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안읍 전투 (3)
군사회의가 끝나자 왕흘은 지휘관 막사에서 나와서 휘하의 장수들에게 상방 여불위의 명을 전했다.
“상방의 명에 따라 은밀히 강을 건너 안읍성을 급습한다. 서둘러 몸놀림이 날쌘 보병 20만 명과 기병 1만 기를 이끌고 하양 땅으로 진군할 준비를 해라.”
그 말을 듣고 한 부장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왕 장군님. 아무리 어둠을 틈타 움직인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병사가 움직이면 강 건너의 찬탈자 위무기가 우리 군의 별동대가 하양 부근에서 도강 시도할 거라는 걸 알아챌까 두렵습니다. 또 위나라군이 임진의 강을 따라 방어선을 단단히 세우는 바람에 강 건너에 정찰병을 보낸 적이 없는데 어찌 안읍성의 방비가 허술하다고 속단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렴 여 상방님과 이 왕흘이 네가 아는 것을 모르겠느냐? 본진에 남은 병사들이 곧바로 포판을 치는 것처럼 소란을 피워 적군의 이목을 끄는 동안 하양으로 이동하면 얼마든지 적군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그리고 위나라군이 방어선을 굳히기 직전에 안읍성에 잠입한 간자가 상방께 그곳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보고를 전해왔으니 쓸모없는 걱정은 접어두어라.”
“음······. 소장의 식견이 좁았습니다. 장군님.”
왕흘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부장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앞으로 이레 안에 안읍을 점령하여 위나라군과 동이족의 병참선을 끊는 거다! 상방께서 이번 전투에서 가장 먼저 안읍의 성벽을 넘은 장수에게는 대왕께 건의하여 두 단계 높은 작위를 수여하신다고 하셨으니 모두 사력을 다하여 전투에 임하여라!”
“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파격적인 포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사기가 오른 진나라군 장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로 돌아가 몇 시간 만에 출진 준비를 마쳤다.
그러자 여불위는 본진에 남을 진나라와 한나라 연합군 32만 병사에게 양동작전을 지시했다.
“임진의 강 주변을 횃불로 밝히고 밤낮으로 가교를 건설하라! 적장이 우리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니 대규모 공사를 진행해야 할 것이야!”
상방의 추상같은 명령이 전군에 전해지자 막 잠이 들었던 진나라군 병사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구시렁거리면서 다리를 놓을 자재를 들고 강가로 향했다.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 잠은 재워줘야 전장에 나가서 싸우든 말든 할 거 아냐······.”
“아마 조선에서 왔다는 동이족
지원군이 포판에 도착해서 자리 잡기 전에 위나라군을 끝장내려나 보지. 며칠 고생하면 전장에서 마주칠 적군의 머릿수가 줄어들 테니까 좀 참아보자고.”
잠시 후 한밤중의 강변은 진나라군 병사들이 세워둔 횃불 때문에 대낮처럼 밝아졌고 곳곳에서 톱으로 나무를 써는 소리와 쇠망치로 못을 박는 소음이 요란스럽게 울려 펴졌다.
그동안 왕흘은 보병 20만 명과 기병 1만 기, 그리고 길 안내를 맡을 위나라에서 투항한 병사 1백 명을 데리고 밤낮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하양성에 도착했다.
진나라군이 얼마 전에 점령한 하양을 수비하고 있던 진나라군 장수는 사전연락도 없이 왕흘이 많은 병사를 이끌고 한밤중에 성문 앞에 도착하자 갑옷도 챙겨입지 못하고 뛰어나와 놀란 표정으로 장군을 맞이했다.
“왕흘 장군님! 무슨 일로 이렇게 많은 병사를 데리고 하양에 오셨습니까? 설마 본진의 부대가 전투에서 패하여 여기까지 후퇴하신 것인지요?”
“우리 군이 적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데 야전에서 패할 리가 있겠나? 상방의 명에 따라 성동격서의 책략으로 적군의 심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을 급습하려 하니 내 설명을 잘 듣고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하양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왕흘의 말을 경청한 후 성안의 백성들에게 나무 항아리를 징발하여 우마차에 실었다.
그러자 왕흘은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우마차를 끌고 하양에서 동쪽으로 반나절 거리에 있는 강변으로 이동하여 목앵부를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진나라군 21만 명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왕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하하하하하하! 드디어 오랜 세월 동안 중원 통일의 대업을 방해해온 가증스러운 위무기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동이족을 처단할 때가 되었구나! 전군 전속력으로 진군하라! 포판에 웅크리고 있는 적군이 우리가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에 안읍을 점령하는 거다!”
왕흘은 그렇게 말하면서 말을 타고 앞장서서 나아가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진나라군 별동대는 보급품을 실은 우마차를 임진의 강 서쪽에 남겨두고 대신 병사들에게 사흘 동안 먹을 식량만을 등에 지게 한 다음 밤낮으로 강행군해서 겨우 이틀 만에 안읍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
성동격서 계책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자 왕흘은 안읍까지 가는 길을 안내한 위나라 출신 병사 1백 명을 크게 칭찬했다.
“참으로 잘해주었다! 며칠 전 너희가 투항한 덕에 만만치 않은 적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게 되었구나!”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장군님.”
“저희는 그저 불이 난 숲에서 도망쳐 나오는 들짐승처럼 어리석은 폭군 위무기를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뿐입니다.”
