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고조선의 선진문물에 감탄하는 흉노인들
고조선의 태자 일행은 이틀 동안 즉묵 시내를 구경하고 제나라의 상방 후승이 빌려준 커다란 여객선과 화물선 수십 척에 나누어 탔다.
호위병까지 합하면 1천 명이 넘는 사람과 그리고 약 1천6백 마리의 가축이 모두 승선하자 제나라인 선원들은 닻을 올리고 배를 항구 밖으로 몰아갔다.
마침 순풍이 분 덕분에 한부 일행이 탄 배는 거침없이 물살을 헤치며 동쪽으로 나아갔지만, 태어나서 처음 범선을 타본 한 흉노의 젊은 장수가 배의 속도가 느리다고 투덜거렸다.
“남방인들은 뭐하러 이런 커다란 나무토막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거지? 좀 돌아가더라도 말을 타고 달리는 게 훨씬 빨리 왕검성에 도착할 것 같은데.”
“남쪽에는 말을 탈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잖아. 그러니까 육로로 이동하는 것보다 이 범선이라는 물건을 타고 가는 게 더 빠른 거지. 내일 낮에는 조선 반도에 도착한다니까 징징대지 말고 좀 참아.”
“이거야 원! 그럼 오늘은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바닷물 구경이나 해야한단 말이야? 선실에 들어가서 육포나 씹어야지!”
한부는 불평을 늘어놓은 흉노 장수의 곁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말을 듣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치사 백장. 첫 항해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구려.”
“아······!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그저 이 범선이라는 물건의 속도가 느려서 답답했을 뿐 두만 왕자님과 저희를 조선으로 데리고 가 주시는 호의에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음 쓸 것 없소. 매일같이 말을 타던 초원의 전사들에겐 범선이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 그런데 아무리 입이 심심해도 지금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배 위에서 육지의 음식을 먹으면 바다의 신께서 노하십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 바다에 나온 사람들은 배의 흔들림 때문에 멀미에 시달리기 마련이오.”
“하하하하! 전하! 소장은 종종 술을 진탕 마시고 나서 몸의 열기를 식히려고 말을 달리지만, 지금껏 한 번도 구역질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 말고 다른 초원의 전사들도 이 정도 흔들림에 멀미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말릴 수 없구려. 그래도 어지간하면 본인의 말을 귀담아듣기를 권하오.”
한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충고했지만, 고조선 태자의 말을 듣고 오히려 더 오기가 생긴 유목민 청년들은 선실로 내려가 고향에서 가져온 보존식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두만 왕자를 포함한 흉노의 젊은이 스무 명은 범선의 갑판 위에 나란히 서서 난간을 붙잡고 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구와아아아아악!”
“흐어어어······. 이게 조선의 태자께서 말씀하신 뱃멀미라는 거구나······.”
“정말 미치겠네······. 뱃속에서 야생마 백 마리가 날뛰는 것 같아······.”
기병대장 석은 그 모습을 보고 간신히 웃음을 참으면서 한부에게 말했다.
“크크큭! 전하. 저 친구들을 좀 보십시오. 전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꾸역꾸역 육포를 먹어대더니 결국 한 줄로 서서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있습니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니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저 나이 때는 어른들 말씀 안 듣고 계랑 셋이서 밧줄만 가지고 호랑이를 때려잡겠다고 설산에 올라가지 않았느냐?”
“어휴······. 그때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두꺼운 털가죽 옷을 입었는데도 호랑이 앞발에 얻어맞은 가슴팍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었지요. 그나저나 계를 못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군요.”
“앞으로는 계를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다. 이번에 왕검께 말씀드려서 암부의 근거지를 하북의 계로 옮길 생각이거든.”
“드디어 중원 대륙에서 대대적인 공작을 시작하실 생각이시군요.”
“제나라를 제외한 전국칠웅의 다른 나라들은 우리 조선이 동이족이라면서 멸시하니 보통의 외교적 수단은 잘 먹히질 않는구나. 대로가 꽉 막혀버렸으면 샛길을 찾는 수밖에 없구나.”
“부디 전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어 진나라의 연횡책이 깨지길 바랍니다.”
