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위나라를 다루는 법 (3)
신릉군은 계의 말을 듣고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맹수처럼 고함을 질렀다.
“발칙한 놈! 감히 나보고 반역을 일으켜 형제를 옥좌에서 몰아내라고 꼬드기는 거냐! 나 신릉군 위무기, 일신이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고 해도 조국 위나라를 배반할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평소 온화해 보이던 신릉군의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그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계조차도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계는 신평군이 반발할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기에 침착하게 한부가 전해준 말을 그에게 전했다.
“신릉군. 공이 위나라 왕이 바라는 대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시면 위나라 왕실이 난세의 풍파와 진나라의 침략을 견뎌내고 종묘사직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뭐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지요. 공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면 위나라는 반드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망합니다. 지금의 위나라 왕은 여불위의 술수에 놀아나다가 진나라에 나라를 통째로 바치고 말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는 신릉군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원역사의 신릉군은 기원전 247년에 진나라가 장군 몽오를 앞세워 위나라에 쳐들어오자 위나라 왕의 부름을 받고 조국에 돌아와 뛰어난 외교력으로 위, 조, 한, 초, 연 5개국의 합종군을 구성하고 직접 총사령관이 되어 진나라군을 물리쳐 함곡관 너머로 쫓아냈다.
하지만 위나라 왕은 다시 한번 나라를 구한 동생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전쟁이 끝나자마자 병권을 빼앗아버렸고 이에 상심한 신릉군은 술독에 빠져서 살다가 기원전 244년에 술병이 도져서 죽고 말았다.
그렇게 진나라의 침략을 막아낼 마지막 보루를 허무하게 잃은 위나라는 신릉군이 사망한 지 겨우 18년 뒤에 진나라의 대대적인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릉군은 이복형인 위나라 왕의 됨됨이와 적국 진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원 통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죽고 나면 조국에 닥칠지도 모르는 비극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왕께서는 대체 왜 이 아우를 미워하신 말인가······. 어째서 이 아우가 애써 모은 3천 명의 현사를 중용하여 무너져가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지 않으신단 말인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데 어찌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생각으로 가득한 진나라를 가까이하신단 말인가!”
계는 그런 신릉군의 모습을 보고 등 뒤에 서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설공과 모공을 모시러 간 요원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두 분을 모시러 간 무리가 방금 산 밑에 도착하였다 합니다. 수장님.”
그 말을 듣고 신릉군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계에게 물었다.
“그대가 설공과 모공을 어찌 알고 있는 것이오?”
“그 두 사람은 신릉군을 따르는 수많은 식객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기로 유명한 분들이지 않습니까? 지금 대량에서는 공의 저택에서 묵고 있던 식객들이 핍박을 받고 있을 테니 제 수하들에게 우선 그 두 사람이라도 피신시키라고 명했습니다.”
“뭐라고?! 그럼 왕께서 본인의 식객들까지 잡아들이라고 명하셨단 말이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신릉군.”
“말도 안 돼! 왕께서 아무리 본인을 미워하시더라도 죄 없는 선비들을 핍박하실 리 없소!”
“곧 그 두 사람을 만나시면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금방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잠시 후 고조선 암부의 요원 열 명이 신릉군의 오두막 앞마당에 꾀죄죄한 평민의 옷을 입고 있는 설공과 모공을 데려왔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말을 달리고 가파른 산비탈을 걸어서 오르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신릉군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오두막 안뜰로 달려와 그에게 읍했다.
“신릉군! 무사하셨군요!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늘이 아직 우리 위나라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신릉군!”
“설공! 모공!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왜 그대들이 막 밭일을 마친 농사꾼 같은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오?”
“관군이 신릉군을 따르는 식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저택에서 빠져나오던 중 이 사람들을 만나 농부의 옷과 말을 빌려서 도망쳐 나오는 길입니다.”
“그럼 왕께서 본인의 식객들을 잡아들이라 명하셨단 말인가······? 그 말이 사실이오?!”
“설공과 제가 신릉군께 거짓을 고할 리가 있겠습니까? 진나라의 상방 여불위가 우리나라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판에 왕께서는 수많은 선비를 이유 없이 핍박하시니 위나라의 장래가 어둡습니다.”
“아······! 대체 내가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래서야 나라의 평온을 위해 이 한 몸을 희생하려고 해도 마음 편히 눈을 감지도 못하겠구나!”
설공과 모공은 신릉군의 한탄을 듣고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릉군. 이제 형제간의 정을 잠시 잊고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큰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입니다. 어리석은 왕을 옥좌에서 끌어내리시고 왕위에 오르십시오.”
“설공의 말이 옳습니다. 신릉군. 이미 죄 없는 현사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여러 제후가 폭군에게 마음을 돌렸고 대량성의 민심도 왕을 떠났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궁벽한 산에서 벗어나 위나라를 아끼는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십시오.”
“그대들까지 내게 조선의 태자와 같은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신릉군. 어차피 이대로 가다가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진나라에게 바치게 될 뿐입니다.”
원역사에서 설공과 모공은 기원전 247년에 진나라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위나라 왕이 불렀을 때 귀국을 망설이던 신릉군을 설득해 구국의 결단을 내리게 한 자들이었다.
