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35화 (135/195)

[135화] 법가의 대학자와 만나다.

기원전 246년 6월 말, 장군 왕흘과 20만 명에 가까운 병사를 잃은 여불위는 기껏 위나라로부터 빼앗은 임진의 강 서쪽의 영토까지 포기하면서 휘하의 장수와 병사를 모두 데리고 함곡관 너머로 퇴각했다.

그 후 고조선과 위나라의 연합군은 열흘 만에 진나라군이 점령했었던 하양 등의 영토를 손쉽게 탈환한 다음 진나라를 도와 위나라를 침략하려 했던 한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남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마침내 한부와 위나라 왕이 이끄는 35만 대군이 위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국경을 넘자 위‧한 접경지역을 지키던 한나라군 장수들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적군을 막아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성안에 틀어박혀서 한나라 왕 한연에게 전령을 보내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고조선‧위나라 연합군이 워낙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위나라의 수도 양적을 포위하는 바람에 한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주변국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은 병력을 한데 집결할 시간조차 벌지 못했다.

한나라의 늙은 왕 한연은 노구를 이끌고 성벽 위에 올라 도성을 겹겹이 포위한 고조선과 위나라의 35만 대군을 내려다보고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깊이 탄식했다.

“어찌 하늘이 이토록 무심하실 수 있단 말이냐! 오로지 종묘사직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온갖 굴욕을 참아가며 진나라를 달래 왔더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작년인 기원전 247년에 진나라의 소양왕이 급사한 후 함양에서 열렸었던 왕의 장례식이 진행됐을 때, 고조선 왕실은 진나라에 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초, 조, 위, 제 네 나라는 재상을 사절로 보내 위로의 뜻을 전했지만, 오직 한나라만은 왕이 몸소 상복을 입고 함양까지 조문을 갔다.

일국의 왕이 타국의 왕의 경조사에 직접 찾아가는 건 종주국과 속국 사이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 전국시대가 시작된 후로 전국칠웅에 속한 나라들 사이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나라 왕은 진나라 소양왕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날의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설움이 복받쳐 올라서 코끝이 시큼해졌다.

“조선의 동이족이 진나라군을 물리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왔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무슨 수를 써야 독조를 부리는 흉악한 무리로부터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늙은 왕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의 제후와 대신들은 주군의 탄식을 듣고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나라 왕은 그런 신하들을 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후······. 이 많은 신하 중에서 나라를 구할 방도를 내놓는 자가 한 명도 없단 말이냐. 경들은 들어라. 이제 짐은 조선의 태자와 위나라 왕의 앞으로 나가서 자비를 구걸할 생각이다. 만에 하나 짐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무의미한 저항을 하지 말고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백성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여라.”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초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러 떠난 전령이 도성 밖으로 나간 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 낭중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어찌하여 주나라 봉국의 후손인 폐하께서 조선의 동이족에게 고개를 숙이신단 말입니까?”

“나라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수모는 견뎌내는 수밖에. 짐은 이미 나라를 지키려고 서융의 피가 섞인 진나라의 융적에게도 머리를 조아린 적이 있다. 동이족

태자에게 석고대죄하여 짐의 백성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다면 몇 번이라도 이마를 바닥에 댈 것이야.”

늙은 왕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자 그를 만류하던 신하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한나라 왕은 성벽 위에서 내려와서 가지고 있는 어의 중 가장 수수한 옷을 입고 몇몇 신하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고조선군의 군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고조선군 숙영지 입구에 도착한 후 숙영지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지휘관 막사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란히 상석에 앉아있는 한부에게 엎드려 절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한나라의 왕 한연이 조선의 태자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한부는 자기 아버지인 한열 왕검보다 스무 살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의 왕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뭐야?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지만, 왜 갑자기 분위기 남한산성인데? 이게 한 번도 패권국 근처에도 못가 본 한나라가 난세에서 살아남겠다고 선택한 방법인 모양이구나.’

그는 한나라 왕의 모습을 보고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나라의 왕이여. 무슨 일로 본태자를 찾아왔는지 말해보시오. 다만 그대와 한나라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입에 담을 말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편이 좋을 거요.”

“우리 한나라가 군대를 움직여 조선의 동맹국인 위나라를 침략하려 한 것을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하러 왔습니다. 전하.”

“어이가 없구려! 지금에 와서 그 일을 몇 마디 말로 무마할 수 있을 거라 여겼소?!”

“전하. 우리 한나라는 강대한 진나라의 협박에 가까운 원군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위나라 침략에 병사를 보탰을 뿐입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 조선을 진나라에 대항하는 합종국의 맹주로 받들고 다시는 조선, 그리고 조선과 동맹을 맺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음······. 한나라가 진심으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진나라를 벌하는 데 동참하겠다면 포위를 풀고 군사를 물리지 못할 것도 없지. 대신 조선과 위나라는 이번 침략을 막느라 많은 물자를 소비했으니 그에 대한 배상금을 내놓아야 할 것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또 한나라의 태자를 조선에 볼모로 보내시오. 그대가 본태자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포위를 풀고 태자와 함께 계성으로 돌아가겠소.”

“태······ 태자를 말입니까?”

