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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08화 (108/195)

[108화] 주사위는 던져졌다. (2)

이목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적군의 머리 위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를 바라보고 있을 때, 흉노의 선우는 말 등위에서 넋이 나간 눈빛으로 맥없이 쓰러져가는 부하와 동맹 부족의 전사들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최초의 탱리고도선우인 이 오윤의 꿈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흉노의 위신을 드높이기는커녕 부족의 전사들이 죄다 죽게 생겼구나!”

그러던 중 선우를 향해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왔고 흉노의 장수인 우도기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면서 말을 달려왔다.

“선우시여! 피하십시오!”

우도기왕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자신의 몸으로 주군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받아냈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타고 있던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선우는 아끼던 장수가 전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허리춤에서 철검을 뽑아 들면서 아직 몸과 마음이 성한 주변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우도기왕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모두 반드시 살아 돌아가서 훗날을 도모하자!”

그런데 선우의 외침을 들은 흉노의 기병 수백 기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찰나, 갑자기 전장의 북동쪽에서 봉화가 올라왔다.

선우를 탈출시키기 위해 포위망을 향해 돌진하려던 흉노의 전사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건 또 뭐지? 조나라의 지원군이 전장에 도착했다는 신호인가?”

“뭐?! 지금도 위태로운 데 적군이 더 온다고?! 이목 그 교활한 자가 오늘 흉노의 씨를 말려버리기로 작정했구나!”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조나라군의 장군 이목 또한 봉화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동쪽에서 적군이 접근하고 있다고? 그럴 리가? 흉노의 선우에게 여기 모인 것 이상의 병력을 모을 능려이 있을리 없어!”

지금의 흉노는 이미 조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지만, 원역사의 기원전 2세기의 흉노처럼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활한 초원을 통일하고 중원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의 군대를 박살 내고 한나라에 조공을 받아냈던 거대한 유목 제국은 아니었다.

이목은 지난 몇 년 동안 대와 안문 등 조나라 최북단을 통치하면서 북방 유목민족을 자세히 관찰해 왔기에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흠······. 흉노군이 만약에 대비해서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별동대를 보내서 우리 군의 봉화 중 하나를 차지한 건가? 야만인치고는 제법 열심히 머리를 굴렸군. 하지만 이 이목은 그 정도 책략에 넘어가 줄 만큼 무르지 않다.”

이목은 봉화의 신호를 무시하고 기수가 모는 전차를 타고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조나라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전투는 북방 유목민 연합군의 전멸로 끝이 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봉화가 올라온 방향의 지평선에서 햇빛에 번쩍이는 강철 경번갑을 보병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한순간에 전황이 급변했다.

“이목 장군님! 북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서 조선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장군님께 이 사실을 보고하려고 달려오던 전령이 여러 명 공격당해서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됐습니다!”

봉화를 지키고 있던 조나라군 병사가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하자 이목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소리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구나! 아무리 조선의 국경과 이곳이 가깝다고 해도 조선의 동이족들이 무슨 수로 여기서 전투가 벌어질 줄 알고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래서 적군의 수는 얼마나 되느냐?!”

“보병이 약 3만 명이고 기병은 2천 기입니다!”

이목은 병사의 보고를 듣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고조선군이 전장에 난입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경사 장군의 부대에 종군했던 병사가 말하길 조선군은 진나라의 것과 맞먹을 정도로 성능이 좋은 노궁에 150보 밖의 적을 맞출 수 있는 활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지. 그리고 기병도 수는 적지만 흉노 이상으로 용맹하다고 들었다. 괜히 병사를 나눠서 조선군의 진격을 평야에서 막으려 들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겠군······.’

이목은 냉정하게 전황을 분석한 다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그가 탄 전차를 호위하고 있는 말을 탄 장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병대에게 포위망을 조금 풀어서 적군에게 살길을 열어주라고 전하게. 이대로 전투를 계속하다가는 흉노의 선우가 그랬듯이 우리도 앞뒤로 적을 마주하여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말 걸세.”

“참으로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장군님의 판단은 늘 정확했지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목 장군님.”

말을 탄 장수는 곧 조나라군 기병대가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달려가서 장군의 명을 전했고 기병들은 포위망에 길을 텄다.

살길이 열리자 대부분 겁에 질려있던 북방 유목민 연합군의 기병들은 앞장서서 말을 달리는 선우의 뒤를 따라 포위망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간 다음 흉노의 영토로 퇴각했다.

선우는 열심히 말을 달리면서 북동쪽에서 몰려오는 조선의 군대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이른 나이에 하늘로 돌아가신 선조를 뵈러 갈뻔했구나! 어느 부족의 전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을 빚지고 말았구먼.”

그리고 이목은 기수가 모는 전차 위에서 도망치는 흉노의 기병 무리와 고조선의 군대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흉노의 선우, 그리고 조선의 이름 모를 적장이여. 다음에 전장에서 만날 때는 반드시 끝을 보자꾸나.”

* * *

이목이 이끄는 조나라군이 전리품을 챙길 새도 없이 북방의 요새 도시 대성으로 퇴각했지만, 고조선군은 곧바로 흉노의 영토로 진입하는 대신 유목 부족

전사자의 시신이 남겨진 전장을 향해 행군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에 도착하자 상장군 무명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전하. 짧은 시간 동안 1만 기가 넘는 유목민 기병이 죽었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이목이라는 장수는 보통내기가 아닌 모양입니다. 유목민들이 방심했다고는 하나 평야에서 보병으로 기병을 포위하는 전술은 감탄할 만하군요.”

