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안읍 전투 (4)
안읍성에서 이목과 왕흘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을 때, 한부는 포판의 성벽 위에서 초조한 눈빛으로 북쪽을 응시하다가 기다리던 봉화가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됐다! 진나라군이 미끼를 물었구나!”
그는 서둘러 성벽 아래로 내려와서 위나라군의 진영으로 달려가 위왕 무기에게 말했다.
“폐하! 드디어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분명 진나라군의 별동대가 안읍을 공격하고 있을 겁니다!”
“벌써 말이오? 참으로 놀랍구려! 솔직히 말하자면 천하의 여불위가 과연 그대가 고안한 계책에 걸려들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오.”
“여불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류 정치가이지만, 군략가로서는 그리 뛰어난 자가 아니라는 증거겠지요. 이제 저는 휘하의 병사를 전부 이끌고 안읍을 공격하는 진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하겠습니다.”
“그럼 짐은 포판에 남아 강 건너의 진나라군이 감히 도강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겠소. 만에 하나 적들이 대대적으로 도강 작전을 시도하면 즉시 봉화를 피워서 그대에게 알리겠소.”
“알겠습니다. 폐하. 며칠 안에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무운을 비오. 조선의 태자여.”
위나라 왕과의 대화를 마친 후 한부는 고조선군 진영으로 돌아와 상장군 무명, 장군 극신과 함께 포판에 남아있는 보병 15만 명과 기병 1만 기를 이끌고 안읍의 전장을 향해 출발했다.
한부는 고조선군 행렬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병사들을 이끌면서 곁에 있는 무명에게 물었다.
“상장군. 안읍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며칠이나 걸릴 것 같소?”
“지금의 속도로 행군하면 닷새 정도면 넉넉할 겁니다. 폐하. 그동안 이목 장군이 안읍을 잘 지켜내길 빌어야겠습니다.
“이목 장군의 능력이라면 닷새 정도면 문제없이 버틸 거요. 그보다는 적장이 이번 작전을 눈치채고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다시 하양 쪽으로 도망쳐 버리는 거겠지요. 병사들을 독려해 앞으로 사나흘 안에 전장에 도착합시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겠소?”
“강행군에 병사들이 지치긴 하겠지만, 그건 공성전을 치르고 있을 진나라군 병사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 * *
한부가 이끄는 고조선군이 거침없이 북진하는 동안 마음이 급해진 진나라군의 장군 왕흘은 휘하의 병사들이 인근 마을의 민가에서 뜯어낸 목재로 성벽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을 큰 나무 방패 목만 몇 개를 완성하자마자 다시 안읍성을 몰아쳤다.
그러나 안읍의 성벽 위에는 끓는 기름이 가득한 큰 가마솥이나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못이 촘촘하게 박힌 나무판자 낭아박과 같은 수성 병기가 갖춰져 있었고 무엇보다 이목은 높은 망루 위에서 전장 전체를 한눈에 담으면서 고조선군 병사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진나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렇게 귀중한 시간과 병력을 허비한 왕흘은 안읍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에 안읍성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공성 병기와 쇠뇌를 부실하게 챙겨왔다지만, 20만 대군으로 거세게 몰아쳤는데도 승기가 보이질 않는구나······. 안읍을 지키는 수비병의 규모와 적장의 실력까지 모든 게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어. 아무래도 이상해. 분명히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한부와 위나라 왕의 정확한 계책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수십 년 동안 전장을 떠돈 장수의 직감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는 즉시 기병대장을 불러서 명령했다.
“아무래도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당장 기병 2천 기를 이끌고 임진의 강에서 안읍으로 이어진 길을 순찰하다가 적군의 정찰대를 만나면 섬멸하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 장군님. 그렇지 않아도 몇몇 부장들은 며칠 전 안읍성 안에서 올라온 봉화를 보고 적에게 배후를 잡힐까 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적장이 우리의 작전을 미리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뜬금없이 후방에서 올라온 봉화를 보자마자 이곳에 지원군을 보내기는 어려울 거다. 봉화를 피운 게 안읍성을 지키는 병사들인지 아니면 우리 진나라군인지 포판에 있는 적들이 어찌 알겠느냐? 보통은 정찰대를 먼저 보내서 이곳의 상황을 살피고 군대를 움직이겠지.”
