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주사위는 던져졌다. (1)
무명은 태자의 부름을 받고 옥좌 앞으로 걸어 나온 후 읍하면서 말했다.
“전하. 어인 일로 소장을 이리 급하게 찾으셨습니까?”
“상장군. 급히 병사들을 움직여야 할 일이 생겼소. 당장 소집할 수 있는 병력은 전부 얼마나 되오?”
“조나라의 침략 이후 계의 수비병력을 늘렸기에 계에는 전부 여섯 개 군단, 보병 약 6만 명에 기병 4천 기가 주둔 중이지만, 계를 지킬 수비병을 남겨두려면 원정에는 세 개 군단 정도만 동원할 수 있습니다. 또 작년 연나라 정벌 전쟁에서 활약한 조선 출신 병사 중 3분의 1 이상이 한 달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계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 중 상당수는 실전 경험이 없는 신병입니다.”
“음······. 상장군이 보기에 올해의 신병들이 강행군에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조선에 있는 비왕이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킨 덕에 기본이 되어 있는 병사들이라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나라와 전쟁을 벌이시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목이라는 장수가 이끄는 조나라군과 흉노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오. 다만 어느 편을 들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소.”
“흉노의 편을 드시지요. 전하.”
한부는 그 대답을 듣고 놀란 목소리로 무명에게 물었다.
“의외로구려. 본인은 막연하게 경이 조나라 편을 들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오.”
“소장이 진나라 출신이라서 말씀입니까? 저희 가문의 선조는 초나라 출신이라 소장의 혈관에도 묘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조나라와 흉노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면 흉노를 택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말해주시오.”
“우선 흉노는 조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우수한 기병과 전투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국칠웅에 속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인구가 많아 가장 약한 한나라조차도 10만 보병을 동원할 수 있지만, 기병은 진나라와 초나라 외에는 한 번에 1만 기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가 없지요. 이런 상황에서 보병이 강한 조선과 기병이 강한 흉노가 손을 잡으면 중원을 호령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오. 특히 상장군과 극신 장군이 경사가 이끄는 조나라군을 물리칠 때 등자를 적군에게 보여버렸으니 더더욱 기병의 숫자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할 필요가 있을 거요. 하지만 조나라도 뛰어난 장수가 많아 우리 조선과 동맹을 맺으면 진나라 정벌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전하. 주나라 봉국의 후예인 조나라가 그리 쉽게 조선에 마음을 열겠습니까? 반면 흉노는 가난한 야만인 부족이 뭉친 부족국가라 조선에서 생산된 화려한 사치품을 교역으로 얻기 시작하면 점점 조선의 앞선 문화에 동화되어 가겠지요. 진나라도 바로 그런 식으로 수많은 서융의 부족을 흡수하면서 인구를 불려 성장했습니다.”
한부는 무명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것도 그럴싸한 말이네. 역사적으로 중원에 제국을 세웠던 유목민들은 죄다 무명이 말한 식으로 중국에 동화되면서 사라져갔지. 지금 흉노와 동맹을 맺으면 내 증손자 세대쯤에는 흉노족들이 조선의 문화에 물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선 문화권의 인구가 늘면 중원에 영토를 늘려도 조선이 또 하나의 중국이 돼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날 확률도 줄어들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한부는 다시 무명과 눈을 마주치면서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장군의 제안대로 흉노의 선우를 구하러 가겠소. 상장군, 여섯 개 군단이 쓸 보급품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한 달 정도면 넉넉히 군량과 마초를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보름 안에 마치시오. 그동안 본인은 흉노의 선우에게 다시 사신을 보내서 함께 조나라를 치고 싶으니 길을 빌려달라고 전하겠소.”
“전하. 흉노는 수많은 야만인 무리 중에서도 특히 세력이 강성하니 너무 서두르시지 않아도 이목 따위 이름 없는 적장이 이끄는 조나라군에게 크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한부는 무명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상장군. 이목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그자는 신평군 염파 못지않은 강적이니 말이오.”
