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안읍 전투 (5)
왕흘이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자 진나라군 본대 양익에 각각 5천 기씩 배치되어 있던 창기병 대와 궁기병대가 일제히 전방의 적을 향해 달려 나왔다.
상장군 무명도 적장이 기병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즉시 곁에 있는 기수들에게 명령했다.
“개마무사대와 궁기병대에 적군의 기병을 섬멸하라고 전해라!”
기수들은 다시 커다란 깃발을 펄럭여서 기병대를 이끄는 장수들에게 상장군의 명을 전하자 고조선군 본대 우익을 지키고 있던 기병대장 석은 길이 3m가 넘는 긴 마상창인 마삭(馬槊)을 옆구리에 끼더니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개마무사대! 쐐기 진형으로 적을 분쇄하라!”
석은 명령을 마침과 동시에 마삭을 앞으로 내밀며 전방에서 달려오는 적 기병대를 향해 달려나갔고 사람과 말이 모두 강철 경번갑을 몸에 두른 개마무사 5천 기가 우레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대장의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아아!”
“대장의 뒤를 따르라!”
덩치 큰 한혈마 5천 마리가 동시에 강철 편자가 달린 말발굽으로 땅을 두드리자 지축을 울리는 듯한 굉음이 진나라군 기병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두두두두두두두두
하지만 진나라군의 기병들은 낭선에 먼지처럼 쓸려나가는 아군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속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청동 날이 달린 짧은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적과의 격돌에 대비했다.
잠시 후 양군의 창기병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개마무사 1천 기가 앞으로 내민 긴 마삭창이 진나라군 기병들의 가슴과 어깨에 명중하자 전장의 곳곳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 콰가가각!
선두에 선 진나라군 기병들은 마삭의 강철 창날에 몸을 관통함과 동시에 비명을 지를 틈도 절명하며 낙마해 버렸고 뒤에서 달려오던 기병들도 앞선 전우의 등을 뚫고 나온 창날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하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흐어어어억!”
그렇게 진나라군 좌익의 창기병대는 고조선군 개마무사대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선보인 카우치드 랜스 전술에 크게 당하여 한순간에 1천 기가 훨씬 넘는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창기병대를 지휘하는 진나라군 기병대장은 손에 든 청동검을 휘두르면서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했다.
“겁먹지 마라! 적군이 들고 있던 긴 창은 돌격 한 번에 부러져버렸다! 무기를 잃은 적군에게 등을 보이지 마라!”
그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진나라의 창기병들은 다시 마상창의 자루를 움켜쥐면서 개마무사들에게 덤벼들었다.
“동이족의 목을 베어서 전우의 원수를 갚아라!”
“적에게 새 무기를 가져올 시간을 주지 마라!”
그러나 한부는 카우치드 랜스 전술의 가장 큰 단점이 한 번의 돌격에도 마상창이 쉽사리 부러진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대비도 이미 마쳐둔 상태였다.
선두의 개마무사들은 적의 반격에 당황하지 않고 즉시 부러진 마삭의 자루를 버린 다음 후방의 전우들과 함께 합류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편곤을 뽑아들었다.
잠시 후, 백병전용 무기를 손에 든 양군의 기병대는 서로를 물고 늘어지면서 흙바닥을 뒹구는 두 마리의 맹수처럼 뒤엉켜 난전을 벌였다.
그러나 양군 기병대의 전투가 치열해 보이는 순간은 겨우 수십 초 만에 흘러가고 곧 고조선의 개마무사대가 진나라군 기병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진나라군의 기병대장은 부하들이 사력을 다해 눈앞의 적이 타고 있는 말을 향해 내지른 청동창이 강철 마갑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람도 못 입는 튼튼한 갑옷을 말에게 입히다니! 저런 적을 상대로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반면 고조선의 개마무사들은 적의 무기가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용맹하게 전장을 휩쓸면서 적 기병의 머리를 노리고 세차게 휘둘렀다.
투구도 쓰지 않은 진나라군 기병들의 머리에 말과 기수의 체중이 실린 철추가 명중할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진나라군 기병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후 진나라군 좌익의 창기병대는 순식간에 그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버렸고 곧 전장을 이탈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몇 개마무사가 그들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기병대장 석은 그런 부하들을 제지하면서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멈춰라! 저 패잔병들은 이제 전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쫓을 필요 없다. 이제 진나라군 본대의 좌익을 두들길 테니 모두 나를 따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석 대장님!”
적 기병대를 쫓아버린 개마무사대는 다시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그렇지 않아도 낭선병의 공세와 짐새의 심리공격에 당황하여 궁지에 몰리고 있는 진나라군의 보병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조선군 본대 좌익에서 전투를 벌인 고조선군의 궁기병대도 한혈마의 앞선 기동력과 성능 좋은 각궁으로 목궁과 과하마로 무장한 적 궁기병대를 전장에서 몰아내면서 진나라군 본대의 측면으로 달려갔다.
상장군 무명은 아군 기병대가 손쉽게 적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곁에 있는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본대와 양익의 기병대가 모두 진나라군을 손쉽게 몰아내고 있습니다. 소장의 예상보다 더 싱거운 전투가 돼버리고 말았군요.”
“음? 상장군, 우리 병사들의 피를 거의 보지 않고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왜 그렇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시오? 옛 조국인 진나라의 병사들이 다치는 게 마음에 걸리시오?”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 이번 승리의 주역은 전하께서 고안하신 전략과 신무기이고 소장의 역할은 마치 잘 조리된 음식을 상으로 나르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무인로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칠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지금까지 두 나라에서 세운 전공만으로도 태공망을 주무왕을 능가하는 위명을 남기게 될 사람이 아직도 승리를 갈망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오. 경은 진나라를 멸할 전투를 지휘한 장수로서 역사에 기록될 테니 말이오.”
