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가족과의 재회
태자 일행은 짧은 왕검성 시내 구경을 마치고 8월 초의 여름 하늘에 석양이 지기 시작할 때쯤에야 궁궐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두만 왕자는 고개를 돌려서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왕검의 거처를 둘러본 다음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왕검께서 지내시는 궁궐도 제나라 왕의 궁궐만큼이나 웅장하군요. 무엇보다 나무로 지은 건물 곁에 이국적인 석조 건물을 증축하고 있는 모습도 참 인상적입니다.”
“어······. 그러게 말입니다. 왕자님.”
“네? 평생을 보내신 궁궐을 남의 집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사실 왕검성을 떠날 때와는 궁궐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서 놀라는 중입니다. 작년 여름쯤에 왕검께서 보내신 전령에게 왕검성의 궁궐을 중축한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겨우 한해 하고 넉 달 만에 이렇게 많이 바뀌었을 줄은 몰랐네요.”
한부는 두만 왕자에게 대답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이 정도는 돼야 내가 왕검성에 없어도 내정이 제대로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앞으로는 더 마음 편히 국방과 외교에 신경 쓸 수 있겠다.’
그가 작년 봄에 연나라 원정을 떠나면서 압록강을 건널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은 적군의 저항이 아니라 자신이 자리를 비움으로써 고조선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20여 년 전부터 이룡도에서 육성해온 여러 인재가 한부의 예상보다 더 빠른 시기에 세분된 관료체계 안에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큰 걱정을 털어낸 한부가 기쁜 마음으로 흉노의 젊은이들과 함께 궁궐에 대문에 들어서자 태자가 왕검성에 머무는 동안 늘 시중을 들어온 내관 참이 가장 먼저 그를 맞이했다.
“내관 참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나. 참 내관.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계절이 다섯 번 바뀌었을 뿐인데 흰머리가 많이 늘었구먼.”
“소신도 벌써 나이가 쉰이 넘었습니다. 전하. 아직 노구가 움직여서 왕검 폐하와 전하를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한부는 그 대답을 듣고 아버지인 한열 왕검이 내관 참과 비슷한 나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요 몇 년 동안 염파나 무명 같은 노익장들을 하도 자주 봐서 잊고 있었네. 원역사보다 평균 수명이 늘었다고는 해도 아직 나이 50이 넘으면 노인으로 여겨지는 시대지.’
그러자 내관 참은 그런 한부의 생각을 읽었는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부처님과 천신께서 보우하신 덕에 왕검과 모후께서는 여전히 강녕하십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흉노에서 선물로 보내온 가축을 들일 곳만 마련하면 바로 왕검 폐하를 알현해야겠네.”
“선우께서 선물로 보내신 가축 무리를 돌볼 자들과 장소는 이미 준비해 놨사옵니다. 그러니 다른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흉노의 사절단과 함께 알현실로 가시지요.”
“여전히 일 처리가 빠르구먼. 그럼 어서 앞장서게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내관 참은 태자에게 대답한 후 한부와 기병대장 석, 그리고 흉노의 청년 스무 명을 한열 왕검에게 안내했다.
한부는 일행 중 가장 앞장서서 알현실에 들어서서 자신의 좌우에 늘어선 제후와 대신들의 사이를 지나 옥좌에 앉아있는 아버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인사했다.
“왕검 폐하.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소자 한부, 폐하께서 명하신 연나라 정벌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나이다.”
“태자야!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줘서 기쁘구나! 어서 고개를 들어라! 더욱 늠름해졌을 네 얼굴이 보고 싶구나!”
한부는 왕검의 명에 따라 고개를 들어서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고 그의 갈색 눈동자에 나이가 50줄에 들어선 아버지의 이마에 깊이 팬 주름살과 반백의 머리가 비쳤다.
왕검의 모습은 의학의 발달로 사람이 더디게 늙는 현대의 기준으로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모습을 보니 그의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는 해도 저렇게 나이가 드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구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조선이 진나라의 위협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 텐데.’
한열 왕검은 오랜만에 만난 장남의 눈에 아련한 기색이 감도는 것을 보고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벌써 이 아비가 노쇠했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냐? 너무 마음 쓸 것 없다. 아직은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정신이 맑고 사지를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없느니라.”
“그 말씀을 들으니 소자의 마음이 놓입니다.”