“그 말씀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장군님.”
진나라군의 기병대장은 왕흘에게 읍한 후 기병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들이 발견한 것은 소수의 적 정찰대가 아닌 밀물처럼 몰려오는 고조선의 16만 대군이었다.
진나라군 기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아우성쳤다.
“이······ 이럴 수가! 벌써 여기까지 동이족들이 들이닥쳤다니!”
“대장님! 어서 왕 장군님께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시지요! 한시라도 빨리 안읍을 포기하고 하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적군에게 포위당하고 말 겁니다!”
“그래야겠다! 모두 본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라!”
진나라군 기병대장은 부하들과 함께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진나군 진영으로 돌아와서 왕흘에게 보고 들은 것을 보고했다.
“왕 장군님! 남쪽에서 적어도 10만 명이 넘는 조선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면 적군은 반나절쯤 후에 우리 군 진영에 도착할 듯합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럼 적군이 봉화가 올라가고 바로 포판에서 출발했다는 말이냐?!”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큭······! 아무래도 우리가 위무기와 동이족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모양이구나!”
“왕 장군님! 지금이라도 성의 포위를 풀고 하양으로 물러나시지요! 가만히 있다가는 앞뒤에서 몰려오는 적군에게 포위되는 수가 있습니다! 동이족
병사들은 강행군을 견디느라 우리를 추격할 체력이 남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병사 중에도 공성전을 치르다가 죽거나 다친 자가 2만 명에 가까우니 부상병을 버리지 않는 한 빠르게 퇴각하기 어렵다.”
“아······.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왕 장군님!”
왕흘은 부하 장수의 재촉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깊이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 몽오 장군은 신평군 염파가 군대를 이끌고 몰려온다는 소식에 놀라 급히 퇴각하다가 성에서 몰려나온 적군의 방해를 받는 바람에 결국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무턱대고 병사를 물리다가는 그때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남쪽에서 몰려오는 적군의 수가 이곳에 있는 아군보다 많더냐?”
“급히 도망치느라 정확한 수를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만, 기병의 규모는 양군이 비슷했고 보병은 우리 병사들의 수가 조금 더 많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기 전에 남쪽에서 몰려오는 조선군을 물리치는 수밖에 없겠구나. 후방에 보병 3만을 남겨서 완읍에서 몰려나올지도 모르는 적군을 막고 나머지 병사를 이끌고 남쪽을 진군하겠다. 전군에 지시를 내릴 테니 너는 모든 장수를 지휘관 막사로 불러오너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 장군님.”
그 후 왕흘은 부장 몇 명에게 후방을 지킬 병사를 맡기고 자신은 15만 명이 조금 넘는 보병과 기병 1만 기를 이끌고 남쪽을 향했다.
그렇게 규모가 비슷한 고조선군과 진나라군은 역사상 최초로 전장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한부는 먼발치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왕흘의 군대를 보고 조금 놀란 목소리로 곁에 있는 상장군 무명에게 말했다.
“허! 이 상황에서 퇴각하지 않다니. 왕흘도 꽤 호전적인 장수인 모양이구려.”
“그러니 겁도 없이 신평군 그 늙은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는 굴에 십만이 넘는 병사를 몰아넣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 왕흘이 내린 판단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그자를 상대하는 적장이 소장이 아니고 신무기와 새로운 진법으로 무장한 조선의 병사들이 아니었을 때의 얘기지만 말입니다.”
무명은 태자에게 대답하면서 고조선군의 본대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는 고조선의 보병대는 팽배수가 맨 앞줄에 서고 그 뒤에 극병이 늘어서는 배치로 전투에 임해왔지만, 지금은 낭선을 든 병사 3만 명이 전장의 1선에 서고 그 뒤를 팽배수가 받치며 맨 뒤에는 극병이 서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한부가 원역사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대가 명나라의 진법을 모방하여 시행한 원앙진을 간소화하여 만든 진법이었다.