현재의 신릉군도 수년 동안 가장 아껴온 두 현사의 말을 듣고 깊이 고민하다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후······. 다른 방도가 없구려. 하지만 지금의 왕을 폐위시키려면 먼저 높고 튼튼한 성벽과 수만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 대량성을 떨어트려야 할 터인데······.”
그 말을 듣고 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관군에게 붙잡히기 전에 대량성 밖으로 도망친 공의 식객들이 위나라 왕에게 실망한 여러 제후에게 찾아가 공을 왕으로 추대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이제 며칠 후면 제후들이 1만 명이 넘는 병사를 이끌고 대량성 안의 관청과 궁궐을 점거할 겁니다.”
“겨우 1만 명의 병사가 어떻게 2만 명이 넘는 수비병력이 지키고 있는 대량성의 성벽을 넘는단 말이오?”
“그 부분은 이미 제 수하들이 손을 써놓았으니 기다려 보시지요. 어리석은 위나라 왕은 신릉군을 따르는 제후와 병사들에 스스로 성문을 열어줄 겁니다.”
* * *
계가 위나라 왕이 보낸 병사들을 물리치고 신릉군을 구해냈을 때, 대량성 안에서는 위나라 왕의 폭거에 경악한 백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고조선 암부의 요원들이 위나라 왕이 이미 신릉군에게 쌀과 밀 대신 모래와 톱밥을 보내 굶겨 죽이려 하다가 이 사실이 드러나자 자객을 보내 죽이려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다.
신릉군은 평소 성품이 어질어 신분이 낮은 사람을 대할 때도 늘 공손했고 살림살이가 어려운 백성을 도운 적도 많았기에 정치에 무지한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다.
대량에 사는 백성들은 처음에는 이 소문을 반신반의했지만, 관군이 신릉군의 식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위나라 왕이 신릉군을 해치려 한다는 그들의 의심은 이제 완전히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천하에 성인군자로 이름을 떨친 동생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려 하다니?”
“나랑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선비 나리도 오늘 낮에 잡혀가셨어. 그냥 신릉군의 저택에서 묵고 계셨을 뿐인데 말이야. 못난 왕이 드디어 실성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자 대량성에 잠입해 있던 고조선 암부의 요원들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것 없는 위나라 백성들에게 또 다른 소문을 퍼트렸다.
“왕이 신릉군을 해치려고 하는 건 진나라 왕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라더라! 신릉군이 죽고 나면 조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진나라와 붙어먹으려고 말이야!”
“뭐?! 설마! 아무리 왕이 어리석어도 형제의 나라를 배신하고 원수 같은 진나라를 가까이하려고 하겠어?!”
“그럼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신릉군이 사라지면 천하의 모든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기뻐하겠어? 진나라밖에 없잖아!”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신릉군이 안 계셨으면 진나라는 10년도 전에 이미 조나라를 멸망시켰겠지. 그런 다음에는 우리 위나라를 집어삼켰을 거고.”
“그렇다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 진나라에 나라를 넘겨주고 융적을 왕으로 모시게 되는 수가 있어!”
“절대로 안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못 본다고!”
위나라 백성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진나라의 침략에 시달려 왔기에 진나라에 대한 반감이 아주 높았다.
그렇기에 위나라 백성들 사이에 왕이 진나라에 적대적인 인물 중 대표격인 신릉군을 죽이고 진나라와 동맹을 맺고자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량성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조정은 신릉군과 그의 식객들을 탄압하지 마라!”
“형제의 나라인 조나라를 버리지 마라! 원수의 나라 진나라를 멀리하라!”
신하들을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위나라 왕은 정말로 진나라와 동맹을 맺고 언젠가 조나라 땅을 넘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화를 내면서 대량성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명했다.
“신릉군에게 물든 어리석은 백성들이 주제넘은 짓을 하는구나! 거리에 나와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몽둥이로 두들겨서 흩어버리고 주모자를 잡아들여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얼마 후 대량성의 위나라군 병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거리로 몰려나온 백성들을 탄압했지만, 고조선 암부의 요원들이 계속 음지에서 활약한 덕에 산발적인 소요 사태는 불과 며칠 만에 거대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성난 백성무리가 대량성의 거리마다 넘쳐나자 당황한 관리들은 왕에게 몰려가 사태를 보고했다.
“폐하! 관군의 진압에 반발한 수많은 폭도가 시장을 점거하고 관청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내버려 두면 곧 수만 명으로 불어난 폭도가 궁궐을 포위할지도 모릅니다! 폐하!”
관리들의 보고를 듣고 성난 위나라 왕은 길길이 날뛰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면 성안의 모든 관군을 동원해서라도 폭도들을 주살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일까지 짐이 일일이 명을 내려야 하느냐?!”
“성안 거의 모든 곳에 폭도가 넘쳐나니 병사가 부족해 한 번에 민란을 진압하기가 어렵사옵니다. 폐하. 대량성의 어느 곳에서 날뛰는 폭도부터 흩어버릴지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크······! 참으로 답답하구나!”
그런데 그때, 젊은 위나라군 장수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알현실에 들어오더니 밝은 목소리로 위나라 왕에게 말했다.
“기뻐하시옵소서! 폐하! 여러 제후가 대량성의 소식을 듣고 민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1만 명의 병사를 모아왔다고 합니다!”
“하늘이 짐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어서 성문을 열어 제후들을 맞이하고 폭도를 진압하라는 짐의 명을 전해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