활자용 먹물이 발명되면 백성이 스스로 조보를 발간하여 파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오.”
“아직 왕검성의 공인들이 금속활자용 먹물을 개발 중이 모양이군요! 그 물건이 세상에 나오면 학문과 지식이 전해지는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질 겁니다!”
“본태자도 그리 생각하오. 그러니 더더욱 조보 발간을 서둘러 주시오. 왕검성의 관리와 공인들도 조보의 효용성을 알아야 금속활자용 먹물 개발을 서두를 마음이 들 테니 말이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박사 악간은 한부에게 인사를 하고 알현실 밖으로 나가서 바로 한글과 한자를 모두 읽고 쓸 줄 아는 선비 2백 명을 문관으로 채용한다는 공문을 작성해 진나라를 제외한 전국칠웅의 모든 나라에 배포했다.
고조선이 많은 문관을 새로 뽑는다는 소문은 관직에 오르지 못해 반백수로 살면서 답답해하고 있던 선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순식간에 중원 대륙에 퍼져 나갔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계에 사는 조선의 태자가 2백 명이나 되는 문관을 새로 뽑는다고 했다더군! 비록 말단의 관직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선비 된 자가 입에 풀칠하려고 돗자리를 짜서 파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2백 명이나? 그 많은 문관을 왕실도 아니고 일개 지방 관청에서 부린단 말인가?”
“계의 관청은 사실상 조선의 태자가 직접 다스리는 제후국이지잖나? 봉급도 같은 직급의 다른 나라보다는 더 많이 준다는 모양일세!”
“그거 반가운 소식이구먼! 그런데 어떤 인재를 뽑는다고 하던가? 조선의 태자는 불가를 창시했으니 역시 불경을 줄줄이 꿰고 있어야겠지?”
“아닐세. 그저 글을 막힘없이 읽고 쓸 줄 아는 자는 선착순으로 뽑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뭐라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먼! 어서 짐 싸들고 계로 출발하세!”
“이 사람아! 끝까지 들어보게! 조선은 동이족이 다스리는 나라이지 않은가? 당연히 중원의 글과 동이족의 글을 모두 쓸 줄 아는 자만 관리로 뽑으니 먼저 동이족의 말과 글을 익혀야 관리로 뽑힐 수 있다고!”
“어? 동이족의 글을 익히라고? 텄네! 텄어! 말이야 그 나라에서 살다 보면 익힌다고 쳐도 어느 세월에 몇천 개나 되는 새 글자를 외운단 말인가!”
“그게 동이족의 글은 의미가 아니라 음을 표현해서 글자 몇십 개만 외우면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도 능숙하게 쓸 수 있다는구먼. 어차피 이렇게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사느니 계에 가서 관직에 도전해 보겠네.”
“글자 몇십 개 외우는 정도라면 할만하겠군! 좋네! 나도 함께 가세!”
그후 기원전 246년의 겨울이 끝나기 전에 관직을 노리고 중원 대륙 곳곳에서 몰려온 수천 명의 선비가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익히면서 때아닌 공무원 시험 열풍을 일으켰다.
한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비효과로 많은 인재가 계에 몰려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이거 대박이네! 그저 신문을 만들려고 했을 뿐인데 온 천하의 인재가 몰려들고 있다는 말이지! 대박이네!”
물론 지금 계에 몰려들고 있는 인물들은 전국칠웅 중 가장 약소국인 한나라에서 조자 쓰임을 받지 못하는 선비뿐이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재능을 발휘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한신도 젊은 시절에는 저잣거리에서 한량 노릇이나 하다가 불량배를 가랑이 사이를 지나갔고 카이사르도 30대 후반까지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다잖아. 이거 한동안 돌멩이 속에서 옥을 골라내는 재미가 있겠구나. 나도 한번 전국사군자 흉내 좀 내볼까?”
그는 휘하의 관리들에게 지시해 계의 궁궐에 숙소로 쓸만한 건물을 올리면서 다시 박사 악간을 불러서 말했다.
“악간 박사. 최근 조보원의 관리가 되려고 계를 찾는 선비가 나날이 늘고 있다던데, 그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좀 찾아냈소?”
“계에 찾아온 선미 무리는 숫자만 많았지 조선의 말과 글을 익힌 자가 그리 많지 않아 실속이 없사옵니다. 전하.”
“그럴 수밖에 없을 거요. 최하급 관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몰려온 선비라면 일을 해서 생계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말과 글을 배워야 할 테니 말이오. 그러니 경이 그들 중에서 아직 조선의 말과 글을 익히지 못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를 추려내서 내게 알려주시오. 그럼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학업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하겠소.”
“과연! 위나라 왕이나 초나라의 춘신군처럼 널리 인재를 모으시려는 거군요!”
“그렇소. 미관말직을 맡길 인재도 후하게 대접하면 분명 삼공의 자리에 앉힐만한 인재도 조선을 찾을 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머지않아 천하에 전국사군자라는 말은 사라지고 대신 전국오군자라는 신조어가 생기겠군요!”
그 후 한부와 박사 악간과 틈틈이 저잣거리에 계에 몰려든 선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식과 재능이 넘치는 자들을 선별하여 궁궐로 초대해 숙식을 제공하고 때로는 학업에 필요한 서적과 문방구를 지원해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더 흘러 해가 바뀌자 계의 궁궐에는 약 2천 명의 식객이 묵게 되었고 무예나 병법에 자신 있는 자들까지 계에 몰려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원전 245년 2월이 된 어느날, 기병대장 석이 한부를 찾아와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전하! 소장이 오늘 진흙 속에서 옥을 찾아냈습니다!”
“석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오늘 낮에 저잣거리를 거닐다가 한 청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검술이 뛰어나고 성격이 당차서 크게 쓰일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무예는 분명 대단하겠구나. 그 사람 이름이 뭐라더냐?”
“위나라 출신인 형가라는 협객입니다.”
“뭐? 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