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두 번째 명장을 얻다. (2)
하북의 계에서 한부가 기뻐하고 있는 동안 조나라의 태자 언은 몇몇 제후와 신하가 보는 앞에서 조나라 왕에게 이목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하! 근래 북부에 다녀온 유학자와 상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대 땅에 불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하옵니다.”
“불온한 기운이라니? 태자야. 그게 무슨 소리냐?”
“장군 이목이 은밀히 백성들을 현혹하고 10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사병화한 다음 북부에서 왕처럼 행세하고 있다 하옵니다. 폐하.”
“음······. 짐도 이목 장군이 저번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도 소극적인 공세를 펼쳐 흉노의 선우를 놓친 걸 탐탁잖게 여기고 있긴 하다만, 설마 신평군 못지않게 고지식한 사람이 반역 따위를 꾀하고 있진 않을 것 같구나. 태자야.”
왕이 말하자 궁궐의 알현실에 있는 곽개에게 매수된 다른 제후와 대신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폐하. 만에 하나 태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목이 역심을 품고 대 땅에 자기 나라를 세운다면 우리 조나라는 진나라와 조선에 이어 또 하나의 적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 질 겁니다.”
“소신도 북부의 백성 중에는 전란에 시달려 피폐해진 남부의 백성들을 돌보는데 자신들이 낸 세금이 쓰이는 데 불만을 품은 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흉측한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이 이목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조나라 왕은 여러 신하가 태자의 의견에 동조하며 간언을 올리자 서서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흠······. 이토록 많은 신하와 대신들이 이목을 의심하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조선의 동이족
문제를 논할 때 빼고는 국정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태자까지 저리도 열변을 토하니 분명 북쪽에서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십여 년 전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범수에게 매수된 간신 무리에게 속아 수십 년 동안 조나라 왕실을 섬겨온 명장 염파를 해임하고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을 장군 자리에 앉혀 장평대전의 비극을 자초한 전력이 있었다.
그 후로도 조나라 왕의 사람을 보는 안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신평군 염파와 방난 등 대세에 거스르면서도 옳을 말을 할 수 있는 강직한 무장들은 모두 중원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고조선과 그 동맹국인 제나라와의 접경지역을 지키고 있었기에 결국 이목은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태자와 경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 이목을 한단으로 불러 진실을 밝히게 한 다음 정말로 반역을 꾀했다면 응당 참수할 것이다.”
조나라 왕이 말하자 태자 언은 신이 나서 곽개가 일러둔 말을 다시 아버지에게 전했다.
“폐하의 뜻을 곧이곧대로 대 땅에 전했다가는 이목이 어명을 거스르고 곧바로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명을 적은 비단을 옥대에 넣어 대 땅에서 한단으로 오는 길을 지키는 여러 장수에게 전하여 이목이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붙잡게 하면 어떻습니까?”
“태자야!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로구나! 곧 어명을 숨겨둔 옥대를 하나 만들어 줄 터이니 네가 믿을만한 장수를 골라서 건네주도록 하여라.”
“기꺼이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 * *
조나라 왕이 이목을 체포하기로 마음먹은 지 닷새 후 한단의 궁궐에서 일하는 궁인들이 어명을 적은 비단이 들어있는 옥대를 준비하자 태자 언은 그것을 모두 곽개에게 전하면서 자기 일을 맡겼고 다시 곽개는 그 옥대를 고조선 암부의 수장인 계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계는 한부가 구상한 계책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전했다.
“기뻐하십시오, 전하. 곽개가 구한 조나라 왕의 밀서를 품을 옥대가 방금 궁궐에 도착했습니다. 또한, 조나라 왕의 명을 받고 이목을 부르러 간 전령이 닷새쯤 전에 한단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조나라에서의 반간계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나 보군. 이제 이목을 만나서 옥대 안에 들어있는 밀서를 보여주고 잘 설득해보는 일만 남았구나.”
“소신이 직접 나서서 이목을 전하의 곁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마.”
* * *
한부의 밀명을 받은 계는 조나라군 기병으로 위장한 몇몇 부하를 데리고 은밀히 조나라의 국경을 넘는 동안 이목은 조나라 왕이 보낸 전령이 전한 어명이 적힌 죽간을 읽고 찝찝한 기분에 젖어있었다.
