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매국노를 상대하는 법
기원전 248년의 10월 중순, 한부와 진서 공주는 왕검성의 불교 사원 앞에서 불교식 혼례인 화혼식을 올렸다.
고조선의 예복을 입은 태자와 공주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사원의 밖에서 안까지 이어진 붉은 천 위를 고운 옷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 세 명이 종종걸음을 옮겼다.
아이 중 선두에 선 아이가 향을 달인 물을 붉은 천 위에 조금씩 뿌리며 사원 안으로 걸어가니 다른 두 아이가 앞서가는 아이를 따라가면서 색색 가지 꽃잎을 뿌렸다.
그리고 아이들의 뒤를 따라 신랑신부가 사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법복을 입은 승려가 예식을 진행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모인 수천 명의 제후와 대신, 그리고 몽골 초원 곳곳에서 찾아온 유목민 귀족
수백 명은 얼마 전 고조선의 승려들이 정립한 방식에 따라 치러지는 엄숙한 혼례식을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면서 두 사람을 축복했다.
이로써 고조선과 흉노의 혼인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이다.
외교적인 성과 이외에도 한부로서는 진솔한 성격에 건강미 넘치는 흉노 공주와의 두 번째 신혼생활을 기대할 법했지만, 중원 대륙 서쪽 끝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진나라가 연횡책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선 맘 편히 왕검성에 사는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만은 없었다.
그렇기에 한부는 진서 공주와의 첫날밤을 치르고 겨우 일주일 만에 계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왕검의 침실로 찾아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소자, 겨울이 와서 바다가 거칠어지기 전에 계로 돌아가겠습니다.”
“벌써 말이냐? 하북은 상장군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을 터인데. 그동안 고생했으니 내년 봄까지만이라도 푹 쉬었다 가거라.”
“소자 연나라를 정복하고 주변국에 보낸 사절들이 대부분 푸대접을 받고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외교 무대도 치열한 전장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흉노와 동맹을 체결한 것에 만족하고 올해 겨울을 허투루 보내면 진나라는 분명 삼진의 세 나라는 물론이고 어쩌면 초나라까지 끌어들여서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공격할 겁니다.”
“흠······. 삼진의 세 나라를 움직일 계책을 이미 세운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너무나 안타깝다. 두 번째 며느리를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고향을 떠나야 한다니.”
“서쪽 대륙을 통째로 삼키려고 하는 탐욕스러운 진나라의 기세만 꺾으면 천하가 평안해질 겁니다. 그때면 다시 온 가족이 한곳에 모여서 화목하게 살 수 있겠지요.”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마. 혹시 원정이나 외교를 진행할 때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거라. 이 아비가 어떻게든 구해서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로부터 사흘 뒤, 한부는 기병대장 석, 그리고 암부의 수장 계와 함께 중원 대륙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는 태자비 민을 계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남편의 제안을 듣고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 태자손의 학문은 왕검성의 여러 박사가 가르친다고 하나 사람의 도리는 부모가 직접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소첩이 남의 손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교육을 맡기고 외지로 떠나버린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무책임한 어미라며 소첩을 욕할 겁니다.”
“그럼 준이도 계에 데리고 가면 어떻겠소?”
“전하와 태자손이 모두 언제 전장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계에서 지내는 것 또한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음······. 부인의 말이 모두 옳군요. 이거야 원.”
“소첩은 왕검성을 떠나기 어렵지만, 진서 부인은 아직 자식이 없으니 전하와 함께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왕실의 자손이 너무 적으니 진서 부인을 데리고 가시지요.”
“진서 부인은 조선에 시집왔으니 궁중 예법을 배워야 한다며 한동안 왕검성의 궁궐에 머물겠다고 말했다오. 이치에 맞는 말이라 더 할 말이 없었소.”
“그렇다면 별수 없지요. 마음 아픈 일이지만, 한동안은 독수공방하시는 수밖에요.”
한부는 담담하게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루라도 빨리 진나라의 연횡책을 파훼할 것을 결심하며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 * *
기원전 248년 11월 초, 한부는 왕검성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해를 건너 계에 돌아왔다.
상장군 무명은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한부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의 성문까지 마중 나와 태자에게 인사했다.
“상장군 무명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다녀왔소. 상장군. 본인이 계를 떠나있는 동안 별일 없었소?”
“약 보름 전부터 조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종종 소규모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흠······. 조나라가 벌써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전하. 아무래도 조나라 조정은 조선과 이웃으로 지낼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럴 생각이 들게 하는 수밖에.”
“뭔가 새로운 책략을 생각해내신 겁니까?”
“그렇소. 자세한 내용은 기밀이라 당장은 말해 주기 어려우니 이해해 주시오.”
“소장에게도 말씀하기 어려우시다면 필시 암부가 음지에서 진행하는 일이겠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부디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부는 무명과의 대화를 마친 후 서둘러 궁궐로 돌아와 계를 자신의 침실로 부른 다음 은밀히 명을 내렸다.
“계야. 조나라가 완전히 진나라 쪽에 붙어버리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 이곳에 암부의 새 본거지를 마련하는 일은 다른 간부에게 맡기고 너는 바로 한단으로 가서 조나라의 대부 곽개를 회유해라.”