“조나라에 그 늙은 호랑이와 비견할 만할 장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전하의 말씀이 아니라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이야기로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적장 이목의 이름 두 자를 소장의 머릿속에 새겨두겠습니다.”
태재의 명을 받은 상장군 무명은 한부가 지시한 대로 단 보름 만에 기병대장 석과 사마근을 비롯한 부장 수십 명과 3만 2천 명의 병사가 출진할 준비를 마쳤다.
춘궁기에 그 많은 병사를 먹일 군량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찌감치 농업혁명을 이룬 한반도 북부에서 들여온 풍부한 밀과 채소가 서해를 건너 계에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부는 평안남도 일대에서 생산된 밀 포대를 실은 우마차 행렬을 보면서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옛 연나라 영토 거의 전역에 4윤작법과 시비법을 전파할 수 있다. 특히 하북은 원래 개간이 잘 되어 있어서 금방 식량 생산량이 폭증할 거야. 그럼 한반도 북부와 요동, 요서, 그리고 하북을 잇는 거대한 광역 경제권이 형성될 거고 조선은 진나라하고 맞먹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겠지. 그러려면 그때까지 중원 세력의 침략을 막아내야만 해.’
그는 스스로 이번 전투에서 사용할 군수품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 전군에 출진 명령을 내렸다.
“전군 북서쪽으로 출진하라! 조나라군과 흉노군의 전투가 끝나기 전에 전장에 도착해야 한다!”
* * *
한부가 직접 이끄는 고조선의 3만 2천 대군이 계의 성문을 나설 때, 흉노도 조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오르도스 고원 곳곳에 퍼져있는 여러 소부족
에서 병사를 징집하고 동호와 임호, 담람 등 다른 북방의 유목민족과도 동맹을 맺어서 연합군을 구성해 조나라와 국경을 맞댄 지역에 모였다.
모든 전사가 화살통에 화살을 채우고 양가죽으로 만든 가방에 육포를 가득 채우자 가죽 조각을 엮어서 만든 갑옷을 입고 털모자를 쓴 유목 부족의 장수들이 화려한 천으로 만든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옥좌에 앉아 있는 흉노의 군주 선우에게 보고했다.
“하늘이 보낸 푸른 늑대의 후손이시자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탱리고도선우(선우의 정식 명칭)시여. 전투 준비를 마친 초원의 전사들이 당신의 명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이번에 모인 늑대는 전부 몇 마리인가?”
“좋은 말과 튼튼한 활을 지닌 기병이 5만 5천 기나 모였습니다.”
“5만 5천 기라! 조선에서 온 사신에게 기병 10만 기는 동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 놨는데, 역시 아직 그 정도가 한계인가? 그래도 그 정도면 비리비리한 조나라 놈들을 쳐부수기에 부족하지는 않겠구나.”
“그렇습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시여.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북방의 늑대가 모였으니 조나라 장군 이목은 이번에 우리 기병대의 위세에 겁먹고 대성의 성벽 뒤에 숨을 겁니다.”
“하! 그 한결같이 못난 놈! 내 오늘이야말로 대성을 쳐서 떨어트리고 도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치는 적장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겠다! 올해 열 살이 된 장남 두만의 선물로는 그만한 게 없을 것 같구나!”
그런데 그때, 얇은 가죽옷 한 장을 걸친 흉노의 병사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면서 천막 안으로 들어와 선우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께 보고 드립니다! 현재 적장 이목이 이끄는 조나라의 대군이 우리 영토 근처의 평야로 몰려와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못난놈! 적군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를 먼저 보고해야 할 것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선우시여! 적군은 말 두 마리가 끄는 전차 7백 승, 기병 약 7천 기, 보병 약 3만 명, 궁수가 약 5만 명입니다!”
“뭐라고?! 지금까지 이목 그자가 그토록 많은 대군을 동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건만! 대체 무슨 꿍꿍이지?”