“그대는 이미 형제의 나라인 위나라를 공격해 다른 나라의 신뢰를 잃었소.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사리에 맞지 않겠소?”

“조선의 태자시여. 제 이마에 밭고랑처럼 깊이 팬 주름을 보십시오. 제 나이가 이미 여든에 가까워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고 태자 또한 예순이 다 되어가는 노인입니다. 전하의 요구는 합당한 것이오나 늙은 아들이 다른 고장의 물과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비보다 장례를 치를까 봐 걱정이 큽니다.”

한부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한나라 왕의 표정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태자 대신 태자의 아들 중 한 명을 볼모로 데려가겠소. 이 제안에도 난색을 보인다면 오늘 저녁에는 양적성의 하늘 위를 나는 백 마리의 짐새를 볼 수 있을 거요.”

“허······! 전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태자의 아들들을 전하의 앞에 모두 대령하겠사오니 그 중 마음에 드는 자를 골라 데리고 가시옵소서!”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소. 한나라 태자 대신 그 아들 중에서 한 명을 데려가야 한다면 반드시 한비를 데려가야겠소.”

“한비? 제나라 직하학궁에 유학을 다녀온 그 한비 말씀입니까?”

“그렇소. 한나라의 왕자 한비의 지혜로운 선비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와서 언제나 그와 함께 담소를 나눠보고 싶었다오.”

한부가 말한 한비는 바로 후세에 법가의 대학자이자 위대한 동양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한비자였다.

한비자는 직하학궁에서 훗날 유교의 성현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순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유가, 법가, 도가, 묵가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한 후 덕치를 중시하는 유가와 스승의 이론을 비판하며 엄한 법률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가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원역사에서의 그는 훗날 성인이 된 진시황에게 등용되었다가 자신의 지위를 그에게 뺏길까 봐 두려워한 진나라의 대신이자 한비자와 함께 직하학궁에서 순자 밑에서 학문을 배웠던 이사에게 모함을 당해 옥에 갇혔다가 이른 나이에 죽고 만다.

한부는 그가 진나라에 불려 갔다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기 전에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고조선을 기원전 3세기 최고의 법치국가로 만드는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한비는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보였으니 그를 고조선에 볼모로 보내기 싫을 법도 했지만, 한나라 왕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한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하의 관대한 제안에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한비는 학자로서는 분명 일류였지만,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었기에 언변이 서툴러 군주 노릇을 하기 어려웠고 또 한나라 태자 안의 서자라서 왕위 계승권에서도 멀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만 관심이 있던 늙은 왕에게는 혈통으로 보나 신체 조건으로 보나 왕위에서 먼 한비는 관심 밖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부와 한나라 왕은 쌍방이 만족스러운 협상을 끝낸 후 위나라 왕의 동의를 구해 양적의 포위를 풀었고 고조선과 위나라의 병사들은 한나라 왕실이 전쟁 배상금으로 내놓은 많은 금은보화와 비단을 우마차에 싣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고조선에 볼모로 오게 된 한비가 처자식과 함께 고조선군 숙영지의 지휘관 막사로 찾아와서 한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 한나라의 왕, 왕자 하, 한비가 조, 조선의 태, 태, 태자 전하를 뵈, 뵈, 뵙습니다.”

“반갑소. 한비 왕자. 젊은 나이에 천하에 이름을 떨친 현명한 선비를 만나서 참으로 기쁘오.”

“과, 과, 과찬이시, 시옵이다. 저, 전하.”

한부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거구나. 누가 이 사람을 일국의 왕자나 죽은 지 2,200년 지나도 여전히 유명한 대학자라고 생각하겠어. 그나저나 이 인간을 오래 부려 먹으려면 건강관리 좀 해줘야겠는데.’

워낙 독서를 많이 하다 보니 거북이처럼 굽은 목,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탈모가 시작되어 새하얀 싱크홀이 생겨버린 정수리, 팔다리는 가늘지만 배는 나온 ET형 몸매, 광대뼈까지 덮을 것 같은 짙은 다크서클, 야외 활동을 잘 안 해서인지 희다 못해 창백해진 피부.

한부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원역사의 한비자가 진시황과 이사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건강을 해쳐서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한비 왕자. 그대는 보통 하루에 몇 시간 정도를 서재에서 보내시오?”

“보, 보통 식, 식사하는 시, 시간을 빼면, 늘 책을 읽, 읽고 그, 그, 글을 씁니다.”

“역시 그랬구려. 하지만 조선에 가서는 생활습관을 좀 바꿔야 할 거요.”

“새, 생활습관을 바, 바꾸라니요?”

“조선의 왕검께서는 내게 잔악한 진나라 왕실처럼 다른 나라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와서 핍박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서 불행한 삶을 살게 하지 말라고 명하셨소. 그런데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감스럽지만, 그대가 그런 외관으로 계의 시내에서 돌아다니면 내가 그대를 학대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겠소?”

“저, 저는 건, 건강합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는단 말이오. 계에 가면 그대의 신체를 단련시켜줄 교관을 붙여주겠소.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교관이 시키는 대로 운동을 하면 남은 시간에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학문을 닦을 수 있을 것이오.”

“무, 무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