“전하. 몇 년 전 제나라의 상방 후승을 포섭할 때 곽개에게도 많은 뇌물을 보냈지만, 그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만 취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나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 진나라 조정도 그자의 뒷주머니에 뇌물을 찔러줬겠지.”
“소신의 생각에 곽개 그자는 재물만으로 회유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아마 그자가 진정 원하는 것은 제2의 여불위가 되는 것이겠지요.”
원역사의 제나라의 간신 후승은 제나라가 멸망하자마자 진시황에게 처형당했지만, 곽개는 노익장 염파를 해임하고 조나라를 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마지막 방파제이나 다름없었던 이목과 사마상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시킨 대가로 기어코 진나라의 큰 벼슬을 얻어낸 자였다.
비록 조나라가 멸망한 후 곽개가 일가족을 이끌고 한단을 떠나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가는 길에 도적 떼를 만나 살해당했고 이 도적 떼가 사실은 진시황이 보낸 자객이라는 설이 있지만, 지금의 곽개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으니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한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를 부릴 자신이 있었다.
“계야. 곽개를 부리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금수만도 못한 자를 다루는데 꼭 인간적인 수단만 쓸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전하. 반드시 간신 곽개를 전하의 수족으로 만들고 돌아오겠습니다.”
* * *
계는 태자의 명을 받은 후 궁궐 창고에서 수레 한 대를 가득 채울만한 금은보화와 여러 귀중품을 챙긴 다음 그 물건들을 가지고 여러 호위병과 함께 제나라로 향했다.
제나라의 영토에 들어섰다가 제나라 출신 상인으로 변장하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잠입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방법으로 무사히 한단의 성문을 지난 후 예전에 위치를 알아둔 곽개의 저택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계시오? 사업상의 일로 곽 대부를 뵙고 싶어 찾아왔소.”
그 소리를 들은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 대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계에게 대답했다.
“옷차림을 보니 제나라에서 오신 분이군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선약을 하신 게 아니라면 오늘은 곽 대부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요즘 워낙에 나랏일로 바쁘셔서 말이지요.”
“그러지 말고 잠시라도 좋으니 대부님을 뵙게 해주시오. 그분께서도 분명 관심을 두실만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오.”
계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하인의 손에 작은 금가락지 하나를 쥐여주었고 그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일부러 수레를 덮은 천이 조금 벗겨지게 하여 그 안에 실린 금은보화를 드러냈다.
곽개의 하인은 그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이고! 소인이 무식해서 제나라의 대상을 알아뵙지 못하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곽 대부님께 귀한 손님께서 오셨다고 말씀드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하인은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와 계를 저택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계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탁자 앞에 앉아있던 곽개가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그를 맞이했다.
“제나라에서 오신 귀인을 환영합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곽 대부님. 저는 연나라의 상인 임계라고 합니다.”
계가 인사하자 곽개가 갑자기 웃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연나라의 상인이라······. 전에 나를 찾아왔던 조선의 동이족도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했었지. 설마 인제 와서 내게 조선 왕실의 개 노릇을 강요하려고 찾아온 거냐? 아니면 선물한 물건을 돌려달라며 떼쓰려고 찾아왔느냐?”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오른손을 들자 응접실 뒤쪽에 장식되어있는 병풍 뒤에서 검을 든 장정 네 명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계를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곽개에게 대답했다.
“하인을 통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사업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조선의 물건을 조나라에 파는데 곽 대부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만.”
“지금 그 말을 나한테 믿으라는 게냐? 조선에서 나는 물건은 제나라가 독점적으로 수입해서 다른 나라에 팔고 있을 텐데?”
“과거에야 조선의 영토가 좁은 반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적대국이었던 연나라가 북쪽을 가로막고 있어서 중원 대륙에 물건을 팔려면 물건값을 후려치는 제나라 상인을 거치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지만 이제 조선은 조나라와도 국경을 맞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두 나라의 조정이 사이가 좋지 않으니 저 같은 선량한 상인은 그림 속의 떡을 바라보듯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흠······. 그럼 그대는 조선 왕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곽 대부님. 전 그저 곽 대부님께서 조나라 최고의 대상이라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선객이 대부님을 찾아왔었나 보군요.”
“본인이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구려. 그럼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오. 대체 조나라에 어떤 물건을 팔고 싶은 거요?”
“조선의 특산품 중에 신선차라는 물건을 들어보셨습니까?”
“물론이오. 제나라인들은 군자차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더군요. 본인도 종종 즐겨 마시는 편이오.”
“그 신선차보다 훨씬 효능이 뛰어난 새로운 차가 나왔습니다. 이 차를 맛본 제나라인들은 옥황상제가 마실만 한 훌륭한 차라면서 상제차라고 불렀습니다.”
계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춤에 찬 비단 주머니에서 은으로 만든 작은 상자를 꺼내서 뚜껑을 열어 곽개에게 그 안에 들어있는 어두운 색의 가루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양귀비의 덜 익은 열매에 상처를 내서 흘러나온 흰 즙을 굳혀서 가루로 만든 생아편이었다.
곽개는 생아편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계에게 물었다.
“정말 그 흰 가루로 신선차보다 훌륭한 차를 우려낼 수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곽 대부님. 말로 설명을 들으시는 것보다는 한 모금 드셔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기를 빌려주시면 제가 한잔 우려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