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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06화 (106/195)

[106화] 선택의 기로

이사를 저택 안으로 안내한 곽개는 그를 통해서 다시 한번 진나라 조정이 보낸 막대한 뇌물을 받았다.

진나라 승상 여불위가 천금을 주면서 중원 제일의 매국노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조나라의 왕과 제후, 그리고 대신들이 전국칠웅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다시 조선 정벌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곽개는 이사를 만난 다음 날 오전에 이미 자신의 말이라면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해도 믿을 조나라 태자 언을 만나기 위해 한단의 궁궐에 찾아갔다.

궁궐 대문을 지키고 있던 왕실 근위병 두 명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후덕한 외모의 곽개가 장정이 네 명이 드는 가마를 타고 눈앞에 나타나자 즉시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곽 대부님.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곽 대부님. 오늘도 태자 전하를 뵈러 오신 모양입니다.”

가마에서 내린 곽개는 입가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 두 병사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대답했다.

“겨우 닷새 만에 입궐하는데 오랜만은 무슨. 자네들 능청이 나날이 느는구먼? 아무튼, 아직 날이 쌀쌀한데 야외에서 보초를 서느라 수고가 많네. 근무가 끝나면 이걸로 탁주라도 한 사발 걸치게나.”

곽개가 말을 마치고 그와 함께 온 시종에게 눈짓을 보내자 시종은 품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두 개를 꺼내서 병사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두 왕실 근위병은 눈을 반짝이면서 주머니를 받아서 열더니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조나라의 칼 모양 동 화폐 원수도를 보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고! 곽 대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한 달 동안은 술값 걱정할 일이 없겠군요!”

“저희가 하는 것도 없이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하는 일이 없나? 자네들은 내 사업에 큰 도움이 된다네. 언제나처럼 종종 내 집에 들러서 요즘 궁궐에 누가 자주 입궁하는지 알려주게. 나 같은 장사꾼한테는 정보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 근무가 끝나자마자 이 친구랑 함께 댁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곽개는 그렇게 왕실 근위병들을 매수한 다음 내관의 안내를 받으며 태자 언의 처소에 찾아갔다.

올해 갓 스무 살이 된 조나라의 태자는 곽개를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곽 대부! 내관이 경이 입궐했다기에 글공부를 하다말고 부랴부랴 달려왔다오!”

“대부 곽개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반겨주시는 것은 기쁜 일이오나 소신 때문에 글공부를 소홀히 하시면 대왕께서 역정을 내시지 않겠습니까?”

“후······! 말도 마시오! 이미 죽어서 흙이 된 지 몇백 년이나 지난 자들이 남긴 말을 배워서 어디다 써먹으라는 건지 모르겠소! 공자니 손자니 아주 지겨워 죽겠다니까?! 그런 건 대신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군주는 그저 유능한 인재를 뽑을 줄만 알면 되는 거 아니겠소?”

“소신도 전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모름지기 사람을 보는 안목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부대끼며 쌓은 경험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이지 색이 바랜 죽간에 쓰여있는 고루한 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곽 대부하고는 말이 잘 통한단 말이야! 훗날 본인이 옥좌에 앉으면 반드시 경을 상방에 자리에 앉힐 것이오.”

“전하, 이미 신평군이 상방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찌 소신 따위가 재상의 자리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염파 그 고집 센 늙은이는 동이족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조나라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진나라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움직여 공을 세웠을 뿐이지 않소? 주나라 봉국의 후예가 동이족에게 고개를 숙인 굴욕을 탓하는 대신이 없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오.”

곽개는 태자 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태자 주변의 궁인들을 매수해서 염파 그 재수 없는 늙은이의 험담을 하게 한 보람이 있구나. 아무리 태자가 멍청해도 내가 먼저 염파 욕을 입에 담았으면 한 번쯤은 내게 사심이 있다고 의심을 해봤을 테지.’

곽개는 진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기 시작한 후 조나라를 지키는 거대한 장벽인 염파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왔다.