“그 말씀을 들으니 처음 전장에 나섰던 젊은 시절처럼 가슴이 뛰는군요. 소장의 천수가 다하기 전에 반드시 원수 소양왕의 자취가 남아있는 함양에서 개선식을 치를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미 고조선군 쪽으로 승기가 기운 전투를 지켜보며 잡담을 나누는 사이 진나라의 장군 왕흘은 3면이 적에게 포위당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아군의 모습을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어쩌다······ 어쩌다 이 왕흘이 또 이런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염파 그 늙은 호랑이에게 망신을 당한 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절치부심하며 병법을 익히고 무예를 단련했건만! 이제는 새파랗게 젊은 동이족
태자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허리에 찬 검집에서 청동검을 뽑더니 곁에 있는 부장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하게도 이 전투는 우리가 패배했다. 모두 위무기와 조선의 태자가 파놓은 교묘한 함정을 간파하지 못한 내 책임이다. 나는 최전방에서 가증스러운 동이족을 한 놈이라 더 죽여서 시간을 벌 테니 너희는 아직 살아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여 상방께 돌아가서 이곳의 상황을 전해라.”
예상치 못한 장군의 선언에 놀란 진나라군 장수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왕흘을 말렸다.
“장군님! 그러시지 말고 저희와 함께 퇴각하시지요! 지금이라면 아직 하양으로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장군님! 제발 가볍게 목숨을 버리지 마십시오! 반드시 살아서 함양으로 돌아가셔서 훗날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아니. 난 이미 두 번이나 큰 전투를 망쳐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진나라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무슨 낯으로 멀쩡히 살아 돌아가사 어린 왕과 상방을 뵙겠느냐? 내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더는 말리지 마라.”
왕흘은 그렇게 말하더니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최전선을 향해 말을 달리더니 낭선병의 방진을 향해 뛰어들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진나라의 장군 왕흘이다! 그따위 조잡한 대나무 줄기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자 고조선의 낭선병들은 양옆으로 슬쩍 비켜나 무작정 돌격하는 적장의 정면에 길을 트면서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왕흘의 허벅지에 낭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왕흘은 짐독이 묻은 무수한 작은 칼날에 허벅지를 긁히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낙마했다.
“끄어억!”
그는 여러 적장과 대결을 벌이며 삶을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결국 고조선군 병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을 거두었다.
* * *
수많은 병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군 왕흘이 전사하자 사기가 떨어진 진나라군 병사들은 손에 든 무기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한부와 상장군 무명은 패잔병을 쫓느라 기산을 버리는 대신 즉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왕흘이 안읍의 수비병을 견제하려고 남겨뒀었던 진나라군 진영을 급습했다.
이에 안읍을 지키고 있던 이목도 성안의 병력을 모두 끌고 나와 진나라군을 몰아쳤고 20만 명의 고조선군에게 포위당한 진나라군 3만 명은 햇볕이 뜨거운 한여름날에 야외에 내놓은 얼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마침내 안읍을 공격했었던 진나라군과의 전투가 고조선군의 대승으로 끝난 후 병사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전투에 참여했던 고조선의 장군들은 모두 태자의 막사로 모여서 군사회의에 참여했다.
한부는 무명과 이목, 그리고 극신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면서 세 장군의 공을 치하했다.
“모두 참으로 잘 싸워주었소. 경들이 각자 맡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준 덕분에 이번 전투에서 손쉽게 이길 수 있었소.”
그 말을 듣고 이목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태자에게 대답했다.
“이번 승리의 주역은 전하이십니다. 높은 망루 위에서 아군과 적장 왕흘이 지휘하는 진나라군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처음 독이 없는 짐새로 적진을 혼란에 빠트리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는 그저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 사나운 새를 길들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의 승리를 위해서 경들에게도 숨겨왔던 사실이오. 조선 왕실이 짐새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숨길 수 없지만, 짐새 중에서 독이 없는 녀석들도 있다는 사실은 절대로 비밀에 부쳐야 하오.”
“하늘에 맹세코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자 이번에는 극신이 입을 열었다.
“전하. 큰 승리를 거두셔서 기쁘시겠지만, 아직 축배를 드실 때는 아닌 듯합니다. 임진의 강 너머에는 아직도 30만 명이 넘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연합군이 도사리고 있으니 우선 위나라 왕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쳐 함곡관 너머로 쫓아내시옵소서.”
극신의 말에 무명도 맞장구쳤다.
“소장도 극신 장군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전하. 이번 전투에서 우리 군이 입은 피해는 극히 미미하여 전사하거나 다친 병사가 1천 명을 넘지 않습니다. 또 적군을 지휘하는 여불위는 아직 안읍을 공격하던 별동대가 전멸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 왕흘이 그랬던 것처럼 하양 부근에서 강을 건너 적군의 배후를 공격한다면 다시 한번 천하에 조선의 이름을 떨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흠······. 하지만 그랬다가는 여불위가 왕흘처럼 난전 중에 전사해버릴 수도 있지 않겠소?”
“남은 적군을 궤멸시키고 왕이나 다를 바 없는 상방이 죽으면 진나라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질 테니 일거양득이지 않습니까?”
“아직은 여불위는 죽으면 곤란하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사실 여불위를 이용해 진나라 조정을 자중지란 빠트릴 계책을 준비하고 있어서 말이오. 이번에는 그자를 너무 궁지에 몰지 말고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