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새로운 분쟁의 씨앗
왕의 허락을 받은 위나라군 장수는 즉시 대량성의 북문으로 돌아가 성문을 활짝 열어젖혀 신릉군을 지지하는 제후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병사 1만 명을 들여보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말을 타고 성문을 지난 제후가 대량성의 북문을 지키는 수비대장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아직 폭도들이 도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한 것 같구나. 간신히 시간을 맞췄군. 대왕께서는 무사하신가?”
“그렇습니다. 사 대부님.”
“어서 대왕께서 계신 곳을 알려다오. 먼저 그 주변에서 난동을 부리는 반역자 무리를 먼저 진압해야겠다.”
“대왕께서는 폭도들을 피해 궁궐 안에 계십니다.”
“왕께서는 이 와중에도 실망한 제후와 성난 백성을 달랠 생각은 안 하고 궐 안에 틀어박혀 계신다는 말인가? 하······. 참으로 한결같은 분이시군.”
“무······ 무슨? 사 대부님! 어찌 그토록 불경한 말씀을 입에 담으시는 겁니까!”
수십 년 동안 위나라 왕실을 섬겨온 제후는 수비대장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1만 명의 병사들이 위나라 왕을 따르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검과 창을 들이밀며 제압하자 방심하고 있던 대량성의 수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제압당하며 가지고 있던 무기를 빼앗긴 후 밧줄로 포박당했다.
갑자기 달려든 두 병사에게 양팔을 붙잡혀 바닥에 엎어진 북문의 수비대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소리쳤다.
“설마 제후들이 모반을 일으켰을 줄이야! 사 대부! 조상 대대로 위나라 왕실을 섬겨온 제후 가문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소!”
“후······. 본인이라고 이러면서 마음이 편한 줄 아느냐? 하지만 나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걸 막으려면 어찌할 수 없구나.”
그는 격분하는 수비대장에게 그렇게 대답한 후 곁에 있는 챙이 넓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있는 중년의 선비에게 말했다.
“공과 여기 모인 제후 다섯 명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정말 형님이신 왕을 옥좌에서 끌어내시고도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본인은 이미 형제간의 도리를 저버려서라도 조국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전하기로 굳게 결심했소.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대의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중년의 선비가 제후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삿갓을 벗어 던지자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고 있던 대량성의 수비병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시······ 신릉군? 벽지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에?”
“전국 사군자 중 으뜸이라고 불리시던 분이 반역자로 영락하시다니······.”
신릉군은 그런 병사들의 말을 듣고 곁에서 시중을 드는 병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병사는 어명을 받들어 신릉군을 죽이러 왔었던 장수의 투구를 두 손으로 높이 들었고 대량성의 북문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보여 주었고 신릉군은 그 투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소리쳤다.
“보라! 위나라의 용사들이여! 너희 중 이 투구가 왕실의 근위대장이 쓰는 물건이라는 걸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중 눈치가 빠른 자들은 얼마 전까지 깊은 산속에 유폐되어 있던 본인과 대량성에서 먼 곳의 영지에서 지내고 있던 제후들이 이 물건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외침을 들은 몇몇 대량성 수비대 소속 장수와 병사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왕께서 먼저 은밀히 신릉군을 해치려고 하셨구나······!”
“죄 없는 동생을 그저 질투심 때문에 해치려 하시다니! 왕께서도 너무하셨구먼!”
신릉군은 위나라 왕의 병사들이 점점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 신릉군이 그저 일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반역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예전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본인을 객경(客卿)으로 대접해온 조나라에 다시 돌아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본인이 거사를 일으킨 이유는 오직 우리 위나라를 통째로 진나라에 바치려 하시는 왕의 폭거를 멈추기 위해서다! 본인이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천하의 어느 나라가 가장 기뻐하겠나? 누가 중원의 다른 나라와 협력해 진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겠나?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왕께서는 왜 본인을 참수하시려 하셨겠는가?! 위나라의 백성들이여! 진나라에 복속하고자 혈육과 백성을 저버린 폭군을 몰아내고 이 신릉군과 함께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전하자!”
신릉군이 열정적인 연설을 마치자 수많은 위나라군 병사들과 거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이 우레같은 환호성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진나라의 융적에게 굴복한 왕을 몰아내자!”
이제 1만 명에 불과했던 신릉군의 반란군에 왕실 근위대 소속이 아닌 대량성의 수비병 중 상당수와 성난 백성들이 속속 합류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나 관청과 병영, 그리고 궁궐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왕실 근위대의 장수들은 신릉군이 이끄는 반란군보다 먼저 궁궐을 향해 말을 달려 위나라 왕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폐하! 폐하!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어서 피난길에 오르셔서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그게 무슨 소리냐! 제후들이 데려온 지원군을 성안에 들이고도 반란군 무리를 진압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자들은 지원군이 아니라 신릉군을 따르는 반역자들이었습니다! 폐하! 대량성을 지켜야 할 병사들은 오히려 반역자 무리에 합류하거나 탈영하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대량성을 떠나셔야 합니다!”
“역시 신릉군은 그 교만한 것이 오래전부터 옥좌를 넘보고 있었구나! 혈육의 정을 떨쳐내지 못하고 진작에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폐하! 한탄은 나중에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아직 서문 쪽에는 반란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으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서 소장이 가져온 군복으로 환복하시옵소서!”