“그보다 연나라를 정벌하고 조나라의 늙은 호랑이 염파의 침략을 막아냈을 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구나. 전령이 가져온 서신에서는 전투의 결과만 적혀있고 과정은 생략되어 있어서 말이다.”
한부는 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시대의 동아시아 쪽 문관들은 하나같이 전투기록을 너무 대충 적긴 하지. 전생에 역사 공부하면서 그것 때문에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같은 기원전이라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역사가들은 전쟁에 관한 기록을 남길 때 병력의 수나 전투에서 사용된 전술과 진형 등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는 반면 동아시아의 전쟁사 기록은 ‘싸워서 이겼다.’ 정도의 묘사만 남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부는 그런 고대의 관습 때문에 아들의 활약상을 자세히 알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아버지에게 난하강에서 극신의 군대를 물리쳤을 때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책략으로 계를 함락시키고 고조선을 침략한 염파를 설득해 진나라를 견제했을 때, 그리고 동호의 연합군을 토벌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장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한열 왕검과 고조선의 대신들은 손에 땀을 쥐면서 태자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렇게 약 한 시간쯤이 지난 후 한부가 말을 마치자, 한열 왕검은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허허허! 네가 비범한 줄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병법에 능한 줄은 미처 몰랐구나! 서쪽 대륙의 주 무왕이나 태공망도 공적도 네가 세운 무공에 비하면 빛이 바랠 것이야!”“과찬이십니다. 폐하. 모두 본국에서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덕분에 달성할 수 있었던 성과입니다.”
“겸손이 과하구나! 네 활약 덕분에 우리 조선은 겨우 몇 년 만에 단군왕검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수백만 명이나 되는 백성을 다스리는 큰 나라로 거듭나지 않았느냐! 게다가 북방의 강자 흉노와의 동맹도 성사시켰고 말이지! 흉노와의 우호 관계를 다진 건 연나라 정벌만큼이나 큰 성과이니라.”
“아! 폐하. 제 뒤에 있는 탱리고도선우의 장남 두만 왕자를 비롯한 흉노의 젊은이 스무 명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이런! 너와 너무 즐겁게 회포를 풀다 보니 국빈에게 무례를 범했구나! 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흉노의 왕자여. 팔불출 아비가 오랜만에 자식을 만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온 귀빈께 인사가 늦고 말았구려.”
두만 왕자는 통역사가 한열 왕검의 말을 전해주자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폐하. 저희 또한 통역사를 통해 태자 부의 흥미진진한 활약상을 전해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흉노의 왕자여. 그대가 그리 말해주니 짐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구려. 그나저나 며칠 전 도착한 전령이 보낸 서신을 읽어보니 흉노의 선우께서 본인과 사돈이 되고 싶어 하신다는 데 그 말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조선의 태자 부는 제 수만 명의 전사를 조나라군의 포위망으로부터 구출한 데다 선우를 대신해 흉노를 배신한 동호의 마적 떼를 토벌하였습니다. 이에 제 부친이신 탱리고도선우께서는 장녀인 진서 공주를 태자 부에게 시집보내 조선에 감사를 표하고 양국 간의 공고한 동맹 관계를 맺고자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과 흉노 모두의 번영에 큰 도움이 될만한 제안이구려. 현재 서쪽 대륙의 진, 조, 위, 한 이 네 나라는 주 왕실의 봉국 출신이 아닌 다른 나라와 부족을 모두 야만인으로 여기면서 우리의 목줄에 칼끝을 겨눌 기회만을 노리고 있소. 하지만 우리 두 나라가 힘을 합친다면 강대국인 진나라조차도 함부로 우리의 영토를 넘보지 못할 것이오.”
“그럼 태자 부와 진서 공주의 혼인을 허락해 주시는 것인지요?”
“물론이오. 흉노의 왕자여. 또 그대와 그대의 수하들이 조선의 문물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흉노의 젊은이들이 왕검성에서 학문과 기술을 익히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참으로 감사합니다! 폐하! 초원에 계신 탱리고도선우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 후 한열 왕검과 두만 왕자는 통역사를 통해 한동안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흉노 사절단의 알현이 끝나자 왕검은 한부를 따로 궁궐의 서재로 불러서 당부했다.