“내 예상대로라면 분명히 진나라의 음모를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보다는 난 네 누이가 흉노의 공주와 혼인하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단군왕검 이래 처를 한 명만 둔 왕검은 한 분도 안 계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서른이 넘도록 본처만을 두신 태자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게다가 흉노와 동맹을 맺으면 조선의 국력이 크게 성장할 테니 제 누이도 분명 사정을 이해할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후 고조선 태자 일행을 태운 선단은 하루 만에 한반도에 도착해 배를 부둣가에 세웠다.
흉노의 젊은 장수들은 몇 년 전 한부의 건의로 남포라는 이름이 붙은 항구도시의 부둣가에 힘없이 발을 디디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후······. 죽는 줄 알았네. 고향에 돌아갈 때는 꼭 육로로 가야지.”
“당연하지. 두 발이 땅에 닿아 있다는 게 이렇게 감사한 일인 줄 몰랐어.”
그렇게 항구를 벗어날 때까지 피곤한 표정으로 푸념을 늘어놓던 흉노의 청년들은 남포의 시장에 들어서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와! 여긴 임치나 즉묵의 시장보다 훨씬 더 번화한데?!”
“저기 좀 봐! 저게 말로만 듣던 코끼리의 어금니인 모양이야!”
두만 왕자도 밝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들뜬 목소리로 한부에게 말했다.
“전하! 이 도시의 행인들은 우리 흉노 사람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는군요! 제나라에서는 그러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항구도시에는 천하의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다양한 외국인이 늘 북적여서 그렇습니다. 흉노의 남쪽에 있는 대륙 말고도 먼바다의 큰 섬 대만이나 서쪽으로 몇만 리 밖에 있는 마우리아라는 대국의 상인들도 찾아올 정도이지요.”
“혹시 저기 있는 갈색 피부의 사람이 남쪽 대륙 밖에서 찾아온 사람들인가요?”
“그렇습니다. 왕자님. 피부색과 복장을 보니 저 상인은 마우리아 출신이군요.”
한부가 연나라 정벌과 중원 진출에 힘쓰는 동안 고조선과 동맹을 맺은 대만의 원주민 부족은 왕검성에서 수입한 강철 무기로 주변 부족을 정복해나가면서 대만의 영토 중 절반을 차지하며 대만 왕국을 건국했다.
대만 왕국은 선조가 수가 많은 고대 중국인에게 밀려나 중원 대륙을 떠나야 했던 역사 때문에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었지만, 한부 덕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고조선과 마우리아 제국에는 문호를 개방하고 양국 사이에서 무역하거나 두 나라에 항해사로 고용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그 덕에 남포항과 왕검성에 고대 인도의 상인과 상품을 볼수 있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수십 명의 흉노인 중 두만 왕자는 인종의 용광로라고 부를만한 남포의 시장을 보고 특히 감탄하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피부색과 풍습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다니! 천하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
“아직 놀라시기는 이릅니다. 왕자님. 왕검성은 남포보다 더 번화하고 근사한 건물이 많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참으로 기대되는군요! 그럼 어서 왕검성으로 출발하시지요!”
한부는 두만 왕자의 요청대로 먼저 한열 왕검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과 흉노의 사절단이 도착했음을 알린 다음 서둘러 왕검성으로 출발했다.
사흘 동안의 행군을 마치고 한부 일행이 흉노 사절단과 함께 왕검성의 성문에 들어서자 미리 대로변에 모여있던 수천 명의 백성이 색색가지 꽃잎을 공중에 뿌리며 태자를 맞이했다.
“연나라 정벌의 영웅! 태자 전하 만세!”
“부처님! 천신님! 조선 왕실을 영원히 보우하소서!”
한부는 갈색 말을 타고 행렬의 선두에서 커다란 갈색 말을 타고 대로를 지나면서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흉노의 젊은 장수들은 한부의 뒤를 따라 말을 몰면서 환호하는 백성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수군거렸다.
“백성들이 왕족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는 대신 웃고 떠들다니. 조선은 꽤 자유분방한 나라인 모양이야.”
“그러게. 흉노에서 저랬다가는 바로 목이 달아났겠지.”