한부는 무명의 말을 듣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왕흘이 그럼 아예 임진의 강을 건널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요. 자, 그럼 적군과의 거리가 제법 좁혀졌으니 전초전을 시작합시다. 궁수와 노궁수, 그리고 투석꾼 부대는 일제 사격을 가하라!”
한부가 외치자 고조선의 장수들이 전군에 태자의 명을 전하여 본진 좌우에 나열한 원거리 부대가 적진을 향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고 무릿매에 들어있는 납탄을 던졌다.
적지 않은 진나라군 병사가 조선군이 쏜 화살과 납덩어리에 맞고 쓰러졌지만, 왕흘은 그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미리 진나라군 병사들에게 공성용으로 만든 거대한 나무 방패 목만 뒤에 숨어서 전진하도록 지시해둔 상태였다.
진나라군 병사들은 장군의 명대로 빗발치는 화살을 나무판자로 막아내면서 묵묵히 전진했고 곧 양군의 선두에 선 병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한부가 곁에 있는 기수를 바라보면서 지시를 내렸다.
“깃발을 흔들어서 사육사에게 신호를 보내라!”
병사는 태자의 명에 따라 커다란 검은 깃발을 세차게 흔들었고 곧 낭선병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섯 명의 사육사가 가지고 있는 큰 새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독수리만 한 크기에 암녹색 깃털이 눈에 띄는 새들이 튀어나와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진나라군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배회하기 시작했다.
- 끼에에에에엑!
선두에 선 진나라군 병사들은 처음엔 갑자기 전장에 나타난 기괴하게 생긴 큰 새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중 몇몇 병사는 새의 정체를 알아보고 점점 안색이 하얗게 변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저거 짐새잖아!”
“뭐?! 짐새?! 정말 저거 짐새야?!”
“그렇대도! 어린 시절에 저 망할 독조가 나타나서 관군이 우리 집 뒷산을 전부 태워버렸었다고!”
고대 중국인 중에는 짐새가 하늘을 날면 그 밑에 있는 동물과 식물이 모두 죽고 땅과 물이 오염된다고 믿으면서 두려워하는 자가 상당히 많았다.
한부가 데려온 짐새는 독이 없는 먹이를 먹여 길러서 해롭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진나라군 병사 중 상당수가 머리 위를 나는 짐새를 피해 도망가려다가 뒤나 옆에 있는 아군과 부딪히며 진형을 흩트려 버렸다.
상장군 무명과 장군 극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휘하의 장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낭선병을 전진시켜라!”
“적군의 진형을 뒤로 밀어내라!”
두 노장이 외치자 마치 이파리가 없고 장식 대신 독이 묻은 칼날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낭선을 든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적진으로 다가가서 빗자루로 청소하듯 무기를 양옆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방패가 없고 짧은 무기를 가진 진나라군 병사들은 날카로운 칼날에 긁히면서 점점 뒤로 밀려났고 그중 하늘을 나는 짐새 밑에서 낭선에 맞은 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 죽어버렸다.
멀쩡하던 전우가 큰 외상도 입지 않고 절명하는 모습을 본 진나라군 병사들은 이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짐새 밑에 있던 놈들이 짐독에 당해서 죽었다!”
“비켜!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한부는 너무 많은 병사가 짐독과 붉은사슴뿔버섯을 가공한 독을 바른 낭선으로 무장하면 안전사고 발생 위험이 너무 크다는 부하 장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맹독을 바른 낭선은 고참병 3백 명에게만 주고 나머지 낭선병에게 지급한 무기에는 삭힌 인분 따위의 덜 치명적인 독이나 오염물질을 발랐다.
그리고 짐독과 붉은사슴뿔버섯의 독을 바른 낭선을 지닌 병사들은 짐새와 같은 위치에 배치해 적진을 혼란에 빠트린 것이다.
왕흘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면서 기병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는 본대가 전멸하고 말겠다! 전 기병은 서둘러 적 기병을 물리치고 적 본대의 측면을 공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