“동감이오. 상장군. 포위망을 풀기 전의 조나라군의 진세를 보고 내 눈을 의심했소.”

“오늘 일로 삼진의 세 나라 조정은 조선을 완전히 적으로 인식했을 겁니다. 서둘러 흉노와 동맹을 맺고 계로 돌아가서 진, 조, 위, 한 네 나라의 연횡군을 상대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 동맹국인 제나라를 칠 게 분명한 초나라를 견제할 방법도 마련해야겠지요.”

“물론 전쟁 준비를 해둬야겠지만, 아직은 조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가 주도하는 연횡책에서 빠지게 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소.”

“조나라와 위나라의 왕은 전하께서 보내신 사절을 문전박대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갈등을 외교로 해결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전하.”

“외교가 통하지 않으니 대신 책략과 공작을 써볼 생각이오. 암부의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려놨으니 좋은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그럼 연횡군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우선 전장의 정리를 한 다음 어서 흉노의 선우를 만나러 가는 게 좋겠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병사들에게 북방 유목민 전사자의 시신과 그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빈 수레에 싣도록 명령했다.

한나절이 지난 후 전장 정리 작업이 끝나자 고조선군은 수습한 시신과 전리품을 가지고 흉노의 영토로 진군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한숨 고르고 있던 선우는 갑자기 전장에 나타난 생명의 은인이 흉노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애마를 타고 부락 입구까지 나와서 두 팔을 벌리며 한부와 무명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동쪽에서 오신 귀인이여! 모든 흉노인을 대신해 나 하늘이 내린 푸른 늑대의 후손 탱리고도선우 오윤이 본인과 수많은 전사의 목숨을 구해준 그대에게 감사드리오!”

선우가 말을 마치자 고조선군에 종군한 통역사가 그의 말을 전하려고 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한부는 오른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막은 다음 능숙한 흉노어로 선우에게 대답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로 유명한 흉노의 탱리고도선우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조선의 태자이자 왕검 폐하를 대신해 하북의 북부와 요서, 요동을 다스리는 제후인 한부라고 합니다.”

“허허! 40년을 살면서 이렇게 훌륭한 억양으로 우리 말을 하는 남방인은 처음 보는군요! 혹시 그대의 조상 중에 흉노인이 있소?”

“그렇지 않습니다. 선우시여. 그저 조선과 흉노가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고 싶었으면 하는 마음에 연나라를 정복을 마치고 열심히 흉노어를 배웠을 뿐입니다.”

“그럼 그대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연나라를 정복한 장수란 말이오? 늙은 귀신 극신을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극신 장군은 난하강에서 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나서 지금은 조선의 군주이신 왕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여전히 흉노와의 접경지역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부가 대답하자 선우와 그를 수행하던 흉노의 장수들이 놀란 눈으로 한부를 바라보았다.

극신은 연나라 왕실을 섬기던 시절에 수십 년 동안 적극 북방의 유목민을 토벌하는 방식으로 국경지대를 지켜내서 흉노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극신을 30대의 젊은 장수가 물리치고 부하로 삼기까지 했으니 흉노인들의 눈에는 한부가 대단한 무장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선우는 호기심과 호감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한부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극신을 이렇게 젊은 장수가 물리쳤단 말인가! 그대와 향기로운 마유주를 마시면서 무용담을 들어보고 싶지만, 남쪽의 벌판에는 이번 전투에서 선조들의 곁으로 떠난 1만 명이 넘는 전사가 누워있소. 그대와 그대의 부하들을 손님으로 대접할 테니 부디 전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를 때까지 내 천막에 머물러주시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시여. 그렇지 않아도 이곳으로 오는 길에 벌판에 쓰러져있는 흉노의 전사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왔습니다. 전사들의 혼이 죽은 육신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도록 어서 장례의식을 진행하시지요.”

“허······.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는데, 죽은 형제들까지 보살펴 줬다는 말이오? 참으로 감사하오. 조선의 태자여. 앞으로 우리 흉노는 나 오윤이 선우의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은 조선인들을 친형제로 여길 것이오.”

원역사에서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흉노의 선우 오윤은 한부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한부는 감격하는 선우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지만,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초원의 맹주이신 탱리고도선우께서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이러지 마십시오! 선우시여! 아직 부락에 남아있는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 이 모습을 보면 좋을 게 없습니다!”

“이번 전투에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 참여한 걸 알고 있었군요. 젊은 나이에 용감하고 겸손한 데다 지혜롭기까지 하다니. 더더욱 그대에게 흥미가 생기는구려. 어서 부락 안으로 들어갑시다. 흉노의 장로와 동맹 부족의 전사들에게도 그대를 소개하고 싶소.”

“따듯한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우시여.”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부하들을 이끌고 수천 개의 천막이 모여있는 흉노의 부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한부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흉노의 소년 몇 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노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년들은 안장이나 고삐도 없이 양을 기병이 말을 몰듯 타고 몰려다니면서 쥐나 작은 새를 작은 활로 쏘아서 잡으면서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환경에서 자라면 건강한 남자는 누구나 일류 기병이 될 수밖에 없겠지. 역시 흉노와 손을 잡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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