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동호 정벌 (1)
몽골 초원 동쪽의 만주벌판에 사는 여러 동호의 부족은 고조선군이 흉노의 영토만을 지나도 귀국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자신들의 영역을 지나가자 침입자를 격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동호의 왕 임묵은 고조선군의 본대가 동호의 작은 부족을 약탈하면서 행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닷새 만에 동호 부족
연합군을 구성해 수십 명의 장수와 3만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적군이 있는 남서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기병대장 석은 가벼운 차림의 궁기병 1천 기를 이끌고 고조선군 본대의 행군 경로 주변을 정찰하다가 북동쪽에서 동호의 기병대가 일으키는 자욱한 흙먼지를 보고 곁에 있던 부하 장수에게 명령했다.
“적군의 진군 경로를 보니 다행히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서둘러 본대로 돌아가서 태자께 적군이 근접했음을 알려야 한다.”
“기병대장님. 기병 3백 기쯤으로 별동대를 꾸려서 한적을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면 어떻겠습니까?”
“북방 유목민은 우리보다 크고 빠른 말을 타고 다녀서 금방 따라잡힐 거다. 동호족이 우리가 근처에 있다는 걸 눈치채기 전에 다 같이 본대로 귀환하는 편이 낫다.”
“알겠습니다. 기병대장님.”
그 후 석은 휘하의 기병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서 태자와 상장군 무명에게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보고 들은 것을 보고했다.
“기병대장 석이 태자 전하께 보고 드립니다. 북동쪽으로 약 50리쯤 떨어진 곳에서 동호의 기병 수만 기를 발견했습니다.”
“동호의 왕이 생각보다 빨리 군대를 출진시켰군. 적군이 우리의 위치를 알아챈 것 같던가?”
“우리 군 본대가 있는 방향으로 똑바로 달려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병대가 일으킨 흙먼지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 이틀이나 사흘 후에는 적습이 시작될 겁니다.”
“그 정도면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겠구나. 그리고 황하가 굽이치면서 3면이 강물로 가로막히는 지점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더냐?”
“동쪽으로 약 5리쯤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군. 그럼 이곳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적군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
태자의 말을 듣고 무명이 의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현재 우리 군은 남쪽의 황하를 제외하면 장애물이 없는 곳을 지나고 있습니다. 설마 강물을 끼고 주둔지를 지어서 농성을 벌일 생각이신지요?”
“그랬다가는 동호의 왕은 기병대를 풀어서 주둔지를 포위하고 병참선을 끊어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하지 않겠소?”
“제가 적장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개활지에서 동호의 기병대를 상대하시렵니까?”
“기병으로는 공격할 엄두가 안 나는 주둔지보다는 겉보기에 허술해 보이는 방어선을 구축해서 적을 사지로 유인할 거요. 상장군. 당장 전군에 행군을 중지하고 우마차에서 짐을 내려서 한곳에 모으라고 전해주시오.”
“우리군의 보급품을 미끼로 함정을 파시려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오. 보급품이 우마차를 방벽 대신 쓰는 데 방해돼서 치우려는 것뿐이오.”
“우마차로 벽을 치다니······. 40년 넘게 무인으로 살면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술이로군요.”
한부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전술은 원역사의 중세 동유럽에서 유행했던 대기병 전술인 전투마차 방진이었다.
이 전술은 적의 화살이나 총탄을 막기 위한 판자를 설치한 수레나 마차 여러 대를 빈틈없이 늘어세우고 수레와 마차에 쇠뇌와 핸드 캐논, 그리고 창을 든 병사를 태워서 적의 돌진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바겐부르크라고도 불리는 전투마차 방진은 화약 무기가 발달하기 전에는 특히 기병대를 막아내는 데 효과적이어서 서기 15세기에 보헤미아에서 벌어졌던 후스 전쟁에선 전투마차에 몸을 숨긴 농민 반란군 수십 명이 1천 기가 넘는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단을 막아내는 기적적인 전과를 보여준 예도 있다.
다만 이 전술은 적군이 전투마차 방진에 돌격해 와야만 의미가 있는데, 한부는 동호의 왕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미끼를 던져서 이 단점을 상쇄할 생각이었다.
“두고 보시오. 상장군. 이틀 후면 지금은 기세등등한 동호의 기병들이 아연실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요.”
상장군 무명이 전군의 군단장에게 태자의 명을 전하자 고조선군 병사들은 우마차에 적 궁기병의 화살을 막을 판자를 달아서 황하 근처에 둥그렇게 늘어세우고 마차방진 북쪽과 동쪽의 초원에 마름쇠를 뿌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태자의 명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옆에 있는 동료에게 속삭였다.
“주둔지를 지을 때 쓸 목재를 우마차에 때려 박다니······. 태자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런 걸 우리가 생각해서 뭐해? 그냥 열심히 일이나 하자고. 전하께서 지휘하시는 군대가 전투에서 진 적은 한 번도 없잖아?”
“하긴. 난하강에서 연나라군하고 싸웠을 때처럼 이번에도 뭔가 기발한 계책을 생각해내신 거겠지.”
고조선군 병사들은 그저 태자를 믿고 묵묵히 일했지만, 흉노의 공주 진서는 의아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한부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전하. 동방의 마적 떼는 신의 없는 자들이지만, 나약하거나 멍청하지 않습니다. 초원의 전사들이 수레를 뛰어넘어 말 한 필 없는 조선의 병사들을 도륙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남방의 병법에는 허허실실이란 계책이 있습니다. 일부러 허점을 보여서 적의 실책을 유발하려는 겁니다.”
“소장은 전하께서 어떤 계책을 세워두고 계시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군요. 부디 동방의 왕도 마찬가지이길 바랍니다.”
