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한비의 고난
한나라가 내놓은 전쟁배상금을 우마차에 싣는 작업이 끝난 후 한부는 위나라 왕과 작별인사를 나눈 다음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하북의 계로 돌아왔다.
갈색 한혈마를 탄 태자의 뒤를 이어 상장군 무명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전리품으로 가득한 우마차 행렬이 계의 성문을 지나자 대로변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백성이 공중에 꽃잎을 뿌리면서 개선군을 환영했다.
“태자 전하 만세! 상장군 만세!”
“이제 중원의 패자는 우리 조선이다!”
한부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환호성을 받으며 계의 궁궐로 돌아온 다음 가장 먼저 진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와 병사들을 칭찬했다.
“이번에 중원에서 가장 강하다는 진나라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모든 장수와 병사가 군율을 엄격히 지켜 한 몸처럼 움직여준 덕분이오. 따라서 진나라군에게 빼앗은 전리품과 한나라 왕에게 받은 물건을 모두 이번 전쟁에 참여한 장수와 병사들에게 하사하여 공을 치하하겠소. 상장군 무명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장정들의 지위와 공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전리품을 분배하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전후 논공행상을 마친 다음 한부는 왕검성에 전령을 보내 승전보를 전하고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상장군 무명과 장군 이목과 극신, 그리고 박사 악간을 비롯한 하북의 통치를 담당하는 문관을 궁궐로 불러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모든 회의 참석자가 알현실에 모이자 상석에 앉은 한부가 신하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로 우리 조선은 중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되었소. 그리고 경들도 잘 알다시피 진나라는 최근 몇 년 사이에 30만 명이나 병사와 많은 물자를 잃어 국력을 허비했소. 그러니 이제는 우리 조선이 진나라의 국력을 넘어섰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경들은 어떻게 보시오?”
그 말에 몇몇 문관이 머리를 조아리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해댔다.
“전하. 조선은 천하 모든 나라 중 가장 발달한 농법 덕에 나날이 인구가 늘고 있으며 활발한 무역으로 재정이 넉넉하며 병사들도 강하고 용맹하니 가히 천하제일의 나라라 할 만합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진나라는 주변국을 자주 침략하여 일찌감치 천하의 인심을 잃은 데다 무안군 백기를 잃은 후에는 약소국인 한나라나 이미 멸망한 주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적이 없으니 감히 중원의 패자를 자처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상장군 무명이 문관들의 대답을 고개를 젓더니 태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하. 분명 진나라는 이번 전투에서 패해 큰 손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중원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비옥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파촉 땅을 차지하고 있어 재정도 풍부합니다. 그 덕에 진나라는 20만 장정을 잃은 지금도 40만 명이 넘는 병사를 모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음······. 아직도 그만한 여력이 있단 말인가.”
원 역사의 여러 사료에 따르면 진시황은 한, 조, 위 세 나라를 멸망시킨 후 젊은 장군 이신의 호언장담을 믿고 그에게 병사 20만 명을 맡겨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초나라의 명장 항연이 이신의 군대를 물리치면서 진나라는 졸지에 초나라 원정군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진시황은 곧바로 60만 대군을 다시 징집한 다음 전설적인 명장 왕전에게 맡겨서 기어코 초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지금의 진나라는 아직 삼진의 세 나라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막 점령한 지역에서는 내정이 안정되기 전에 병사를 징집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진나라나 원 역사에서 초나라를 칠 때의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한부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상장군의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 동안은 전쟁을 멈추고 대신 외교와 내정에 힘써야겠소. 진나라가 외교 무대에서 고립되고 패전의 상처가 낫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내실을 다질 좋은 기회일 테니 말이오. 우선 불가와 유가, 그리고 법가와 사상을 반영한 율령을 만들어서 하북과 요서, 그리고 요동에 반포할 것이니 경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앞으로 맡게 될 직무에 성실히 임해주길 바라오.”
태자가 말하자 박사 악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전하. 법가의 학자들은 늘 군주가 가혹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만 군주가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냉정한 학문이 자비로운 언행을 중시하는 불가나 예와 염치를 강조하는 유가와 잘 어울릴 수 있을는지요?”
“독도 적당히 쓰면 약이 된다는 말이 있잖소? 왕검 폐하나 본태자는 진나라의 왕이나 상방 여불위처럼 지나치게 가혹한 법으로 백성을 괴롭힐 생각이 없으니 안심하시오. 악 박사.”
“그렇다면 법가의 학문에 통달하면서도 다른 제자백가 사상에도 밝은 유능한 학자가 필요할 터인데 소신은 아직 조선 땅에 그런 인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또한 걱정할 필요 없소. 이번에 한나라에서 볼모로 데려온 왕자 한비라면 능히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오.”
“볼모에게 나랏일을 맡기신단 말씀입니까? 몹시 이례적인 일이지만,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니 이미 많은 고민을 하시고 그런 결정을 내리셨겠지요. 박사 악간, 전하의 뜻에 따라 한비 왕자를 도와 나라에 법도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겠습니다.”
