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두 번째 명장을 얻다. (3)
이목은 계에게 설득당한 후 대성에서 데리고 온 기병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조선 땅에는 나 혼자 가겠다. 너희는 모두 북방으로 돌아가서 흉노의 침략을 막는 데 힘을 보태라.”
그러자 1백 명의 병사들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이 장군님! 장군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외국에 망명하려 하시는 와중에 어찌 저희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모두 장군님의 곁은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이목은 병사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반역자로 몰린 몸이라 지금까지처럼 여행 도중에 말이 지치면 돈을 내지 않고 조나라의 역참에 들러서 쉬거나 말에게 건초를 먹일 수 없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상인이나 유학자로 위장한다고 해도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로 1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조선 땅에 도착할 때까지 쓸 식량과 보급품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야.”
“그런······. 장군님께서 이토록 큰 곤경에 처하셨는데 아무 도움도 드릴 수 없다니요······.”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너희 중 나와 함께 가지 못하는 기사들은 서둘러 대 땅으로 돌아가서 내 가족에게 깊은 산 속에 몸을 숨기거나 조선 땅으로 도망쳐서 계에 있을 나를 찾아오라고 전해 다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밤낮으로 말을 달려서 반드시 장군님의 일가에게 해가 미치기 전에 손을 쓰겠습니다.”
이목을 호위하던 기병들은 수년 동안 함께 북부를 지켜온 장군에게 읍한 후 대 땅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이목은 한동안 떠나가는 부하들의 뒷모습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계에게 말했다.
“임 위. 이만 근처의 마을에서 평민의 옷을 구한 다음 조선 땅으로 몸을 피해야겠네.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이 무사하길 바라네.”
“이 장군님. 이곳에서 옛 연나라의 도성인 계까지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도 엿새는 걸리는 거리입니다. 상인으로 위장하시려면 필시 도보로 이동하셔야 할 텐데 그 먼 길을 혼자서 가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기병은 한 명을 육성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지. 흉노가 전보다 더 강성해진 마당에 내 한 몸 지키자고 북부를 지켜야 할 귀중한 나라의 병사들을 함부로 빼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혼자 먼 길을 여행하시면 관군의 눈을 피하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도적 떼를 만나면 봉변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그러니 저희가 대 땅으로 돌아간 기병들 대신 이 장군님을 모시겠습니다.”
“자네들이? 나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겠단 말인가?”
“어차피 지금쯤이면 제가 모시던 대부께서는 우리가 어명이 적힌 밀서를 훔쳐서 달아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고향에 돌아가 봐야 기다리는 건 참수형뿐이니 차라리 동이족의 땅으로 망치는 편이 낫습니다.”
“날 구하려다 자네들까지 신세를 망쳤구먼······. 고맙다. 훗날 왕께서 오해를 푸시고 나를 다시 찾으시면 이 은혜를 반드시 갚으마.”
“그럼 우선 저희가 미리 마련해둔 근처의 야산에 있는 오두막으로 가시지요. 장군님. 그곳에 평민의 옷가지와 약간의 노잣돈을 준비해 놨습니다.”
* * *
기원전 247년 4월 중순 상인으로 위장한 이목과 계 일행은 무사히 조나라 관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국경을 넘어 계에 도착했다.
마침내 그들이 막 성문을 들어섰을 때 이목의 눈에 성문과 시내를 잇는 대로에 깔린 붉은 천과 그 양옆에 늘어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수천 명의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목은 그 모습을 보고 실수로 남의 집 안에 들어선 사람처럼 놀라면서 계에게 말했다.
“임 위. 아무래도 곧 이 성문으로 조선의 왕이나 국빈이 지나갈 모양이네. 괜히 바닥에 깔린 붉은 천을 밟아 더럽혀 동이족의 심기를 거스르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테니 다른 성문으로 가세나.”
“이 장군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군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성문을 지키는 조선의 병사들이 우리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 조선인들은 성안에 들어오는 모든 여행객을 이런 식으로 환대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선의 태자께서 맹장이신 흉노의 선우를 궁지에 몰아넣으셨던 장군님의 실력을 높이 사셨기에 명장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을 뿐입니다.”
