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안읍 전투 (1)
기원전 246년 5월 초, 한부는 고조선의 21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영토 서남쪽에 치우쳐져 있는 도시 안읍의 근교에 도착했다.
잠시 후 고조선군 행렬의 선두에서 행군하는 병사들의 눈에 안읍을 둘러싼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상장군 무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제봐도 지키기 쉽지 않은 위치에 들어서 있는 성이군. 그나저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략적 요충지의 성벽을 전혀 보수하지 않다니. 위나라 폐주 어의 어리석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한부는 무명의 푸념을 듣고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성을 지키려면 성벽이라도 든든해야 하는데 얼핏 봐도 여기저기 반쯤 무너진 곳이 보이니 원······.’
안읍은 현대 중국의 산서성 남부에 자리 잡은 도시로 위나라의 옛 수도이기도 하다.
이곳은 중국의 사료에 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가 수도로 정했다고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도시가 세워진 교통의 요지이지만 편평한 분지 한복판에 놓여있기에 적군의 침략으로부터 수성전을 펼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위나라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온 진나라의 침략에 언젠가 안읍이 함락될 것을 걱정하여 위나라 영토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대량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도를 옮긴 후 역대 위나라의 군주들은 위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인 안읍을 포기하지 않고 튼튼한 성벽을 쌓아서 적의 침략에 대비해 왔지만, 폐주 어는 진나라와 화친을 맺으면 진나라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안읍의 성벽 보수를 게을리 해왔다.
한부는 말 위에서 안읍성의 성병과 주변의 지형을 자세하게 살펴본 후 상장군 무명에게 물었다.
“상장군. 안읍은 평지에 세워진 성인 데다 강을 끼고 있지도 않은 데다 성벽도 부실해서 진나라와 한나라의 50만 대군을 막아내기 쉽지 않아 보이오. 차라리 이곳을 버리고 위나라 영토 동쪽 깊숙한 곳에서 적을 요격하면 어떻겠소?”
“음······. 소장도 전하의 심정을 이해하오나 교통의 요지인 안읍을 버리고 후퇴했다가 진‧한 연합군이 위나라 서부를 점령한 다음 더는 진격하지 않으면 위나라는 나라가 반 토막이 나고 우리 조선은 대군을 움직이느라 아까운 물자만 낭비하고 아무 소득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일전에는 진나라가 이번 원정에서 위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 진나라의 최종적인 목표는 중원 통일이니 그럴 생각일 겁니다. 전하, 하지만 진나라 조정은 우리 조선군의 개입으로 당장 위나라 영토를 전부 점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우선은 안읍 일대에 새 나라를 세워서 옥새를 가진 폐주 어를 왕으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아······! 경의 말대로 여불위 그자라면 옥새와 정통성을 갖춘 폐주를 앞세워서 위나라의 제후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킬 계책을 준비했을지도 모르겠구려! 그렇게 내전으로 위나라가 약해지면 그때 본색을 드러내려고 말이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또 안읍이 있는 산서는 진나라의 파촉 땅을 제외하면 중원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어차피 이 지역을 잃으면 위나라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는 동맹국을 잃게 되는 것이구려. 알겠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읍을 지켜냅시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고조선군은 안읍성의 동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성문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안읍성주가 거대한 갈색 한혈마를 탄 한부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읍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선의 태자시여. 저는 안읍성주 이백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성주. 50만이나 되는 적군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경황이 없을 터인데 이렇게 마중 나와줘서 고맙소.”
“듣던 대로 참으로 겸허하신 분이시군요. 감사는 우리 위나라인들이 드려야 마땅할 듯합니다. 이곳에 안 계신 대왕 폐하를 대신해 수십만 명이나 되는 지원군을 보내 주신 조선의 왕검 폐하와 전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음? 위나라 왕이 안 계시다니? 위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서신에는 왕께서 직접 15만 대군을 이끌고 먼저 안읍으로 향하셨다고 적혀있었소.”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왕께서는 이미 이레쯤 전에 안읍에 도착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성벽이 부실하고 지형이 수성전에 불리한 것을 보시곤 안읍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 포판성과 임진 지역에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진나라와 한나라의 연합군을 막아낼 방어선을 구축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장군 무명은 안읍성주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역시 위나라 왕께서는 전략적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소장이 같은 입장이었어도 안읍보다는 포판과 임진의 강에서 진나라군을 상대했을 겁니다.”
“포판성 일대가 그렇게 수비하기에 좋은 지역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포판성을 치려면 성의 서쪽과 남쪽을 감싸듯 흐르는 임진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강에는 보병이 걸어서 도강할 수 있을 만큼 얕은 지점이 없습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병사들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기다리는 위나라군 궁수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배나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부는 무명의 말을 듣고 포판 일대의 지형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ㄴ자로 흐르는 강의 꼭짓점쯤에 포판성이 있단 말이지? 확실히 여기보다는 거기가 지키기 편하겠네. 잠깐만······. 안읍하고 포판, 그리고 임진의 강? 왠지 익숙한 지명인데?! 아! 맞다! 그 유명한 한신의 성동격서!’
