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한비자를 설득하다.
한비는 석의 구호에 맞춰 힘겨운 운동을 마치고 허리를 기역 자로 숙이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헉!”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한비 나름대로는 태자의 눈을 의식해서 흙바닥에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었다.
한부는 그 모습을 보고 이룡도에서 여러 동문과 함께 체력을 단련하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병대장 석이 짠 수업을 전부 소화하셨군요. 훌륭합니다. 망한군.”
“저, 전하께서 보, 보고 계시는데 어, 어찌 중간에 그만 두, 두겠습니까? 그, 금방 수건으로 땀을 닦겠습니다. 그 후에 함께 아,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지 말고 석과 함께 먼저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평소처럼 목욕을 마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 어찌 제가 전하를 기, 기다리게 하게, 겠습니까?”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는 망한군도 대화에 집중하기 어렵지 않겠소? 정신이 맑은 공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러니 괘념치 말고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오시지요.”
“배, 배려에 감사 드, 드립니다. 전하.”
한비는 태자에게 인사한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가 시종이 미리 데워둔 목욕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었다.
그동안 한부는 석과 함께 저택의 응접실의 탁자 앞에 앉아서 하인이 내온 간식을 들면서 그를 기다렸다.
석은 은접시에 놓여있는 잣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킨 다음 한부에게 물었다.
“전하. 그러고 보니 소장이 망한군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시간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운동이 끝나가는 시간에 맞춰서 오셨으면 귀한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망한군의 원한을 조금이나 풀어주려고 일부러 조금 이른 시간에 왔다.”
“네? 볼모를 객경으로 대접하고 있는데 원한이라니요??”
“그렇다고는 해도 내 명령으로 하기 싫은 운동을 매일 억지로 하게 됐으니 내가 자기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렇게 망한군이 목욕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거다. 이렇게 내가 먼저 성의를 보여야 망한군도 조선 왕실을 위해 성심껏 일해줄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
“아······. 거기까지 헤아리시고 일부러 이른 시간에 오셨군요. 다시 한번 전하의 깊은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비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한부의 앞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래 기, 기다리시게 하여 소, 송구스럽습니다. 저, 전하.”
“괘념치 마십시오. 망한군. 공과 나눌 이야기를 머릿속에 정리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분명 천하를 다, 다스리는 법도에 대, 대하여 논하고 시, 싶으시다고 말씀 하,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공은 직하학궁이 배출한 유학자 중 맹자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선비라고 소문이 자자한 순황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순황의 통치론은 어질고 도덕적인 군주가 나라와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는 왕도론이었지요? 언뜻 듣기에도 옳은 말로 들리는 데 공은 왜 스승과 결별하고 법가에 입문한 겁니까?”
한비는 태자의 질문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격앙된 말투로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왕도론을 비롯한 유학자 무리의 주장은 모두 탁상공론이요! 현실과는 동떨어지는 신선놀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 손에서 나온 글은 듣고 읽기에는 아름다우나 혼란한 천하를 평안케 하는 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한비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한부는 그런 점을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겼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법가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유학자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에게 예를 가르쳐야 천하가 평화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세월에 몇천만 명이나 되는 백성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면서 예와 염치를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평민들에게 어떻게 옛 성현의 말씀을 이해시킨단 말입니까? 그러니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난세에 나라를 평안케 하려면 세밀하고 엄격한 율령으로 백성을 통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엄격한 법으로 백성을 옭아매면 민심이 흉흉해지지 않겠습니까?”
“정치를 모르는 자들은 흔히 민심을 얻으면 천하가 평화로워진다고 하지요. 하지만 정말로 민심을 얻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면 이윤이나 관중 같은 명재상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없었을 겁니다. 백성은 어리석고 순박하여 마치 갓난아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등에 난 고름을 짜내지 않으려고 한다고 부모가 그 아이를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시려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겠습니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먼저 엄격하고 세밀한 율령을 반포하여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벌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리석은 백성이 법을 무서워하고 따를 것입니다. 또 법을 만드는 과정에선 백성의 아우성에 현혹되지 않아야 나라를 망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음······. 확실히 유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만한 이야기군요.”
“전하! 왜 유가의 선비들이 법가를 경계하는 줄 아십니까?! 법가는 군주가 아닌 자가 권세를 얻어 군주를 위협하는 일을 경계하는 데 유학자를 자칭하는 무리 중에는 널리 인재를 모은다는 핑계로 가신과 사병을 모아 법을 어지럽히고 자신을 이롭게 하며 나라를 축내어 내 집을 편하게 하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술수와 법을 모두 아는 유능한 선비를 등용하여 왕실을 우롱하는 권세가를 쫓아내야만 나라가 평안해질 겁니다.”