“뭐라고?! 자네 설마······! 일이 그렇게 돌아간 거였구나!”
이목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계를 노려보면서 품속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든 순간, 두 사람의 주변에 늘어서 있던 병사들이 그를 제지했다.
이목은 병법에는 밝지만, 무력이 특별히 뛰어난 장수는 아니었기에 금방 수가 많은 병사에게 양팔을 붙잡히고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빼앗겼다.
그러자 이목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이족의 교묘한 술수에 속아 넘어가서 조국을 등졌구나! 이제 내가 이 간악한 야만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면 누가 흉포한 선우가 이끄는 마적 떼로부터 조나라를 지킨단 말인가!”
그런데 그때, 온몸에 금과 은으로 도금한 강철 경번갑을 두른 한부가 붉은 천이 깔린 대로를 지나서 이목에게 다가오면서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목 장군! 누가 장군을 해친다고 그리 비통한 표정을 짓고 계시오?”
이목은 아직 한부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왕족이나 입을 법한 화려한 갑옷과 당당한 풍채를 보고 그가 고조선의 태자임을 알아차렸다.
“동이족의 태자가 포로가 된 이 몸이 덫에 걸린 사냥감과 같은 신세가 된 모습을 구경하러 온 거냐? 내가 어리석은 탓에 날 버리신 적 없었던 대왕과 조국을 배신했으니 더는 구차한 목숨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 너도 무장의 자긍심을 아는 자라면 더는 나를 능멸하지 말고 참수해라.”
“왜 하늘과 부모가 주신 목숨을 허비하려 하시오? 게다가 본인의 명으로 저기 있는 계가 그대의 목숨을 지키려고 약간의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조나라 왕이 경에게 반역자의 낙인을 찍은 것은 사실이오.”
“거짓말!”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시오. 계가 경에게 보여준 비단 조각에 적혀있는 필체는 조나라 왕의 것이었을 거요. 그리고 거기에 찍혀 있는 직인은 조나라의 옥새요. 조나라의 옥새가 그토록 쉽게 위조할 수 있는 물건이오?”
한부가 말하자 계는 이목의 짐을 뒤져서 조나라 왕이 친필로 적은 밀서를 꺼내서 다시 이목의 눈앞에 펼쳐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목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한부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차분하고 공손해진 말투로 물었다.
“머리를 식히고 다시 보니 확실히 위조된 밀서는 아니군.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이유로 조선의 재물과 시간을 적국의 장수를 구한 거요?”
“경처럼 뛰어난 무장이 억울한 누명을 써서 참수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오. 내 안목이 정확하다면 경은 언젠가 과거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진나라의 무안군 백기나 조나라의 대들보 신평군 염파와 맞먹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오.”
“조선 왕실은 재물이나 영토보다 인재를 탐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하지만 본인은 조나라 왕께 버림받았다고 해도 조선의 장수가 되어 조국의 심장에 검을 겨눌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니 조선의 태자여.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지 말고 내 목숨을 거두시오.”
“그대는 융통성 있는 무장인 줄 알았더니 신평군 만큼이나 꽉 막힌 구석이 있구려! 어찌 조나라의 무장이 되는 것만이 조나라를 지키는 방법이겠소?”
“그게 무슨 소리요?”
“설명을 듣기 전에 일단 함께 계의 시내를 구경합시다. 그래야 본인의 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한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목의 팔을 붙잡고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풀어주어라. 본인과의 대화가 끝나기 전에 허튼짓할 만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병사들이 태자의 명에 따라 이목을 놓아주자 한부는 수십 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이목을 데리고 계의 시내를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시장이었다.
계의 시장은 수백 년 전부터 번화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연나라가 고조선에 정복당하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상인과 상품이 넘쳐나는 국제 시장이 되어있었다.
때문에 이목은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계가 이토록 번성했을 줄이야······. 청년 시절에 들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도시가 되어버렸구나.”
한부는 그런 이목의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조선은 항해에 능한 남쪽 섬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원 대륙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천하의 여러 나라와 해상무역을 하고 있소. 그리고 이제 서쪽의 조선과 흉노가 혼인동맹을 맺은 후로는 서쪽 유목민 부족들과도 활발하게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덕에 조선 반도와 서쪽 초원 사이에 있는 임치가 교통의 요지로서 큰 발전을 이룬 것이오.”