박사 악간이 한부의 뜻에 따르자 다른 문관들도 새 율령을 만들라는 태자의 명령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후 한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국무회의를 마친 다음 기병대장 석을 궁궐의 서재로 불렀다.
석은 한부와 함께 서재에 들어서면서 주변에 업무를 보는 문관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에게 물었다.
“전하. 어인 일로 소장을 이렇게 은밀한 곳으로 부르셨는지요?”
“왜긴? 계에게 자주 그러는 것처럼 네게 밀명을 내리려는 거지.”
“밀명······! 듣기만 해도 사나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단어로군요! 말씀만 하십시오. 전하. 어떤 위험한 임무라도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나이다!”
“딱히 위험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조선의 밝은 장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임무지.”
“그게 뭡니까? 전하? 애태우시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앞으로 한 달에 26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나라 왕자 한비의 체력을 단련시켜라. 물론 식단관리도 해주고.”
“네?! 그 비쩍 마른 산송장을 말입니까?!”
“오늘 회의에서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느냐? 앞으로는 한비 왕자를 객경(客卿)으로 대접하겠다고 했잖으냐! 공석에서는 절대로 그런 망언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
“그 말라깽이가 재상과 같은 대우를 받다니······.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한비 왕자가 이룡도에서 배운 체력단련법을 잘 따라올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그 방법 그대로 운동하게 하면 크게 다치겠지. 막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재활 훈련을 한다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강도가 약한 운동 위주로 시켜라.”
“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 * *
석은 한비의 개인 PT 코치로 임명된 후 매일 아침 그의 저택에 찾아가서 운동을 시켰다.
한비는 34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걷기 말고 다른 운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한부의 명령을 거역하면 객경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녹슨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던 날 아침, 한부는 한비에게 봉호를 알려준다는 핑계로 석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한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예고 없이 한비의 집에 찾아갔다.
그가 한비의 저택 앞에 도착하자 한부를 호위하는 병사 중 한 명이 저택의 문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조선의 태자께서 한비 왕자를 뵙고자 찾아오셨다! 어서 문을 열어라!”
그러자 저택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한비가 한나라에서 데려온 어린 시종 한 명이 대문을 열면서 서툰 한국조어로 한부에게 말했다.
“어······ 어서 오십쇼! 태자 전하!”
“오냐. 한비 왕자는 안에 계신가?”
“한비 왕자는 운동 중입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왕자께서 땀 흘려 운동하시는 모습이 보고 싶으니 체력단련장으로 안내하거라.”
“이쪽으로 오십쇼!”
한부가 시종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널찍한 마당에 마련된 체력단련장에 도착하자 그의 눈에 품에 모래가 들어있는 자그마한 포대를 안고 스쿼트를 하는 한비의 모습이 보였다.
“흐어~!”
한비는 모래 포대를 안은 채로 하체를 움직일 때마다 마치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오만상을 쓰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고 석은 그런 그를 짜증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왕자님! 이제 겨우 다섯 번째입니다! 열 개를 더해야 삼십을 셀 때까지 쉬실 수 있습니다!”
“흐어어어! 대체 선비인 내가 왜 무관처럼 체력을 단련해야 한단 말이오!”
놀랍게도 한비는 진심으로 짜증을 내면서 불평을 늘어놓을 때는 조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런 한비의 등 뒤에 서 있던 그의 처가 모래 포대를 놓아버리고 바닥에 주저앉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서 일어나세요! 겨우 보름 사이에 당신 안색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아세요?! 선비든 무관이든 우선 건강해야 무병장수하면서 큰 뜻을 이룰 거 아니에요?”
“아, 알겠소. 지, 진정하시오. 자, 잠깐 다리에 히, 힘이 풀려 주, 주저앉은 것뿐이오.”
한비는 아내의 성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모래 포대를 주운 다음 다시 스쿼트를 시작했다.
한부는 법가를 대표하는 대학자의 허당스러운 면모를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았다.
“풋!”
기병대장 석은 한부의 웃음소리를 듣고 황급히 그를 바라보면서 읍했다.
“기병대장 석이 전하를 뵙습니다. 거기 계신 줄 모르고 수업에 전념하느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러자 한비와 그의 처도 허리를 숙이면서 한부에게 인사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저, 전하. 기, 기별도 주, 주시지 않고 어, 어인 일로 어려운 거, 걸음을 하셨는지요?”
“연락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실은 아침에 계에 도착한 전령이 왕검께서 그대에게 봉호를 하사하셨다고 말하길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주러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보, 봉호 말씀입니까? 어, 어떤?”
“왕검께서 그대에게 망한군(望韓君)이라는 봉호를 하사하셨소.”
망한군은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제후라는 뜻의 봉호였다.
한비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한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저, 저에게 어, 어울리는 봉호로군요. 왕, 왕검께 지, 진심으로 감사 드, 드립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운동이 끝나면 본태자에게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 천하를 다스리는 법도에 관해 법가를 대표하는 선비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