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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09화 (109/195)

[109화] 선우와의 거래

한부는 오윤 선우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 후 그와 나란히 말을 몰면서 흉노 부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흰 천막 사이를 지났다.

그러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마주친 흉노의 백성은 하나같이 길을 비키면서 수만 명의 전사를 죽음의 늪에서 구해낸 은인에게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하지만 고조선군이 들어선 부락에 있는 모든 북방의 유목민이 한부를 은인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외지인을 부락 안으로 들이는 것도 모자라서 선우가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족속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면서 돌아다니다니!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흉노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구나!”

오윤 선우는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면서 고함을 지르자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노성을 질렀다.

“감히 누가 흉노의 부락 안에서 탱리고도선우를 모욕하느냐!”

그러자 철편을 엮어서 만든 미늘 갑옷을 입고 허리에 곡도를 찬 체격 좋은 중년의 유목민 장수가 선우의 말을 받아쳤다.

“동방 부족의 왕 임묵이 흉노의 선우에게 묻는다! 지금 그대의 모습이 과연 초원의 맹주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대가 적장의 실력을 오판하여 수많은 전사가 남방인이 쏜 화살에 목숨을 잃었는데 남방인을 부족의 손님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드느냔 말이다!”

“저자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선우가 관자놀이에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치자 그를 수행하던 흉노의 전사 수백 명이 일제히 허리춤에서 초승달 모양의 곡도를 뽑아 들었고 스스로 동방 부족의 왕이라고 밝힌 장수를 호위하던 무리도 검을 들고 서로 노려보았다.

그렇게 흉노의 부족

안에서 칼부림이 벌어지려는 찰나, 화려한 색으로 염색한 옷을 입고 턱에 흰 수염이 난 노인 다섯 명이 두 무리의 전사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싸움을 말렸다.

“흉노의 선우시여! 동방의 왕이시여! 두 분 다 싸움을 멈추십시오! 전장에서 쓰러진 전사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칼부림이 웬 말입니까!”

“오늘은 이미 초원에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어찌 초원의 법도를 어기고 동맹을 맺은 부족끼리 싸움을 벌여서 조나라인들을 기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윤 선우는 그런 노인들을 바라보더니 조금 언성을 낮추면서 대답했다.

“장로들도 봤겠지만, 동방의 왕이 먼저 본인을 모욕했소! 저 발칙한 자를 살려서 우리의 영토 밖으로 내보내면 초원의 모든 부족이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오!”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이신 선우시여! 싸움과 전쟁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벌여야 합니다!”

“부락 안에서 수백 명의 전사가 뒤엉켜 칼부림을 벌이면 아직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어린아이와 노쇠한 노인들의 피가 흰 천막을 붉게 물들일 겁니다. 그런 싸움에서 어떻게 명예를 얻으실 수 있겠습니까?! 전사의 명예는 초원의 전장에서 구하도록 하십시오!”

흉노족

장로들의 호통을 들은 오윤 선우와 동호의 왕 임묵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동호의 왕은 부하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 한번 고함을 질러서 선우의 화를 돋웠다.

“오늘 이 시간부로 우리 동호는 어리석고 나약한 흉노의 선우 오윤을 초원의 패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빨 빠진 늑대 오윤은 내 뜻을 꺾고 싶다면 언제든지 너를 따르는 전사들과 함께 동호의 영토로 찾아와라! 네가 오지 않는다면 언젠가 내가 직접 기병 수만 기를 이끌고 흉노를 정벌할 테니 말이다!”

“저놈이 마지막까지 내 속을 뒤집어 놓고 가는구나!”

동호의 왕 임묵은 불에 달굴 쇠처럼 얼굴이 시뻘게진 선우를 다시 한번 노려보고는 조나라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병들을 데리고 흉노의 부락을 떠났다.

오윤 선우는 한참 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부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귀한 손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려. 동호의 이리가 하필 지금 이빨을 드러낼 줄이야······.”

“감히 초원의 패자이신 탱리고도선우께 저토록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다니······. 아무래도 어제 벌어진 전투에서 충격을 받고 실성한 모양입니다.”

“음······. 여기는 듣는 귀가 너무 많으니 그 이야기는 본인의 천막 안에서 더 나눕시다.”

한부는 선우의 제안에 따라 부하 장수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다음 붉은색으로 염색한 천으로 만든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와 한부가 나무로 만든 문 안으로 들어서니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중동계 백인 귀부인이 고개를 숙이며 선우에게 인사했다.

“예정보다 늦게 오셨군요. 선우시여. 전사들의 목숨을 구한 은인은 만나셨습니까?”

“다녀왔소. 연지. 내 뒤에 있는 이 건장한 청년이 바로 그대의 남편과 수만 명의 전사를 구한 은인이신 조선의 태자이시오.”

연지라고 불린 여인은 남편의 말을 듣고 한부의 곁으로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흉노의 선우와 전사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이 전하를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전 오늘 선조의 곁으로 떠났을 남편 대신 전사들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겠지요.”

“존경할만한 전사들이 조나라인의 교활한 속임수에 걸려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한부는 연지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역사 기록대로라면 다른 사람은 다 조나라군한테 죽었어도 선우는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 돌아왔을 텐데. 계속 생명의 은인 대접을 해주니까 좀 기분이 그렇구만. 그나저나 선우의 연지가 백인이었을 줄이야. 흉노에선 몽골계 동양인과 튀르크계 백인이 뒤섞여서 살았다는 설이 사실이었구나.

선우는 한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연지에게 말했다.

“연지. 아직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르기 전이라 연회를 열 수는 없지만, 내 천막 안에서 손님과 마유주 한잔 걸치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어서 하인들에게 주안상을 내오라고 전해주시구려.”