“제왕이 천것의 옷을 걸치고 죄인처럼 도망쳐야 한다는 말이냐! 신릉군! 이 원한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위나라 왕은 환복을 도와줄 궁녀를 부를 틈도 없이 옥좌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어 던지고 일개 병사의 옷을 몸에 걸친 후 위나라 왕실의 옥새를 챙겨 궁궐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대량성 수비대의 병사들은 일찌감치 저항을 포기하고 반란군에게 투항하거나 탈영해 버렸고 신릉군은 손쉽게 궁궐을 점거할 수 있었다.
계는 신릉군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 알현실에 들어서면서 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감축드리옵니다. 위나라의 새로운 제왕이시여. 이제야 위나라의 옥좌가 자격을 갖춘 왕족에게 돌아갔으니 곧 천하의 모든 나라가 평안해지고 중원의 모든 백성이 전쟁을 잊게 될 겁니다.”
그러나 신릉군은 빈 옥좌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아직은 평화로운 시대가 오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겠구려.”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대량성을 접수하시지 않았습니까?
위나라의 국력을 소진하지 않고 왕위에 오르신 데다 거의 모든 백성이 폐하를 반기니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시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대의 말처럼 됐으면 좋겠지만, 형님께서 옥새를 가지고 도성을 빠져나가시고 말았소. 진나라의 상방 여불위가 그런 형님을 이용해 아무 일도 꾸미지 않을 리가 있겠소?”
계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 * *
“헉······ 헉······. 드디어 지긋지긋한 추격자들을 따돌렸구나! 이젠 살았어!”
겨우 십여 명의 호위병과 함께 위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국경을 넘은 폐주 어는 체통도 잊어버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 한 달 동안 병사나 상인, 심지어 거지로 변장하고 도보로 새로운 왕을 섬기는 위나라군 병사들의 눈을 속이며 진나라 땅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진나라군 기병 수십 기가 국경지대를 순찰하다가 허름한 옷을 입은 폐주 일행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어느 나라의 거지 녀석들이 진나라 땅을 밟으려는 것이냐? 썩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폐주 어는 병사의 호통을 듣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너무 지쳐서 화를 낼 힘도 없었기에 품속에 넣어둔 작은 주머니를 꺼내 진나라 병사들에게 보여 주면서 대답했다.
“이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보고도 우리를 거지 취급 하겠느냐?”
진나라 병사는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허······. 옥으로 만든 커다란 인장이라.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체 높은 제후께서 여행 중에 도적 떼를 만나신 모양이군요.”
“도적에게 당한 게 맞다. 물건이 아니라 나라를 훔쳐 간 큰 도적을 만났지.”
“나라를 훔친 도적? 그럼 이 도장이 옥새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본래 야외에서 함부로 꺼내 들어도 되는 물건이 아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하마.”
폐주 어는 불쾌한 듯 주머니에서 옥새를 꺼내 밑바닥을 보여 주었고 그것을 본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진나라군 장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급히 그에게 읍했다.
“위나라의 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근처의 마을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폐하.”
“후······. 네 태도를 보니 올해 보위에 오르신 진나라 왕께서도 선왕처럼 위나라를 아끼시는구나. 역시 진나라에 망명하길 잘했어!”
진나라의 기병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폐주 어를 데리고 가까운 마을로 데려가 그 지역을 다스리는 현령에게 보고했다.
진나라의 현령은 상방 여불위가 고조선의 세력을 하북과 요서에서 몰아낼 때까지 위나라와 가까이 지낼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폐주 일행을 극진히 대접한 다음 수도 함양에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자기 저택에서 이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불위는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읽은 후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빨개지더니 손에 든 죽간을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멍청하고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고! 그동안 제 놈을 구워삶느라고 들인 재물과 시간이 얼마인데 제 밥그릇도 지키지 못하고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단 말이냐! 추수철만 지나면 세 나라의 연횡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을 칠 생각이었거늘! 게다가 새로 위나라의 옥좌를 차지한 게 하필 신릉군이라니!”
신릉군은 진나라를 대표하는 몽오를 능가하는 군사적 재능과 당대 최고의 외교적 능력으로 진나라를 견제해 왔기에 조나라의 명장 염파 이상으로 진나라의 중원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인 인물이다.
그런 신릉군이 위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진나라가 이미 포섭해둔 초나라와 한나라도 언제 고조선을 치기 위한 연횡책에서 빠지고 대신 진나라를 견제하는 합종책에 합류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사는 상방의 외침을 듣고 안색이 굳어지면서 그에게 조언했다.
“여 상방님. 위나라가 갑자기 적대국으로 돌아서서 당황스러우시겠지만, 다행히도 옥새를 가진 폐주가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자를 다시 옥좌에 돌려놓는다는 명분을 들어 위나라를 치시면 아직은 적지 않은 위나라의 제후가 우리를 도울 겁니다.”
“자네 말이 옳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의 병사들로만 위나라를 치면 흉노와 손잡은 조선에 조나라에서 보낸 지원군까지 한 번에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니 답답하구나. 일전에 몽오 장군을 잃었을 때와 같은 실책을 범해서는 안된다. 이사! 나는 함양에서 위나라 정벌을 준비할 테니 너는 서둘러 조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초나라의 왕을 설득해 이번 원정에 합류하도록 설득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 상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