그런 매국노의 집요한 노력은 드디어 결실을 보아 원역사라면 4년 뒤에 옥좌에 앉게 되는 태자 언이 염파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진나라 조정이 그에게 천금을 주면서 조선과 조나라 사이를 다시 이간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곽개는 이번 기회를 다시 염파를 음해할 기회로 삼았다.

“전하의 말씀대로 소신이 최근 여러 연나라 출신 항장과 조선과 자주 교류하는 제나라 상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았는데 이번 조선 정벌에 실패한 탓에 동이족들이 우리 조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합니다. 조선의 동이족들은 이제 기고만장해져서 이번에야말로 난폭한 흉노와 연합하여 대대적인 중원침략을 꾀하고 있다고 하니 걱정이 큽니다.”

“그게 정말이오?! 조선과 흉노가 손잡고 중원을 넘보는 건 망한 연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아니오?! 홀로 연나라를 멸망시킨 동이족들이 이제 흉노의 수만 기병까지 얻어서 국경을 넘어오게 생겼구려!”

“전하. 그 사달이 나기 전에 주나라 봉국의 후예들이 옛 원한을 잊고 힘을 합쳐서 북쪽의 야만족

무리를 토벌해야 합니다. 형제의 나라인 위나라와 한나라는 물론 필요하다면 진나라나 초나라와도 손을 잡고 조선을 정벌해야 합니다.”

“진나라는 우리 조나라와 원수지간인데 조선 정벌에 힘을 보태겠소?”

“진나라의 승상 여불위는 나라에 이득이 되는 일에 해묵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조선과 흉노의 연합군에 우리 조나라가 망하면 야만족들이 진나라의 국경을 넘어 약탈을 일삼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나라와 한나라를 먼저 끌어들이면 분명 병사와 물자를 보내 조선 정벌에 힘을 보탤 겁니다.”

“곽 대부의 혜안에 다시 한번 감탄했소. 내 당장 대왕 폐하를 뵙고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청하리다.”

“소신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곽개는 그렇게 조나라 태자를 구워삶은 후 궁궐 밖으로 나오면서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곧 조정이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서 시끌시끌해지겠구나. 이제 왕이 주전파의 손을 들도록 할 방법을 생각해내야겠군.’

* * *

여불위의 지시에 따라 매국노 곽개와 진나라 첩자들의 암약하기 시작하면서 고조선은 제나라를 제외한 다른 전국칠웅의 나라들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기원전 248년 4월 초, 왕검을 대신해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는 태자의 명을 받고 조, 위, 한, 초 네 나라도 떠났던 사신들은 하나같이 울상을 지으면서 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조나라로 떠났던 박사 악간은 계의 궁궐에 찾아가 옥좌에 앉아 있는 한부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전하. 송구스럽게도 소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조나라와 우호 관계를 다지지 못했습니다.”

“허······. 조나라 왕이 경을 내쳤다는 말이오? 분명 경의 부친인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한 후에 객경(客卿: 재상과 맞먹는 높은 지위에 있는 외국인)으로서 후한 대접을 받지 않았소?”

“조나라 왕은 소신을 보자마자 ‘아들이 동이족의 신하가 된 걸 보면 명장 악의가 지하에서 통곡하겠구나!’라고 소리치고는 내쳤습니다. 중원의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신들도 소신과 비슷한 푸대접을 받고 궁궐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제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뜻을 모아 조선을 경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부는 악간의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역시 진나라의 농간으로 외교가 꼬이기 시작한 건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주나라 봉국 후예들의 이민족을 멸시하는 풍조 탓이 더 크겠지. 초인목후이관(楚人沐猴而冠)이라는 말이 괜히 아직도 쓰이겠어?’