“그랬군요······. 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은 데는 조나라와 진나라를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군요.”
이목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감탄과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시장 곳곳을 구경했다.
그에게 있어 조나라의 적국인 고조선이 부유해지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부는 그런 이목의 심정을 눈치채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시장 구경은 이쯤하고 이번엔 조선의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해보겠소?”
“적국의 장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겠단 말입니까?”
“글쎄. 본인의 생각에는 우리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그대도 조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 것 같구려.”
“다시 말하지만, 난 절대로 조나라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오.”
“일단 훈련장에 간 다음에 다시 얘기해봅시다.”
한부는 그렇게 대담하면서 이목을 계의 교외에 마련된 기병 훈련장으로 데려갔다.
태자의 명에 따라 그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상장군 무명은 두 사람이 훈련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한부가 고안해낸 새로운 기병을 양성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장창 기병대! 목표물을 향해 돌격하라!”
노장의 외치자 마갑을 걸친 덩치 큰 한혈마를 타고 온몸에 경번갑을 두른 기병 3백 기가 나무를 깎아서 만든 연습용 마상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전방의 허수아비를 향해 돌진했다.
- 두두두두두두두두!
고조선의 중장기병대는 편자를 박은 말발굽으로 지축을 울리며 앞으로 달려나가더니 길이 4m가 넘는 나무창의 뭉뚝한 끝부분을 허수아비의 가슴팍에 명중시켰다.
그러자 마치 전속력으로 달려온 황소의 뿔에 들이받힌 듯 허수아비를 지탱하고 있던 나무 막대기가 부러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콰각!
한부는 원 역사에서 중세에나 등장하는 카우치드 랜스 전술을 기원전 3세기 동아시아에서 재현한 것이다.
이목은 한눈에 랜스차징의 위력을 알아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허허······. 창끝이 허수아비에 박히는 게 아니라 아예 부러뜨려 버리다니······. 거기에 사람과 말이 모두 철갑을 두르고 있으니 활과 쇠뇌로도 쓰러뜨리기 어렵겠군요.”
“저들은 조선의 최강의 기병대인 개마무사요. 앞으로 이삼 년만 지나면 저런 중장기병을 3천 기쯤은 길러낼 수 있을 것 같소···.”
“조선이 저런 기병을 3천 기나 가질 정도면 흉노는 대체 얼마나 더 강성해질지······. 우리 조나라의 운명도 여기까지인가······.”
이목은 그제야 한부가 자기에게 거리낌 없이 조선 기병들의 훈련장면을 보여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갑과 일반적인 마상창보다 훨씬 길고 무거운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을 육성하려면 반드시 흉노에서 수입한 한혈마 같은 덩치 크고 힘센 말이 필요하기에 현대의 기준으로는 조랑말 크기의 말밖에 없는 조나라로선 그 비결을 알아도 중장기병을 육성할 수 없었다.
또한, 중장기병이 눈앞에서 돌진해와도 뒷걸음질치지 않는 창병을 육성하려면 몇 년에 걸친 오랜 훈련 기간이 필요한데, 잦은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회복하기에 바쁜 조나라에 그럴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한부는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이목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본인은 아직 조나라를 칠 생각이 없소. 지금은 조선과 조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견제하는 게 양국에 이익이 될 테니 말이오.”
“‘아직’이라 하심은 진나라를 평정하고 나면 얼마든지 조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지. 그러니 그대가 진심으로 조나라의 안위를 걱정한다면 조선 왕실의 신하가 되어 조선이 조나라를 치지 못하도록 왕검 폐하와 나를 설득해 보시오.”
“허······.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단 말입니까.”
원 역사에서 한나라의 왕족이자 법가의 대학자인 한비자는 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진시황의 신하가 되어 끊임없이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한 적이 있었다.
한부는 이목에게 조나라의 운명을 인질로 잡고 그의 재능을 사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목은 조국이 있는 남서쪽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부에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전하. 조선이 조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면 이 이목은 기꺼이 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