한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흉노 공주의 말을 듣고 말로 대답하는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 고조선군 병사들은 작업을 시작한 지 약 한 시간 만에 전투마차 방진을 완성했다.
한부는 남쪽의 황하 강변을 둘러싸듯 둥그렇게 늘어선 수천 대의 우마차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무명에게 말했다.
“보시오. 상장군. 이만하면 동호의 기병대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지 않겠소?”
“음······. 확실히 겉보기에는 조금 허술해 보여도 효과적인 방어진이군요.”
“이미 생각해 둔 책략이 있소. 조나라의 장수 이목이 흉노의 선우를 속였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적군을 유인해봅시다.”
“전투마차 방진 밖에도 아군을 배치하시려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상장군. 몸놀림이 재빠른 병사 3천 명을 선발해서 아직 마차방진 설치 작업을 마치지 못한 것처럼 위장해주시오. 적장은 창과 검 대신 못과 망치를 든 우리 병사들이 허둥거리며 방진 안으로 숨으려는 모습을 보면 분명 급히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내릴 거요”
“그럴듯한 방법이군요! 북방의 유목민은 하나같이 기질이 사납고 성질이 급하니 십중팔구 미끼를 물 겁니다! 거기에 당황한 적군의 후방을 급습할 수 있도록 기병대에 출격 준비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상장군. 일이 계획대로 풀리면 한 번의 전투로 동호의 기병대를 일망타진할 수 있을 거요”
* * *
고조선군 병사들이 한부의 지시에 따라 적군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다음 날 한낮, 마차 속에서 주변을 살피던 한 병사가 주변의 전우들에게 소리쳤다.
“방위 북동쪽! 거리 10리! 적 기병대가 우리 진영 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무명은 병사의 외침을 듣자마자 마차 방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 3천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밖에 있는 병사들은 우마차 위로 뛰어올라 방진 안으로 들어와라! 될 수 있는 대로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줘서 적의 방심을 유발해라!”
상장군이 명하자 방진 밖의 병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망치와 판자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꿀에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일제 우마차의 차체에 달라붙으면서 아우성쳤다.
“으아아아! 적의 기습이다!”
“비켜!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동호의 왕 임묵은 그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면서 그의 주변에 모여있는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크하하하하! 조선의 적장이 극신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대단한 장수일지 궁금했는데 실상은 저 모양이구나! 모두 저 한심한 모습을 봐라! 우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뒤늦게 울타리 대신 수레를 늘어놓았구나! 그나마도 제시간에 맞추지 못해서 저렇게 많은 병사가 진형 밖에 남겨져 있고 말이지!”
“진정한 초원의 패자이신 동방의 왕이시여! 저놈들이 마차로 친 벽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서 쓸어 버리시지요! 저런 궁색한 짓을 하는 적장이니 휘하의 병사 몇천 명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지레 겁을 먹고 왕께 머리를 숙일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전군 전방의 적군을 향해 돌격하라! 가장 많은 적의 수급을 취한 자에게는 천리마 한 필과 튼튼한 활 한 자루를 하사하겠다!”
동호의 왕이 외치자 동호의 기병 3만 기가 우레 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강과 마주하고 있는 남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적진을 향해 말을 달렸다.
- 두두두두두두두두
우마차 안에 웅크려 몸을 숨기고 있던 고조선군 병사들은 적군이 달려오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지축을 울리는 듯한 말발굽 소리를 듣고 긴장하면서 두 손에 들고 있는 쇠뇌와 활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하던 동호의 기병 중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5백여 기가 탄 말이 긴 풀 사이에 숨어 있는 마름쇠를 밟았다.
- 히히히히히힝!
마름쇠의 날카로운 철침이 동호 기병대가 탄 말의 발굽 사이로 파고들자 고통을 이기지 못한 말은 바닥에 쓰러지면서 등에 타고 있던 기수를 내동댕이쳤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 등위에서 낙마한 유목민 기병 중 상당수가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목이 꺾이거나 머리를 다쳐서 즉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갑옷이 가리지 않은 손바닥과 하반신에 철침이 박히자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비열한 남방인놈들!”
그 뒤를 따르던 유목민 기병들은 앞에서 말을 달리던 전우들이 함정을 밟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기거나 방향을 틀려고 하다 뒤따라오던 기병과 부딪치면서 동호군 진영에 큰 혼란이 빚어졌다.
“으악! 미쳤어?! 전속력으로 달리다 갑자기 멈추면 어쩌자는 거야!”
“풀 사이에 함정이 깔려있어서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저 앞에 쓰러져 있는 녀석들 좀 보라고!”
동호의 장수들은 아군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보고 왕 임묵에게 달려가서 소란을 떨었다.
“동방의 왕이시여! 조선놈들이 초원에 함정을 깔아놨습니다! 지금 전사들은 발밑을 살피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왕이시여! 우선은 이곳에서 벗어나신 다음 발밑의 함정부터 제거하시지요! 이대로 돌진했다가는 적진에 닿기도 전에 많은 전사를 잃을 겁니다!”
여러 장수가 퇴각을 요청했지만, 임묵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전투 중에 전황이 불리해서 도망치는 거라면 몰라도 적과 검을 맞대기도 전에 퇴각하면 적잖은 부족의 전사들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동쪽 초원의 부족을 통합한 지도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겁쟁이 소리를 들을 수는 없거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필사적으로 고조선군 진영을 공격할 길을 찾기 위해 전장을 둘러보다가 전투마차 방진의 동쪽으로 달려나가던 기병대는 함정을 밟지 않고 여전히 돌격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소리쳤다.
“봐라! 동쪽의 전사들은 함정을 밟지 않았다! 적군이 저쪽에는 미처 함정을 설치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전군 동쪽에서 적진을 향해 진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