“태자야. 네가 또 나라와 왕실의 번영을 위해 정말 큰일을 해주었구나. 흉노와의 혼인이라니. 거친 북방의 유목민들과 이렇게 쉽게 동맹 맺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자도 우연한 기회에 선우의 목숨을 구한 것이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둘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다지는 일이 중요하듯 가족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특히 조강지처인 태자비가 흉노의 공주를 왜 후처로 들여야만 하는지 잘 설명해야 왕실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야.”
“소자도 왕검성으로 향하는 길에 그 일이 가장 걱정스러웠습니다.”
“뜸 들일 것 없이 지금 바로 태자비의 침실로 가거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네 어머니도 네가 아내를 먼저 만나는 것을 이해해 줄 거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한부는 그 길로 서재에서 나가 태자비 민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태자비가 아들 준과 함께 약 1년 4개월 만에 돌아온 남편을 반기면서 기쁨의 눈물로 눈가를 적셨다.
“전하!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으로 돌아와 주셔서 너무나 기쁘옵니다!”
“부인! 나도 매일 밤 부인의 얼굴이 어른거려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오! 준아! 겨우 한 해 만에 키가 부쩍 커졌구나!”
“소자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크게 자라고 싶어서 편식하지 않고 매일 저녁 신체를 단련했습니다!”
“장하구나! 원래 몸이 튼튼해야 공부도 더 잘되는 법이야!”
오랜만에 재회한 세 가족은 밤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태자손 한준은 부모의 곁에서 잠들어버렸고 한부는 내관에게 지시해 그런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한준이 건장한 내관의 등에 업혀서 나가자 한부가 부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인. 실은 부인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소.”
태자비 민은 남편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혹시 흉노와의 혼인 동맹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미 알고 있었소? 왕검께서는 부인에게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여인의 직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돈을 맺는 것보다 나라와 나라가 동맹을 맺는 데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흉노가 천 마리가 넘는 진귀한 가축과 명마를 선물로 보내왔다면 단순한 호의의 표시가 아니라 혼수품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허······. 부인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려.”
“소첩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준이 이외에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꼭 흉노와의 동맹 때문이 아니더라도 전하께서 궁에 돌아오시면 후사를 위해 후처를 들이시라고 권할 생각이었지요. 그러니 소첩이 질투를 부릴까 봐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전하.”
“참으로 고맙소! 부인! 흉노의 공주와 혼인하더라도 내가 제일 아끼는 아내는 오직 부인뿐이오!”
한부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태자비 민에게 대답하면서 침실의 등불을 끄고 아내와 하룻밤을 보냈다.
* * *
태자 일행이 왕검성에 도착한 다음 날 이른 아침, 한부는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다음 흉노의 유학생들이 묵을 숙소와 직접 챙기고 왕실의 궁인들에게 진서 공주를 왕검성으로 불러 혼례식을 올릴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날의 해가 지자 암부의 본거지인 계의 저택에 내관 참을 보내서 계를 궁궐의 서재로 불렀다.
계는 서재에 들어서서 책상 앞에 앉아있는 태자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암부의 수장 계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네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갑구나. 우리가 함께 서역을 여행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오래전 일이 돼버렸어.”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 지금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석과 함께 셋이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 너만 음지에서 살게 해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전하. 전하께서 저를 거두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역적 완에게 부모 형제를 인질로 잡힌 채로 평생 이용당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흉노의 공주와의 혼례식을 마치면 너도 나와 함께 서쪽 대륙으로 가자꾸나. 너에게 시킬 일이 많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직접 너를 비롯한 음지에서 애쓰는 요원들의 삶을 보살필 것이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본거지를 하북의 계로 옮길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지시하신 작전에 대해서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래? 어서 말해 보아라.”
“지시하신 대로 한반도 남부에서 서역에서 가져온 양귀비를 재배해 그 열매에서 나온 즙으로 약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돼지에게 실험해보니 신선차보다 독성과 중독성이 강해 함부로 남용하면 분명 우리 조선의 백성에게도 폐해가 미칠 겁니다.”
“걱정할 것 없다. 그 약재는 딱 한 명에게 먹일 생각으로 만든 것이니까. 그것 말고는 또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느냐?”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유하는 작전 말씀입니다만······. 위나라에서의 작전은 너무 극단적이지 않을는지요?”
“지금의 위나라 왕은 곽개에게 놀아나는 조나라 태자만큼이나 어리석어서 다른 방도가 없다. 그 정도 일은 벌여야 위나라를 동맹으로 삼을 수 있을 거야.”
한부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