조나라의 장군 이목은 흉노와의 접경지대에 부임한 이후 봉화 등을 설치하여 흉노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면서 흉노의 기병대가 국경 마을을 공격하면 전투를 벌이는 대신 모든 백성과 병사들을 요새 도시인 대와 안문으로 피신시켰다.
그런 일이 몇 년이나 반복되자 북방 유목 부족은 조나라군을 완전히 얕보게 되었는데, 이목이 하필 흉노 역사상 가장 많은 북방의 기병대가 조나라와의 접경지역에 집결했을 때 처음으로 대군을 이끌고 흉노의 국경선에 접근했으니 흉노의 장수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장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명령만을 기다리자 선우가 가장 아끼는 장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우도기왕. 자네가 먼저 기병 5천 기를 이끌고 나가서 적장 이목의 속셈을 알아보게. 남방의 농사꾼들은 속이 검어서 어떤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시여.”
우도기왕은 선우에게 경례한 후 천막 밖으로 나가서 덩치 큰 한혈마의 등 위에 올라 5천 기의 궁기병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조나라군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조나라군은 흉노의 기병대가 점점 가까이 갈수록 여느 때처럼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우도기왕은 그 모습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비웃었다.
“그럼 그렇지! 어서 선우께 이 사실을 전해라!”
“알겠습니다! 우도기왕님!”
우도기왕의 명을 받은 기병은 즉시 다시 북방 유목민 연합군의 진영으로 돌아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신 선우시여. 조나라군은 우도기왕이 이끄는 기병대의 위세에 겁을 먹고 병사를 물리고 있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9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데리고도 기병 5천 기에 맞설 용기가 없다니! 이목 그 겁쟁이다운 추태로구나!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려라! 적장이 또 대성 안에 숨기 전에 목을 치는 거다!”
선우는 곧 본진에 남아있던 기병 5만 기를 친히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조나라군은 선우의 기병대를 발견하자마자 갑자기 더 속도를 내서 퇴각했고 후방에 질 좋은 갑옷과 투구를 몸에 걸친 보병 3천여 명을 남겨두었다.
선우는 그 모습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다시 소리쳤다.
“후방에 버려진 잡병 무리가 저렇게 좋은 갑옷을 입고 있다니! 저놈들을 한 놈도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마라!”
선우가 명하자 흉노의 궁기병대가 뒤처져 버린 조나라군 병사들을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피라니아 떼처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면서 산발적으로 화살을 날려댔다.
그러나 여느 병사들과는 달리 큰 나무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조나라군 병사들은 방패로 벽을 치면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버텼다.
선우는 그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직접 적진으로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멍청한 놈들! 화살이 안 통하면 창을 써야 할 것 아니냐!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줘야겠느냐?! 창기병대는 나를 따르라!”
그렇게 약이 오른 북방 유목민 연합군이 남겨진 보병 3천 명을 공격하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 이목은 지휘관용 전차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어 이 이목이 겁쟁이의 오명을 벗고 천하에 이름을 떨칠 때가 되었다! 전군 훈련한 대로 포위망을 펼쳐라! 오늘이야말로 가증스러운 흉노의 씨를 말리는 거다!”
호리호리한 젊은 장군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조나라군 병사들은 역사 기록에 ‘기묘한 진세’라고만 기록된 포위망을 펼쳤다.
조나라군 보병 2만 7천 명은 후방에 남겨진 아군을 공격하느라 정신이 팔려 한곳에 뭉쳐있는 적 기병대를 순식간에 U자 형태로 감싸고 창을 들이밀었고 뚫려있는 입구 부분에는 기병대 7천 기가 틀어막았다.
그리고 포위망 밖에 포진한 궁수 5만 명은 일제히 활을 쏘아댔다.
북방 유목민 기병들은 한순간에 인의 장벽에 갇혀버리고 머리 위로 장대비 같은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함성 대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속았다! 적장의 함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