“그리하겠습니다. 선우시여.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으니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여부가 있겠소?”

연지는 곧 천막의 주방에 가서 하인들에게 마유주와 구운 양고기를 탁자 앞에 앉아있는 선우와 한부에게 가져다주도록 지시했다.

주안상이 나오자 두 사람은 술잔을 몇 번 주고받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던 중 선우가 조금 전에 있었던 동호의 왕과의 다툼에 관한 말을 꺼냈다.

“그대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한 동방 부족의 왕은 오랫동안 우리 흉노와 초원의 패자 자리를 놓고 경쟁해 왔소. 그러던 중 다섯 해 전에 본인이 흉노의 전 부족

중 절반을 하나로 통합하고 최초로 선우의 자리에 오르면서 우리 흉노의 세력이 동방 부족

연합보다 조금 앞서게 되어 초원의 패자를 자처할 수 있게 됐었소.”

“‘됐었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북방의 유목민들은 전사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 불리한 전투에서 지혜롭게 물러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조나라군과 싸워 수십 번이나 승리를 거두신 선우께서 한 번의 전투에서 패하신 정도로 초원의 패자라 불리실 자격을 잃게 된단 말입니까?”

“아주 단순한 이유요. 우리 전사들이 너무 많이 하늘에 계신 선조들의 곁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흉노와 동방 부족의 세력이 다시 비슷해져 버렸소. 어제 조나라군의 화살에 맞고 전사한 1만여 명 중 7천 명 정도는 우리 흉노의 전사였다오.”

“아······! 일이 그렇게 돼버렸군요!”

한부는 그제야 동맹을 맺고 조나라에 대항하던 북방 유목민족

사이에 분란이 일어난 이유를 이해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휴······. 또 역사의 나비효과가 미쳐 날뛰는구나. 원래대로라면 평등하게 궤멸당했을 북방 유목민 기병대 중 흉노 출신만 많이 죽어버리다니. 연나라 정복 이후로는 쉽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구만.’

선우에게 맞선 동방의 부족이란 몽골 초원 동쪽의 만주지역이나 시베리아에 널리 펴져서 살던 유목민족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로 고대 중국인들 이들을 ‘동호’라고 불렀다.

원역사에서 동호는 조나라의 명장 이목이 수년 동안 공들인 책략으로 선우가 이끄는 기병대를 몰살시킬 때 많은 전사를 잃는 바람에 흉노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한부가 조나라군을 쫓아내는 바람에 병력을 대부분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호에 속한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과 흉노의 접경지대 근처에 많이 퍼져서 살고 있지. 이 부족들이 아까 동방의 왕이라는 놈처럼 조선과 흉노가 친하게 지내는 걸 불쾌하게 여기면서 교류를 방해하면 흉노와 동맹을 맺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어쩔 수 없이 유목민들한테 조선의 힘을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겠구만.’

한부는 손에 든 마유주 잔을 단숨에 들이킨 다음 선우에게 물었다.

“선우시여. 자칭 동방의 왕이라는 자가 동원할 수 있는 기병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아시는지요?”

“원정을 떠날 때라면 최소한의 수비병력을 남겨놔야 하니 2만 기 정도일 거고······. 자기 영토를 침범한 외적을 물리칠 때는 대략 2만 5천 기에서 3만 기 정도일 것이오.”

“그럼 제가 새로운 동맹인 흉노의 안녕을 위해서 무례한 동방의 왕과 그 추종자들을 쳐부수도록 하지요. 그러고 나면 선우께서 전사의 씨가 마른 동방 부족을 정벌하여 그 땅을 차지하십시오.”

“호기로운 말이 듣기 좋지만, 그대를 따르는 병사 중에는 기병이 별로 없지 않소? 극신을 물리친 장수라면 숙련된 기병 한 기가 보병 다섯 명을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선의 보병은 기병을 상대로 싸우는 데 익숙하고 저도 병법에 어둡지 않습니다.”

“흠······. 동방 부족

정벌은 오랜 세월 동안 흉노의 부족장 중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인데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구려. 만에 하나 그대가 동방의 왕 그 무례한 자의 목을 내게 선물해 준다면 나도 그에 걸맞은 선물을 해야겠군.”

한부는 선우의 말을 듣고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혹시 한혈마를 몇천 마리쯤 주려는 건가? 하북에서 한혈마를 기르는 데 성공하면 마갑까지 갖춘 진짜 중기병을 육성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선우가 제안한 동호 정벌의 대가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래! 마침 우리 장녀가 혼기가 다 찼었지! 만약 그대가 정말로 동방 정벌에 성공하면 흉노의 공주는 그대의 연지가 될 것이오.”

“네?! 전 이미 조선에 부인이 있는 몸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족

중에서 부인을 한 명만 두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렇게 놀라시오? 많은 자손을 남기는 건 왕족의 중요한 의무이지 않고? 사윗감이 강대국의 태자이자 뛰어난 무장이라면 내 딸도 그대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을 인정할 거요.”

“과연······. 조선과 흉노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데는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겠군요. 다만 조선에서는 군주의 정실부인이 아닌 아내들을 후궁이라고 부르니 흉노의 공주님은 제게 시집을 오시면 연지라 불리지 못하실 겁니다.”

“그대가 조선의 왕검이자 흉노의 선우이면 안 될 것도 없지 않소?”

“선우시여. 진심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조선의 태자여. 흉노에선 외적을 물리치는 강한 선우가 남방인들이 말하는 성군이고 현왕이오. 극신이 버티고 있던 연나라와 동방의 부족을 모두 물리친 무장이 본인의 장녀와 혼인하여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면 감히 반대할 자가 없을 거요.”

“알겠습니다. 선우시여. 반드시 동방의 부족들을 쳐부수고 흉노의 공주님을 연지로 맞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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