“내 공적을 치하하고 더 높은 작위를 수여하시겠다고? 내가 아는 왕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신데······.”
장평대전 이후 지금의 조나라 왕이 성격이 급하고 의심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조나라의 국경을 넘어 중원 대륙의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특히 이목은 몇 년 전 흉노를 궤멸시킬 큰 그림을 그리면서 북방의 유목민 세력을 상대로 지구전을 펼치다가 이를 답답하게 여긴 조나라 왕에게 해임당했던 경험으로 그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몸소 겪었던 터였다.
이목은 자신이 장군직에서 해임되던 해에 그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어 대 땅에 부임했던 후임자가 무리한 흉노 원정을 감행하다 애써 길러냈었던 병사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많은 병장기를 빼앗겼던 일을 떠올리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적어도 3년은 일찍 흉노의 마적 떼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었겠지. 그러면 조선의 군대가 전장에 난입해 공들인 전략을 망칠 일도 없었을 테고! 후······. 어서 유목민 마적 떼를 평정해야 진나라와 조선의 침략을 막는데 국력을 집중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와중에 대 땅을 비우라니! 왕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이목은 조나라 왕이 좋지 않은 뜻으로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데다 동호의 영토와 세력을 집어삼켜 전보다 더욱 강성해진 흉노의 침략이 걱정돼서 대 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명을 무시하고 부임지에 눌러앉았다가는 왕과 수많은 제후가 나를 반역자로 여길 것이다. 영 내키지 않지만, 왕을 알현해 내 충성심을 증명하고 최대한 빨리 대 땅으로 돌아오는 게 최선일 것이야.’
그는 어명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휘하의 부장을 모두 대성의 관청으로 부른 다음 답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어명에 따라 잠시 한단에 다녀오게 됐다. 다들 내가 없는 동안 흉노의 동향을 잘 살피고 있어라.”
그 말을 들은 몇몇 장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이목에게 물었다.
“이 장군님! 어찌하여 이토록 위급한 시국에 자리를 비우신단 말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나라와 흉노의 접경지역에는 적군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장군님. 우리 군은 숫자만 많을 뿐 적과 비교하면 기병의 수와 질이 모두 형편없습니다. 게다가 요즘 흉노의 기병 중에는 조선의 동이족이 만든 질 좋은 병장기로 무장하는 자가 늘고 있다 하니 장군님께서 안 계실 때 유목민 마적 떼가 구름처럼 몰려오면 대성을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부하들이 볼멘소리를 해다자 이목은 한숨을 푹 쉬면서 대답했다.
“후······. 너희가 아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하지만 신하 된 자가 함부로 어명을 어기면 반역자의 오명을 쓰게 될 뿐이다. 그리 오래 대 땅을 비우지는 않을 터이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봉화를 피우고 전령을 보내서 한단에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리 말씀하시면 더는 만류하기 어렵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휘하의 부장들이 각자의 임무지로 돌아가자 이목은 조나라 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호위할 기병 1백 기만 데리고 대성을 나서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렇게 약 사흘을 달려 그가 조나라의 북부지역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이목의 곁에서 말을 달리던 호위 기병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장군님! 정면에서 소속을 알 수 없는 우리 군의 기병 열기가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확실히 조나라의 병사들이냐?”
“한단 쪽에서 온 기병이 호복을 입고 있으니 확실합니다.”
조나라의 기병은 말을 탈 때 움직이기 편한 북방 유목민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아 주변국의 기병과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사실 그 기병들은 계를 비롯한 고조선 암부의 요원들이었지만, 이제 막 북부에서 내려온 이목과 조나라군 기병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렇기에 이목은 병사들에게 행군을 멈추라고 지시했다.
“모두 말을 멈춰라. 한단 쪽에서 온 기병대가 우리 쪽으로 똑바로 달려오는 걸 보니 대왕께서 새로운 어명을 내리신 모양이니 예를 갖추어 왕의 사자를 맞이하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이목과 조나라군 기병 1백 기는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한 진형을 짜 어명을 받을 준비를 마쳤지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열기의 기병은 행색이 초라해 엄숙함을 생명으로 여기는 왕의 사자로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왕의 사자가 아니라면 저자들이 왜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단 말인가?”