한부는 원역사의 초한쟁패기를 대표하는 명장 한신이 기원전 205년에 바로 이 지역에서 펼쳤던 천재적인 전략을 생각해내고는 자기도 모르게 말의 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초한쟁패기에 한나라의 유방은 숙적인 초나라의 항우와 위나라 왕 표에게 협공을 당하게 되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부하 장수인 한신에게 군사를 맡겨서 위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한신은 유방의 명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임진의 강 근처에 도착하지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위나라 왕 표는 임진의 강을 끼고 포판을 근거지로 하여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해 한신이 무리한 공격을 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한신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포판 쪽에서 강을 건너 위나라군을 칠 것처럼 소란을 피우고 자기는 직접 별동대를 이끌고 포판보다 북쪽에 있는 도시 하양으로 가 그곳에서 임진의 강을 건넌 다음 수비병력이 거의 없는 안읍을 점령했다.
물론 이번 전투에서는 고조선‧위나라 연합군이 임진의 강 동쪽에 자리 잡은 수비군이고 진‧한 연합군은 공격 측이라 고조선군이 한신의 성동격서 전략을 그대로 모방하여 적군을 물리칠 수 없겠지만, 한부는 다시 한번 미래의 역사 지식을 토대로 적군을 함정에 빠트릴 계책을 생각해냈다.
“성주. 안읍성에는 나무로 만든 항아리가 얼마나 비축되어 있소?”
“나무 항아리 말씀입니까? 지금 당장은 몇 개가 있는지 바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안읍은 큰 도시이니 그런 흔한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임진의 강을 건널 때 쓸 목앵부(木罌缶)를 만들려고 하니 나무 항아리를 좀 구해줄 수 있겠소?”
“목앵부라 하시면 물에 띄운 나무 항아리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아서 다리 대신으로 쓰는 물건 말씀입니까?”
“그렇소. 바로 그 물건이오.”
“적군 진영에 별동대를 보내 기습하실 생각이신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반나절 안에 말씀하신 물건을 넉넉하게 구해놓겠습니다!”
안읍성주는 한부와의 대화를 마친 후 즉시 곁에 있는 관리에게 나무 항아리를 구하라고 지시했다.
상장군 무명은 그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이번 원정군은 상방 여불위가 장군 왕흘과 함께 직접 지휘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여불위는 상인 출신이지만 이미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왕실을 정벌한 경험이 있어 병법에 아주 어둡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적장이 주둔지 근처의 경계를 허술히 하여 우리 군의 기습을 쉽게 허용할지 의문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상장군. 우리 조선의 병사 중 단 한 명도 강을 건너게 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목앵부는 왜 만드시려는 겁니까?”
“말하자면 기니 포판에서 위나라 왕을 만나면서 그때 내가 구상한 전략을 설명해주겠소. 그러니 경은 극신 장군과 함께 열다섯 개 군단을 이끌고 먼저 포판에 가 있으시오. 난 이곳에서 볼일을 마치고 금방 따라가겠소.”
“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상장군 무명은 한부에게 읍한 후 극신과 함께 15만 명이 조금 병사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런 다음 한부는 장군 이목을 불러서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임무를 맡겼다.
“이목 장군. 경에게 다섯 개 군단을 맡길 테니 안읍과 포판 사이에 숙영지를 차리고 주둔하다가 포판 쪽에서 봉화가 올라오면 즉시 안읍으로 돌아가서 적군의 공세로부터 성을 지킬 준비를 하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진나라와 한나라의 병사들은 모두 임진의 강 너머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안읍의 수비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처럼 속여서 안읍에 별동대를 보내 기습공격 하도록 유인할 생각이오. 그대의 임무는 임진의 강을 넘은 적군보다 먼저 안읍성으로 돌아가서 포판에 있는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오.”
“진나라와 한나라의 연합군이 안읍을 치려고 보내는 별동대라면 적어도 20만 명 정도의 규모일 겁니다. 그 많은 적군을 5만 명이 넘는 정도의 병력으로 물리치란 말씀이십니까?”
“이번 임무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조선의 장수 중에서 오직 경뿐이오. 아니지. 온 천하의 장수를 통틀어도 신평군 염파를 제외하면 그대뿐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소장을 신평군과 버금가는 장수로 평가해 주시는데 물러설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적이 정말로 안읍성에 도달한다면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그럼 그대만 믿고 포판으로 출발하겠소.”
원역사의 이목은 기원전 229년에 그와 마찬가지로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4대 명장인 왕전을 앞세운 진나라군의 공격으로부터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지켜냈을 정도로 수성전에 특히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한부는 그런 그가 왕전이나 백기도 아닌 여불위와 왕흘이 이끄는 진나라군을 막아내지 못할 리 없다고 여겼다.
그는 안읍성주에게 고조선군이 가져온 물자를 이용해 서둘러 성벽을 보수하라고 지시한 다음 기병 1백 기만 데리고 포판으로 항해 위나라 무기 왕과 상장군 무명을 만나 자신의 전략을 설명해주었다.
새 위나라 왕은 원래 병법에 밝은 인물이었기에 한부의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적장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려서 우리의 안마당으로 끌어들여 일망타진하시겠단 말씀이구려! 참으로 신묘한 작전이오! 신중한 여불위도 이렇게 향기로운 미끼를 물지 않고는 못 배기지 않겠소?!”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위나라 병사 중에서 가장 능청스러운 자들을 뽑아 주시면 바로 작전을 시작하시지요.”
“그리하겠소. 조선의 태자여. 벌써 궁지에 몰린 여불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