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소득 없이 퇴각하는 진나라군
고조선군이 안읍을 공격하던 진나라군 별동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후 한부는 전 병력과 거의 5만 명에 달하는 진나라군 포로를 데리고 다시 포판으로 진군했다.
한편 여불위는 성동격서 계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방도가 없었기에 왕흘이 전령을 보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안읍에서의 전투가 끝난 지 닷새째 되던 날 저녁, 기다림에 지친 여불위는 높은 망루 위에 올라 임진의 강 너머의 북쪽을 바라보면서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후······. 왕흘 장군이 군영에서 떠난 지 벌써 열흘이 넘었건만 아무런 소식도 없다니······. 의외로 안읍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건가?”
그런 다음 그는 고개를 돌려 진나라군 진영의 동쪽에 자리 잡은 한나라군 진영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어쩐지 한나라군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군. 혹시 전쟁이 길어질 것 같으면 물자를 챙겨서 퇴각하려는 건가? 한나라 왕은 옹졸하고 겁이 많은 자이니 장수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려뒀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때, 여불위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한 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 상방님! 여 상방님! 저기 좀 보십시오! 서북쪽에서 기병 약 일흔 기가 우리 군의 진영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기병들이 차림새를 보니 우리 군 소속이 분명합니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이구나! 왕흘 장군이 보낸 전령이 포판에 진을 친 적군을 피하려고 다시 목앵부를 써서 강을 건넌 게 분명하다!”
“상방님.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소장은 지금껏 저렇게 많은 기병을 전령으로 보내는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의 강 서쪽 지역은 이미 우리 군이 점령해 적군에게 습격당할 염려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서 저 기병들을 지휘관 막사로 데려와라! 내가 직접 저자들을 만나서 사정을 들어보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상방님.”
여불위는 부장에게 지시를 내리자마자 서둘러 망루 밑으로 내려와서 지휘관 막사로 향했다.
그가 막사 안에 들어서자 얼마 후 땀과 피에 젖은 군복과 곳곳에 미늘이 떨어져 나간 개갑을 몸에 걸치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 기병 수십 명이 힘없는 걸음으로 막사 안에 들어왔다.
여불위는 그들을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왜 그런 몰골을 하고 있는 거냐?! 너희는 어느 부대 소속이냐?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적떼를 만나서 칼부림을 벌이기라도 한 거냐?”
그 말에 초라한 모골의 기병 무리 중 가장 고참병이 두 눈에 굵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떨어지지 않은 입을 억지로 열었다.
“상방님······. 저희는 모두 왕흘 장군과 함께 안읍을 치러 떠난 별동대에 종군했던 기사들입니다······.”
“뭐라고! 그럼 왕흘 장군이 안읍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느냐?!”
“그렇습니다. 상방님. 별동대는 안읍을 공략하던 중 후방에서 나타난 조선군과 회전을 벌이다가 궤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왕흘 장군은 난전 중에 짐독에 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믿기 어렵구나! 동이족
궁수들이 화살촉에 그 귀한 짐독을 발라서 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런 게 아닙니다! 여 상방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동이족들은 여러 마리의 짐새를 길들여서 마치 사냥용 매처럼 전장에 날려 보내서 왕흘 장군과 수천 명의 병사를 한순간에 독살했습니다!”
“뭐라고?”
여불위는 기병의 말을 듣고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청동검을 뽑아 그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대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전장에서 피를 보고 실성한 게냐? 그게 아니면 목숨을 담보로 이 여불위를 능멸하는 거냐? 후자라면 그리 편안한 죽음을 기대하지는 마라.”
“억울하옵니다! 여 상방님! 감히 일개 기사인 제가 진나라의 재상이자 대왕의 중보이신 분을 농락할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안읍의 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제발 살려주시옵소서!”
갑자기 죽을 위기에 놓인 기병이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면서 목숨을 구걸하자 그의 뒤에 서 있는 다른 패잔병들이 입을 모아 짐새를 봤다고 증언했다.
“여 상방님! 저희가 생각하기에 실성한 사람들이나 할 말이긴 하지만, 그 기사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암녹색 깃털에 부리가 긴 큰 새가 하늘을 날자 그 밑에서 적과 싸우고 있던 병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절명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짐새가 아니라면 천하의 어떤 짐승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여불위는 상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는 동안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난 경험이 풍부했기에 금방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의 표정과 말씨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해서 이 녀석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는 검을 거둔 다음 엄한 목소리로 기병들에게 명했다.
“너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렵구나. 그만 물러가서 상처를 치료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도록 하라. 다만 쉬는 동안 다른 병사들에게 삿된 소문을 퍼뜨려 사기를 떨어트리는 자는 엄벌로 다스릴 터이니 모두 입조심 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감사합니다! 상방님! 절대 짐새의 짐자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이 여불위는 너희의 맹세를 그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너희는 다른 병사들의 숙소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 따로 천막을 치고 지내도록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상방님.”
안읍의 전장에서 도망쳐온 기병들은 여불위에게 읍하면서 입단속을 할 것을 맹세한 후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후 며칠 동안 안읍의 전장에서 도망친 진나라군 패잔병 1만여 명이 차례로 여불위의 진영에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곧 짐새에 관한 소문은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진 괴담이 되어 진나라군과 한나라군 병사들에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글쎄 짐새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날개를 몇 번 펄럭거리니까 밑에 있는 병사들이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더니 반각도 지나지 않아서 죽어버렸대!”