이목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순간, 온몸이 땀에 젖어 꾀죄죄한 몰골을 한 계가 말에서 내려 그에게 읍했다.
“한단의 위 임계가 이목 장군님을 뵙습니다!”
“위? 시내에서 도적을 잡는 관리가 기사(騎士)같은 옷차림을 하고 나를 찾아왔느냐?”
“이 장군님께서 이대로 한단에 도착해 큰 봉변을 당하시는 걸 막으려고 찾아왔습니다.”
“봉변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며칠 전 한단에서 온 전령이 제가 사는 마을을 다스리시는 대부께 어명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이 장군님께서 우리 고장을 지나실 때 병사를 풀어 호위병을 처치하고 장군님을 포박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목을 호위하는 기병 중 한 명이 분을 참지 못하며 소리쳤다.
“뭐라고?!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허튼 거짓말을 늘어놓느냐?! 설령 대왕께서 이 장군님을 벌하려 하신다고 그런 막중한 임무를 위 같은 하급관리에게 맡기실 리가 없지 않으냐?”
“우리 고장의 대부께서는 평소 절 신뢰하셔서 장군님을 붙잡는 일에 참여하라고 명하셨지만, 나라의 대들보나 마찬가지이신 장군님께서 봉변을 당하시는 걸 원치 않아 고민을 거듭하다가 용단을 내렸소. 장군님. 제 말씀을 믿지 못하실까 봐 이렇게 대부님의 방에서 증거물을 훔쳐 왔으니 부디 확인해주십시오.”
계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속에서 왕의 친필이 적혀있는 비단 조각과 그 밀서를 숨겨두었던 찢어진 옥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목은 계가 건네준 밀서를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이 탄식했다.
“하늘도 무심하시구나! 왕께서는 이미 이 이목에게 반역자의 낙인을 찍으셨단 말인가! 오랜 세월 조나라 왕실에 충성을 바쳐왔건만 어찌 내 해명도 들어보지 않으시고 나를 해치려 하신단 말인가!”
장군의 말을 듣고 놀란 호위 기병 중 한 명이 이목에게 말했다.
“장군님. 아직 속단하시긴 이릅니다. 이 임계라는 자가 밀서를 조작하여 장군을 속이려 드는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조나라의 신하 된 자로서 대왕께서 적으신 글의 필체도 못 알아볼 리 있겠느냐? 애초에 죽간이 아닌 값비싼 비단과 붓으로 유려한 글을 쓸 줄 아는 자는 관리나 학자 중에도 극히 드물다. 게다가 일개 하급관리가 조나라 왕실의 옥새가 어떻게 생긴 줄 알고 위조한단 말이냐?”
“아······. 그럼 정말로 왕께서 장군님을······.”
이목을 포함한 백한 명의 조나라 장정들은 왕의 배신에 치를 떨며 침통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계는 그런 이목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다급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이 장군님! 지금 실의에 빠져 계실 때가 아닙니다! 이미 북부를 제외한 조나라 전역에 장군님을 붙잡으라는 어명이 떨어져 있을 겁니다! 당장 평민으로 변장하시고 한동안 다른 나라에 망명하셔야 화를 면하실 수 있습니다!”
“대체 어느 나라 왕에게 몸을 의탁하란 말이냐? 40만 명의 동포를 땅에 묻어서 죽인 진나라 왕?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죄 없는 이복동생 신릉군조차 귀양보낸 위나라 왕? 그도 아니면 사람의 해골을 술잔으로 삼는 흉노의 선우에게 찾아가란 거냐? 차라리 날카로운 단검으로 스스로 목을 찌르는 편이 낫겠구나.”
“우선은 조선에 숨어계시는 건 어떠십니까?”
“뭐라고?! 조선은 흉노의 동맹국이다. 비록 왕께서 나를 버리셨더라도 동이족
야만인의 장수가 되어 조국의 목젖에 칼날을 들이밀 수는 없다.”
“조선의 왕에게 머리를 숙이실 필요 없이 일개 상인으로 변장하시고 옛 연나라의 도성인 계에 머무르시면 어떻겠습니까? 조선인은 외국인에게 관대한 편인 데다 계에는 망한 연나라 출신 백성이나 제나라에서 온 상인과 학자가 많으니 중원인이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이목은 계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네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겠구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 임 위.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