초인목후이관은 초나라인은 관을 쓴 원숭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의 고사성어로 춘추전국시대 중원 대륙에 살던 많은 고대 중국인들이 이민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초나라는 전국칠웅 중 유일하게 주나라의 시조 무왕이 봉하지 않은 이민족인 묘족이 건국한 나라로 중원 대륙의 다른 나라와는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현재 전국칠웅의 다른 나라에는 이런 초나라와 수백 년째 부대껴 살아왔음에도 초나라인들을 원숭이라도 부르며 비하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판국이니 기원전 3세기의 고대 중국인들이 이제 막 중원 대륙에 발을 디딘 고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기와 사마근은 진나라 출신이라 조선에 귀화하는데 덜 거부감을 느낀 모양이네. 진나라는 오래전부터 서쪽의 이민족하고 부대끼고 살면서 동화 정책을 펼쳤으니까. 그럼 지금 믿을 구석은 흉노와의 동맹뿐이라는 건데······. 흉노로 떠난 사신은 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으면 좋겠구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면 옥좌의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는 순간, 알현실을 지키던 한 병사가 한부의 곁으로 다가와서 읍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전하. 방금 흉노로 떠났던 박사 이연이 궁궐에 도착해서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서 이 박사를 모셔와라. 그렇지 않아도 흉노의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병사는 다시 한번 태자에게 읍한 다음 곧 조선의 관복을 입은 연나라 출신 문관을 알현실로 데리고 왔다.

박사 이연은 한부의 곁으로 다가와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다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소신이 없는 동안 무탈하셨습니까?”

“건강과 내정에는 별문제가 없지만, 외교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던 참이라오. 부디 경만큼은 좋은 소식을 들려줬으면 좋겠소.”

“기뻐하십시오! 전하! 흉노의 선우와 만나서 비단옷과 조선제 잔무늬 은거울을 선물했더니 크게 기뻐하면서 다음에 왕검성과 계에 사신을 보내 왕검 폐하와 전하의 호의에 보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려! 그래서 흉노의 사신은 언제쯤 온다고 하오?”

“흉노의 선우가 말하길 지금은 기병 10만 기를 이끌고 출진하기 직전이라 여유가 없으니 이번 전쟁이 끝나면 본인이 직접 좋은 말 1백 필과 마유주 1천 병을 골라서 사신을 통해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흉노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단 말이오? 혹시 선우가 어느 나라하고 전쟁을 벌일지도 말해주었소?”

“선우는 소신에게 군사기밀을 말하는 것을 꺼렸습니다만, 연회 도중에 우도기왕이라고 불리는 선우의 최측근이 술에 취해서 ‘이번에야말로 이목 그 겁쟁이의 목을 쳐서 창대에 걸어버리자!’ 라고 외치는 걸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알아보니 이목은 조나라의 장군인데, 최근 몇 년간 흉노가 쳐들어오면 병사를 물리기 바쁜 겁많은 장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흉노는 십중팔구 곧 조나라를 침략할 겁니다.”

박사 악간은 박사 이연의 말을 듣고 조금 표정이 밝아지면서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흉노의 대군이 남진하면 한동안은 조나라가 다시 국경을 넘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한부는 사신이 보고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중을 드는 병사에게 소리쳤다.

“당장 상장군을 모셔와라! 어서!”

“아······ 알겠습니다! 전하!”

악간과 이연은 그런 태자를 보고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한부는 그런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미치겠네! 가만히 놔두면 이목이 흉노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겠구나! 발생 연도가 남지 않은 전투라 늘 불안했는데, 하필 그게 지금쯤이라니! 이 상황에선 어떻게 처신해야 하지?’

원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조나라의 전설적인 명장 이목은 몇 년 동안이나 흉노의 기병대가 국경 마을을 약탈하면 병사를 물려서 적을 방심하게 한 다음 흉노의 선우가 직접 10만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조나라 국경 깊숙한 곳까지 유인하여 포위섬멸 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선우는 간신히 조나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지만, 흉노는 10만기나 되는 기병을 대부분 잃고 향후 약 10년 동안 조나라 국경 근처에는 얼씬도 대지 못했다고 한다.

한부는 먼발치에서 철가면을 쓴 무명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계속 갈등했다.

‘이목을 도와서 흉노를 같이 치고 조나라의 환심을 얻어야 하나? 아니면 흉노의 기병대를 구출하고 흉노하고 동맹을 맺어야 하나?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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