“그럼 짐새가 나타나면 바로 쇠뇌로 쏴서 떨어트리는 수밖에 없겠구먼!”
“간교한 동이족들이 그렇게 놔두겠어? 저번 전투에서도 막 백병전이 벌어지려고 할 때 갑자기 전장 한복판에 짐새가 나타나서 아군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바람에 궁수 부대가 화살을 쏠 수 없었대.”
“그것참 무시무시하구먼······.”
여불위는 약 20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은 데다 짐새에 관한 괴소문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가자 지휘관 막사에 틀어박혀서 진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장군급 장수도 거느리지 않고 헛된 괴담에 겁먹은 병사들을 데리고 조선의 태자와 위무기를 물리치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번 원정에서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하고 함곡관 너머로 쫓겨나면 패권국의 지위를 잃고 조선의 동이족에게 중원을 좌지우지할 주도권을 넘겨주게 될지도 모른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렇게 여불위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돋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끼에에에에엑!
여불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주변을 불러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마음이 어지러운데 어떤 놈이 군영에서 불길한 소리를 지르느냐?!”
그런데 그의 곁에 있는 병사들은 상방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귀신이라도 본듯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강변 쪽의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불위는 병사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유유히 날면서 진나라군 군영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암녹색 깃털에 독수리만 한 몸집에 황새처럼 긴 부리······. 그럼 그 소문이 괴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뭣들 하느냐! 저 흉악한 독조가 군영에 닿기 전에 화살로 쏴서 죽여라!”
진나라군 병사들은 상방의 호통을 듣고 나서야 급히 활과 화살을 들고 강을 건너오는 짐새 다섯 마리를 향해 마구잡이로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짐새 무리 중 가장 앞장서서 날던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화살에 가슴팍을 맞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 끼에에에에에엑!
화살에 맞은 짐새는 몇 번 날개를 펄럭이다가 그대로 임진의 강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 풍덩!
그러자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강가에 나가 있던 진나라군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강물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질 생각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히이익!”
“짐새가 강물에 빠졌다! 얼른 도망쳐!”
그렇지 않아도 고대 중국인 중에는 짐새의 깃털이 술잔에 스치기만 해도 그 안에 담겨있는 술이 독주가 된다고 믿는 자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니 진나라군 병사 중에는 다 자란 짐새의 주검이 빠진 강물에 발을 담글 용기가 있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 리 만무했다.
진나라군 장수들도 휘하의 병사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기에 여불위에게 몰려가 철군하자며 아우성쳤다.
“여 상방님! 동이족들이 임진의 강에 독을 풀었습니다! 이제 이 지역에서는 식수를 구하기 어려우니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조선군이 짐새를 얼마나 더 데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장은 함곡관 너머로 군대를 물리시고 짐새를 물리칠 대책을 마련한 후에 다시 원정을 시작하시는 게 현명할 듯합니다!”
여불위는 결국 장수들의 말에 설득당하여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린 다음 분통을 터뜨렸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왔건만 겨우 새 몇 마리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고 말았구나! 조선의 동이족들아! 오늘의 빚은 이자까지 쳐서 반드시 갚아주마!”
* * *
고조선군이 새 한 마리를 바쳐서 30만 명이 넘는 진‧한 연합군을 쫓아내자 위나라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한부와 고조선의 여러 장수를 자신의 막사로 초대하여 감사를 표했다.
“참으로 감사하오! 조선의 태자여! 그대의 기지와 용맹한 조선의 병사들이 없었으면 우리 위나라는 진나라군의 침략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거요!”
“우리 조선은 동맹국으로서의 신의를 지켰을 뿐입니다. 폐하. 오늘의 승리가 중원의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인 진나라에게 대항할 합종책의 시작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일은 짐에게 맡겨주시오. 짐은 왕자의 신분일 때도 이미 한번 제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설득해 진나라군을 물리칠 합종군을 꾸린 적이 있소. 조선이라는 강력한 우방을 얻은 지금이라면 전보다 더욱 쉽게 합종책을 시행할 수 있을 거요. 다만 이제 조선의 국력은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다섯 나라를 능가하니 합종국의 맹주는 조선이 맡는 게 좋겠소.”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이번 기회에 진나라에 빌붙어 위나라 땅을 노린 한나라를 복속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당 그래야지요. 한나라 왕은 진나라를 겁내서 우리나라를 넘봤으니 위나라와 조선의 연합이 진나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면 기꺼이 그대에게 머리를 조아릴 거요.”
그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끝나고 한부는 얼큰하게 술에 취해 기병대장 석과 함께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부가 막 석의 부축을 받으며 침상에 앉는 순간, 석이 그에게 물었다.
“전하. 많이 피로하시겠지만, 한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가 내게 질문을 하는 건 참 오랜만이구나! 뭐든 물어보아라.”
“한나라는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아서 군대를 움직여 공격해봐야 영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먼저 위나라 왕에게 한나라를 응징하자고 말씀하셨습니까?”
“한나라 왕을 겁줘서 얻어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다.”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고 가난한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 나라에서 뭘 얻으시려는지요?”
“당연히 인재지. 한나라를 존속을 대가로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이자 정책전문가를 얻어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