한비는 그렇게 열변을 토하고 나니 좀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이, 이것이 버, 법가의 선비로서의 제, 제 견해입니다.”
한부는 그의 논설을 모두 듣고 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법가는 익히 알고 있던 데로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효율적인 사상이네. 이 사상을 그대로 정치에 적용하면 전란의 시기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평시에는 나라를 망치겠지.’
원역사의 진나라는 일찌감치 법가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상앙의 변법으로 대표되는 개혁정책을 시행하여 마침내 중원을 통일했다.
하지만 난세가 끝나고 전쟁과 나라밖의 적이 사라진 세상에서 진나라의 백성들은 법가의 지나치게 엄격한 통치이념에 나날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이 죽은 후 잔혹한 법률과 무거운 세금에 지친 백성이 폭도로 변하여 전국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제국은 1백 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한비자의 법가 사상에 근현대의 법학 이론을 접목하여 고조선을 통치할 좀 더 유연한 법체계를 만들 생각이었다.
“과연 듣던 대로 학식이 대단한 분이구려. 하지만 난세가 끝난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백성이 엄격한 법을 두려워하며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호랑이를 피해 다니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호랑이 사냥에 나서게 되는 법입니다. 공의 말을 들으니 난세와 평시에 시행하는 법을 달리하여 유연한 법치를 펼쳐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입니까?”
“온 백성이 힘을 모아 외적에 맞서야 할 때는 공이 말한 엄격한 법률이 시행돼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평시에는 백성이 법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법을 좋아하게 해야 진정한 법치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버, 법을 좋아 하, 하는 백성이 있다는 말은 드, 들어본 저, 적이 없습니다 ”
“평시에는 전시보다 덜 엄격한 율령을 시행하고 적은 세금을 거둬서 백성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이오. 그리고 율령을 만들고 시행하는 여러 가지 원칙을 제정하여 온 백성은 법을 신뢰하고 좋아하게 될 거요.”
“어, 어떻게 그, 그런 법을 마,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먼저 법에 명시되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짓을 저지르더라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율령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 백성은 법을 발밑에 숨어있는 함정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방패로 여기게 되겠지요. 앞으로 이를 죄형법정주의라 부르겠소.”
“도저히 믿을 수 없군요! 그럼 율령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죄를 저지른 자는 왕도 처벌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럼 아직 율령에 적혀있지 않은 흉악한 죄를 지은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자는 처벌하지 않고 대신 즉시 율령을 수정하여 다시 같은 행동을 하는 자는 엄하게 벌할 것이오.”
“율령을 바꾸면 결국 먼저 그 죄를 지은 자는 처벌을 면치 못하겠군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백성은 다시 법을 신뢰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어떤 율령이 제정되기 이전에 그 율령에 명시된 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해선 안 되오. 이는 소급효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허······! 과연! 그런 방법이 있군요!”
“이게 다가 아니오. 한번 재판을 하여 판결이 난 사안에 대하여는 다시 재판하는 것을 금지해 모든 백성이 언제 다시 재판장에 끌려가서 벌을 받을지 불안에 떨면서 살지 않아도 될 것이오. 이 이론은 앞으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부르겠소.”
한비는 근현대의 법률이론을 듣고 벼락에 맞은 듯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췄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다.
“이럴 수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전하! 법가에 입문한 지 스무 해가 다 되어가건만 그와 같은 이론을 생각해낸 선비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과연 그와 같은 원칙을 지켜서 만든 법이라면 백성이 법 아끼고 사랑하겠군요! 군주나 관리의 일시적인 변덕에 가혹한 형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입니다!”
“법가를 대표하는 선비가 막 머리에서 나온 다듬어지지 않은 의견을 그토록 극찬하니 쑥스럽구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전하! 전하의 말씀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진정 자비롭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법에 해박한 선비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뛰어난 통치이념입니다!”
“다만 이런 원칙을 모두 반영한 율령을 만들려면 법에 해박하고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는 유능하고 청렴한 선비가 필요한데 조선에는 아직 이 일을 맡길만한 적임자가 없어서 고민이 많습니다.”
“전하!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 꼭 제게 천하에 진정한 법치를 구현할 율령을 만들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선과 한나라는 전쟁을 치르던 사이입니다. 조선 왕실을 위해 일했다는 게 한나라에 알려지면 공이 본국에 돌아가고 나서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조선 왕실이 서자 출신의 볼모인 저를 객경으로 대접하시는 것만 봐도 조선이 한나라를 멸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또 제가 조선에서 완성한 율령을 한나라 왕실이 받아들여 나라를 평안케 하면 조국의 부흥에도 도움이 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공을 율령 제정 책임자로 임명하겠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 망한군.”
“저야말로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