“동기야 어쨌든 너희의 행동이 진나라가 대업을 이루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만 더 해주면 상방께서 너희와 너희 가족을 진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시고 평민이 받을 수 있는 작위 중 가장 높은 공승의 작위를 하사하실 것이다.”
이미 위나라 왕에게 평생 연금이 보장되는 무졸직을 약속받았기에 기회를 봐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던 위나라군 병사들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크게 기뻐하는 척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참으로 감사합니다! 장군님!”
“저희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장군님!”
왕흘은 그런 병사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우리가 포판과 안읍 사이의 길을 막아버렸으니 안읍을 지키고 있는 위나라군 병사들은 포판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너희가 성안으로 돌아가서 이미 포판의 적군이 우리 진나라군에 궤멸당했고 찬탈자 위무기가 참수당했다는 소문을 퍼트려 안읍을 지키는 적장이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해라.”
“그리 하겠습니다! 장군님! 제 가족은 이미 피신했지만, 아직 안읍성 안에는 수십 년 동안 함께 지내온 이웃과 친구들이 남아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좋다! 그럼 입고 있는 옷을 더럽혀서 포로로 위장하고 안읍의 성문을 두드리거라!”
위나라군 병사들은 왕흘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안읍성 안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목과 안읍성주에게 보고했다.
이목은 병사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왕흘을 비웃었다.
“왕흘 그자는 10여 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구먼.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구나. ”
그 말을 듣고 안읍성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이목 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은 전장에서 왕흘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해 보신 적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야 그렇지요. 하지만 신평군께서 장평에서의 비극이 일어난 직후에 무턱대고 한단으로 몰려오던 진나라군을 물리치셨을 때의 상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눈앞의 큼직한 먹이에 정신이 팔려서 발밑의 가시를 보지 못하고 진나라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적장이 바로 왕흘입니다.”
“그랬군요. 진나라의 상방 여불위는 잘도 그런 자에게 이번 원정을 맡겼군요.”
“지금의 진나라에는 준수한 무장은 많아도 뛰어난 무장은 드무니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겁니다. 사실 왕흘도 전장에서의 지휘력은 나쁘지 않은 장수이니 여불위의 인선도 최악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안읍성을 지키는 장수가 이 이목이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참으로 자신만만하시군요. 이 장군님. 하지만 성을 포위한 적군의 수는 우리의 네 배가 넘고 급히 보수했다고는 하나 안읍의 성벽은 여전히 부실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주님. 남쪽에서 온 지원군이 적군의 후방을 몰아칠 때까지 반드시 왕흘의 공세를 막아내겠습니다.”
이목은 안읍성주를 안심시킨 다음 곁에 있는 장수들에게 명령했다.
“서둘러 봉화를 올려서 포판에 계신 태자께 적군이 안읍에 당도했음을 알려라! 또 곧 적군의 공세가 시작될 테니 수성 병기를 가동할 준비를 하고 성벽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궁수와 노궁수 부대에 시위에 화살을 걸어두라고 전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
잠시 후 안읍성을 지키는 고조선군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각자의 위치로 이동해 적을 맞을 준비를 마치고 도시 한복판에 만들어둔 봉화에 불을 붙였다.
왕흘은 안읍성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혀를 차면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쯧! 적장을 속이는 데는 실패한 건가? 안읍성주란 자가 듣던 것만큼 우매한 자는 아닌 모양이구나! 스스로 성문을 열지 않으면 쳐서 떨어트릴 뿐이다! 기병대는 안읍성 주변의 마을을 습격해 식량을 빼앗아오고 보병대는 파상공세로 성을 공격하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조선과 위나라의 중갑보병을 상대하기 위해 철퇴와 도끼 따위로 무장한 진나라군 병사 중 10만 명이 우레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사방에서 안읍성을 향해 돌격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돌격하라! 안읍성을 떨어트려라!”
고조선군 병사들은 성벽 위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긴 채로 고막을 찢을 듯한 적군의 함성을 듣고 마른 침을 삼켰지만, 이목은 커다란 방패를 든 호위병들과 함께 망루 위에 올라 진나라군 진영을 살펴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왕흘이 너무 조급했구나.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공성전을 치르려는 장수가 화살을 막을 분온차나 쇠뇌도 가져오지 않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하긴, 저자는 이 성을 지키는 병사가 8천 명도 안 된다고 알고 있었겠지.”
이목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가 적군이 활과 쇠뇌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곁에 있는 기수에게 지시했다.
“깃발을 흔들어 전군에 발사명령을 내려라.”
“알겠습니다! 장군님!”
기수는 손에 들고 있는 파란색으로 염색한 큰 깃발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 모습을 본 고조선군 장수들이 잇따라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군! 전방에서 몰려오는 적을 향해 발사!”
“편전을 가진 병사는 적의 장수와 사다리를 든 병사에게 조준 사격을 가하라!”
그러자 2만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화살이 일제히 활과 쇠뇌의 시위를 떠나 거대한 무지개 같은 포물선을 하늘에 그리면서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던 진나라군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대부분 변변한 갑옷은커녕 투구조차 쓰고 있지 않고 선두에서 돌진하던 진나라군의 경보병들은 곧 온몸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면서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화살이 왜 이리 많이 쏟아져! 으아악!”
왕흘은 진나라군 병사들이 볏짚처럼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안읍성주가 성동격서의 계책을 눈치채고 미리 원군을 불렀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서 안읍을 포기할 수는 없지! 일단 병사들을 물리고 서둘러 목만(木鏝)을 만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