그 후로도 태자 일행이 왕검성의 궁궐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두만 왕자와 흉노의 젊은 장수들은 매 순간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한부와 곁에 있는 통역사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전하. 저기 대로변 가장자리에 굵고 긴 나무를 늘어놓은 이유가 무엇인지요?”
“저건 대나무 수도관이라고 물건입니다. 두만 왕자님. 속이 빈 튼튼한 대나무관으로 물을 옮겨서 백성들이 강이나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도 생활용수를 도심 한가운데에서 구할 수 있게 하는 편리한 물건이지요.”
“대나무?! 조선 반도에는 저렇게 굵고 긴 대나무가 자란단 말입니까?!”
“수도관에 쓰는 대나무는 1년 내내 눈이 내리지 않는 따듯한 지역에서만 자라기에 조선 반도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만 왕국에서 수입해서 쓸 수밖에 없지요.”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전하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테지요.”
“아직 놀라시기는 이릅니다. 왕자님. 원하신다면 궁궐로 가는 길에 왕검성 시내 곳곳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바로 왕검 폐하를 알현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요.”
“제 부친이신 왕검께서는 인자한 분이십니다. 조금 먼 길을 택해서 궁궐에 가는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주시겠지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두만 왕자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한부는 말머리를 돌려서 흉노의 젊은이들에게 왕검성 시내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고대 그리스식 증기기관을 이용해 곡식을 빻는 방앗간, 도심 곳곳에 마련된 대나무 관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수돗가, 예맥족과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3층 아파트 단지, 그리고 고급 닥나무 한지와 비교적 저렴한 면종이를 만드는 세계 유일의 제지소까지.
평생을 초원과 가죽과 천으로 만든 천막에서 살아온 흉노의 청년들은 당대 최고의 첨단기술과 미래의 지식이 어우러져서 발전해나가는 인구 25만의 대도시 왕검성의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천하에 이렇게 살기 좋은 곳도 있었구나······.”
“사람이나 짐승의 힘을 쓰지 않고 곡식을 빻다니······. 조선의 주술사는 신통력이 정말 대단한 모양이야.”
“이 정도면 신통력이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신내림을 받았다고 봐야지.”
한부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흉노의 젊은이들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두만 왕자에게 말했다.
“이제 불교의 사원만 들르면 왕검성에서 구경할만한 곳은 대부분 들른 셈이군요.”
“불교? 처음 들어보는 종교로군요. 불교는 어떤 신을 섬기는 종교인지요?”
“불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큰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시고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신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교지요. 불교에서는 신들이 오히려 인간이셨던 부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스스로 호법신(護法神)을 자처한답니다.”
“신이 인간이었던 분을 따르다니! 참으로 기묘한 종교로군요! 그런 종교의 사원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사원에 도착했으니 제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한부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원 앞에 말을 세우고 지붕에 기와를 얹은 웅장한 석조 건물 앞으로 다가가더니 곁에 있던 시중을 드는 병사에게 명령했다.
“사원의 문을 열려고 하니 어서 제단에 불을 붙여라.”
병사는 태자의 명에 따라 횃불을 가져와서 제단 위에 놓여있는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지하에 설치된 증기기관에 열이 전달되면서 굳게 닫혀있던 사원의 자동문이 서서히 열렸고 그 모습을 본 흉노인들은 다시 한번 입을 쩍 벌리면서 감탄했다.
“오오오오오!”
“원 세상에! 저렇게 크고 무거워 보이는 문이 저절로 열리다니!”
두만 왕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감탄사도 내뱉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한부와 함께 사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동아시아 최초의 불교 사원 안에서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웅장한 불상과 그 앞에 앉아서 승려의 강연에 귀 기울이고 있는 고조선인과 대만에서 온 폴리네시아계 원주민, 그리고 마우리아 제국에서 온 고대 인도인의 모습을 보고 한부에게 말했다.
“아······.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입니다. 이렇게나 다양한 인종과 부족의 사람들이 부처님이라는 분의 가르침을 받고 있군요. 전하. 왕검성에서 병법을 배우고 남는 시간에 저도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